당선된 국회의원에게... "이 원수 갚을 자 누구인가"

문진수 2024. 4. 14.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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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하는데 한국은 아무 소리 못해... 22대 국회는 '간토학살특별법' 제정해야

[문진수 기자]

 2023년 9월 3일 씨알재단 주관으로 동경 아라카와 강변에서 열린 관동대학살 100주기 추모제에 세워진 6661명의 희생자 넋전들
ⓒ 신아연
 
지금으로부터 101년 전. 일본 간토(關東) 지역에 규모 7.9의 대지진이 발생한다. 10만 명이 넘는 사람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 강진으로 동경을 포함한 관동지방 일대는 아수라장이 된다. 생존자들에게 공포와 두려움이 독버섯처럼 엄습한 가운데, 이 혼란을 틈타 재일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타고 방화와 약탈을 일삼는다는 유언비어가 빠르게 번진다. 일본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한다. 이때부터 군대와 경찰, 자경단이 조직적으로 움직이며 '조센징'을 색출해 죽이는 대학살이 시작된다. 1923년 9월에 일어난 간토 학살(1923년)이다.

이 과정에서 일본에 거주하고 있던 조선인 수천 명이 무참히 살해된다. 6661명. <독립신문>에 실린(1923.12.5) 희생자들 수치다. 실제로 몇 명이 살해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떻게 이런 참극이 일어나게 된 걸까. 일본 경제가 불황으로 접어들면서 '조선인이 일본인 일자리를 빼앗고 있다'라는 의식이 퍼져 있었고, 희생양이 필요했던 일본 정부가 자국민의 분노를 돌리기 위해 기획한 시나리오의 결과라는 주장이 정설이다. 간토 학살을 계획된 집단학살 즉 '제노사이드(genocide)'라고 부르는 이유다.

일본 정부는 이 수치를 인정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간토 학살 사건 자체를 부정한다. 방침은 간명하다. 사건을 입증할 근거 자료가 없다는 것이다. 조사한 적이 없으므로 자료가 없는 건 당연하다. 반대로 집단학살의 증거가 될 만한 것을 은폐·폐기했을 가능성이 훨씬 크다. 하지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다. 이미 밝혀진 것 외에 사건의 실체를 보여주는 새로운 증거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련한 동포가 적지에서 피바다를 이루었다"
 
 간토학살 사건을 다룬 상해판 독립신문 기사(1923.12.5)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있는(헌법 전문을 보라!) 대한민국 정부는 이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을까. 놀랍게도, 나라의 주권을 되찾은 이래 지금까지 일본 정부에 공식적으로 이 사건의 진상 규명을 요청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이 나라 정부가 임시정부의 계승자라고 할 수 있는지 의구심이 드는 대목이다.

임시정부의 기관지였던 <독립신문>은 "슬프다. 칠천의 가련한 동포가 적지에서 피바다를 이루었다... 피 같은 송장을 보니 가슴이 쓰리고 몸이 떨린다... 이 원수 갚을 자, 누구인가"라고 적고 있다.

동포 수천 명이 적지에서 무참히 살해된 사건 앞에서, '임시' 정부는 통한의 눈물을 흘리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이미 나라의 주권을 빼앗긴 처지였으므로.

하지만 독립 국가의 '정식'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도 여전히 우리 정부는 일본에 이 사건에 대한 진상을 밝히라는 요청을 하지 못하고 있다. 북한이 "일본의 국가권력이 발동되어 조직적이고 계획적으로 감행한 천인공노할 살육 만행"(2023.11.13. 노동신문)이라며 일본 정부를 맹비난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1923년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
ⓒ 재일한인역사자료관
 
대한민국 국회는 어떨까. 19대에 특별법이 처음 발의(2014년 4월)되었으나 회기 만료로 폐기된 선례가 있고, 21대에 재차 발의(2023년 3월)되었으나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다시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2023년은 간토 학살 사건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되는 해였다. 이 끔찍한 사건의 진상을 투명하게 밝히고 피해자들이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법률이 제정되어 억울하게 죽은 원혼들을 달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시민들의 청원이 답지했다. 하지만 국회는 이 바람을 외면했고 직무를 유기했다.

21대 국회 때 발의된 '간토 학살 특별법(유기홍 의원 대표 발의)'에는 사건의 진상 규명과 피해자 및 유족의 명예 회복, 유해 발굴 및 봉환, 추도 공간 조성이 담겨 있다. 이 법안이 국회 문턱을 넘었다고 하더라도 지금까지 일본 정부가 보여준 태도로 볼 때 추도 공간 조성을 제외한 나머지 사업들은 실현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조선 침략을 근대화로 미화하고 A급 전범들의 위패가 있는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자들이 일본을 지배하고 있는 한 진상 규명과 유해 발굴 작업이 이루어질 가능성은 희박하다.

우리가 계속 싸우고 있다고 알려야 한다

하지만 법안의 실효성과 상관없이, 민의(民意)를 대표하는 기관인 국회가 이 법률을 제정하는 건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반인륜적 범죄의 실상을 알림으로써 국제 사회에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인권'의 중요성을 환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유엔 국제사법재판소(ICJ)가 이 끔찍한 사건을 '제노사이드'로 바라보도록 압력을 넣어야 한다.

영화 <암살>(2015)의 여주인공 안옥윤이 했던 말 그대로다. 우리는 계속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알려야 한다. 무려 한 세기가 흘렀음에도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한 칠천여 동포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마땅히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역사는 기록이며 기억이다. 기록되지 않은 역사는 잊히기 마련이다. 중국은 일제에 의해 최소 12만 명에서 최대 35만 명이 살해된 난징대학살 사건(1937년)을 잊지 않기 위해 난징(南京)시에 기념관을 세웠고, '300000'이라는 숫자를 여러 곳에 새겨 두고 있다. 기념관에는 발굴된 희생자들의 유골도 전시되어 있다.

개장(1985년 8월 15일) 이후 2017년까지 9천만 명이 넘는 사람이 기념관을 찾았다고 한다. 그중에는 가이후 도시키(海部俊樹),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등 일본 총리 대신이 넷이나 포함되어 있다. 가해국의 총리가 피해국의 기념관에 들러 잘못을 사죄하고 참배한 것이다.

언젠가 이 땅 어디엔가 간토 학살 기념관이 만들어진다면, 우리도 희생자들의 이름을 벽에 새길 수 있을까. 위령탑 앞에서 일본 총리 대신이 헌화하는 장면을 볼 수 있을까. 아픈 역사를 뛰어넘어 사이좋은 이웃으로 살아가는 평화의 시대를 열어갈 수 있을까. 
 
 난징대학살기념관. 난징대학살이 일어난 시점과 희생자 숫자가 새겨져 있다.
ⓒ 난징대학살기념관
  
22대 총선이 끝났다. 이 법안을 다시 살릴 것인지 그대로 방치할 것인지는 여의도에 새로 입성한 의원들의 손에 달려 있다. 누군가는 이 법안의 취지에 공감할 것이고, 누군가는 그렇지 않을지 모른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생각하는 이가 있을 것이고, 과거의 아픈 상처를 쑤시기보다 미래지향적인 관점에서 한국과 일본의 우호 관계를 돈독히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믿는 이가 있을 것이다. 어떤 철학을 갖고 있든, 귀하가 대한민국 사람이고, 간토 학살 사건을 알고 있다면 <독립신문>에 실린 이 추도문을 읽어보시길 바란다.
 
나라가 망함에 누군들 서럽지 않겠는가만, 날이 갈수록 아픔이 새롭다. 어쩌면 이토록 참혹할 수 있단 말인가. 가슴이 메고 살이 떨린다. 저 무도하고 포악한 원수 왜놈이여. 내 것을 다 빼앗고 목숨을 가져가면서도 무엇이 부족해 아주 싹까지 없애려 하는가. 쇠뭉치는 머리를 부수고 창은 가슴을 찌른다. 묶어놓고 짓밟으며 몰아넣고 총을 쏘니 피가 모여 내(川)가 되고 살이 모여 뫼(山)가 되었네. 먼지처럼 날아가는 목숨은 파리와 구더기와 다름이 없구나... 서러운지고. 아픔이여. 오직 눈물뿐이로다.
- <독립신문> 추도문 중 일부 발췌
 
스코틀랜드 철학자 매킨타이어(A.Maclntyre)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답하려면, 그전에 '나는 어떤 이야기의 일부인가?'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내가 어떤 이야기의 일부인지를 아는 것. 이 서사적 탐색이 우리의 삶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줄 것이라 믿는다.

우리는 모두 '동해 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를 부르며 살아갈 대한국인이다. 22대 총선에 당선된 분들에게 축하의 인사를 건네며, 간토 학살 특별법을 통과시켜 주실 것을 간곡히 당부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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