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문이 걸어갔나"... 덕수궁 곳곳 숨겨진 뒷이야기
서울 한복판, 많은 이에게 가깝고도 아직은 낯선 덕수궁이 있습니다. 직접 그 아름다움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덕수궁을 두 발로 느끼며 발견한 이야기들을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덕수궁의 숨겨진 면면들을 쉽고 재미있게 풀어가며, 이 고궁이 지닌 매력을 전해드릴 예정입니다. <기자말>
[박배민 기자]
▲ 1906년에 재건되어 100년을 견뎌온 단층 중화전 |
ⓒ 박배민 |
📌 사적 '덕수궁(德壽宮)'
주소: 서울 중구 세종대로 99 (정동)
시대: 조선, 대한제국
탐방일: 2024년 4월 2일
덕수궁 연혁
1592년 이전: 월산대군 사저
1593년: 정릉동 행궁으로 사용
1611년: 경운궁으로 개칭
1897년: 대한제국 황궁으로 사용 시작
1904년: 대화재 발생 (중화전 등 대부분 전각 소실)
1906년: 대대적 중건
1907년: 고종의 황위 이양 후, 덕수궁으로 개칭
1910년: 석조전 완공
차량이 바쁘게 오가는 서울시청 앞, 유난히 눈에 띄는 고즈넉한 휴식처가 있다. 바로 덕수궁이다. 콘크리트와 철근으로 만들 어진 고층 건물 사이에서, 나무와 돌로 지어진 덕수궁이 이색적인 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4월 초, 필자는 다시 한 번 덕수궁을 찾았다. 덕수궁은 한국 근대화의 상징이면서 한 국가의 쇠락을 떠올리게 하고, 현대에 와서는 문화예술과 함께하는 여러 감정이 중첩된 공간이다. 문화유산에 깊은 애정을 가진 필자에게 덕수궁은 이미 익숙한 곳이지만, 여전히 새롭게 알아갈 것이 많은 곳이기도 하다.
▲ 월대 위에서 수문장과 사진을 찍는 관광객 |
ⓒ 박배민 |
▲ 1968년 후퇴 이전 전, 외떨어져 있는 대한문 |
ⓒ 서울기록원 (공공누리 제1유형) |
고종실록(1906년 4월 25일 자)을 보면 대한문(大漢門)을 대안문(大安門)으로 이름을 고쳐 지으라는 고종의 어명을 볼 수 있다. 항간에는 여러 가지 낭설이 떠돌지만 적어도 실록에는 이름을 바꾼 이유는 따로 나오지 않는다.
▲ 대한문의 현재 위치과 당초 위치 비교 |
ⓒ 구글 맵스 캡쳐 후 박배민 디자인 |
문이 제자리를 잃은 안타까운 사실과는 별개로, 대한문의 이동 과정이 흥미롭다. <나의문화유산답사기 - 서울편 2>에서 유홍준 교수는 1970년 대한문 드잡이 장인 김천석이 해체하지 않고 기와를 제거한 뒤, 문의 기둥을 줄로 묶어 밀고 당겨, 마치 걸어가듯 대한문을 이동시켰다는 이야기로 놀라움을 자아낸다. 공사를 지켜보던 시민들은 그 모습을 '대한문이 걸어갔다'고 표현했다. 이 거대한 문이, 어떻게 틀어지지도 않고 깔끔하게 옮겨졌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 ’대안문’ 당시 월대가 명확히 확인된다(1902~1903년경 촬영). |
ⓒ 문화재청 (공공누리 제1유형) |
대한제국 법궁의 정문으로 사용됐던 대한문(대안문)은 그 위엄을 나타내기 위해 문 앞에 월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일제에 의해 헐렸던 월대는 2020년 들어서야 복원 작업이 시작됐다. 월대는 3년 간의 복원을 마치고, 작년 여름부터 시민에게 개방 중이다.
▲ 대한문 앞 월대가 형태가 사라진 모습. 1930년대 추정. |
ⓒ 서울역사아카이브 (공공누리 제1유형) |
'대한문 위치부터 바로 잡자'는 측은 월대의 복원이 원 위치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이상 본래 의미를 찾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반면, 도심 내 고층 빌딩 사이에서 덕수궁의 영역 확장을 강조한 측은, 서울 도심의 구조를 단기간 내에 대대적으로 변경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며 불만족스럽더라도 단계적 접근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이러한 논란 속에서, 일제에 의해 손상된 월대는 2023년 여름, 마침내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 수문장 교대 의식 중 월대에서 내려오는 호위군 |
ⓒ 박배민 |
잊혀진 정문, 인화문
▲ 이해를 돕기 위한 과거 덕수궁 건물 배치 시각화 |
ⓒ 구글 맵스 캡쳐 후, 박배민 디자인 |
수문장 의식이 끝난 직후 매표소로 관람객이 몰린다. 필자는 기념할 표가 필요하지 않아 카드 결제로 대기 없이 입장한다. 대한문을 넘어가기 전에 인화문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많은 사람이 대한문이 예전부터 덕수궁의 정문이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덕수궁의 첫 번째 정문이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 1902년 당시 인화문의 모습. 처마 위에 올라간 잡상의 수(9개)로 문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다. |
ⓒ 문화재청(공공누리 제1유형) |
덕수궁은 처음부터 궁궐로 계획된 곳이 아니다. 월산대군(성종의 형)의 사저부터 시작하여 행궁을 거쳐 대한제국의 법궁으로 자리매김한, 다사다난한 역사를 가진 궁이다. 때문에 많은 변화를 겪었는데 그 흔적 중 하나가 인화문이다. 인화문은 덕수궁(당시 이름은 경운궁)의 정전이 즉조당일 때 사용되던 정문이다.
▲ 중화전이 없는 걸로 보아 중화전이 창건(1902년) 이전으로 추정되는 사진(엽서). 우진각지붕의 인화문이 보인다. |
ⓒ 한국풍속인물사적명승사진첩(국립중앙도서관 소장) |
지금은 주춧돌도 찾을 수 없지만, 중화문 앞에 자리 잡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풍속인물사적명승사진첩에 수록된 구성헌, 대한문 위치를 통해 인화문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 인화문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후 다시 덕수궁으로 돌아올 때도 사용했고, 명성황후 국장을 치를 때도 사용되었다.
▲ 인화문 현판. 가로 길이가 3.5m에 달한다. 현판 크기로 인화문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
ⓒ 국립고궁박물관(공공누리 제1유형) |
유일무이한 두 개의 금천
▲ 덕수궁 금천교 |
ⓒ 박배민 |
필자가 서있는 금천교는 1986년 복원된 두 번째 금천교다. 그렇다면 첫 번째 금천교는 어디에 있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현존하는 중화전과 중화문 사이로 흘렀을 가능성이 크다.
▲ 물길이 막혀 있는 덕수궁 금천의 모습(금천교 위에서 촬영) |
ⓒ 박배민 |
안타깝지만, 현재 금천교는 볼품없기 짝이 없다. 물길도 끊어져 흉내만 내놓았고, 대한문과 금천교가 너무 달라붙어 있기 때문이다.
경복궁, 창덕궁에 비해 위계가 낮은 창경궁도 홍화문(정문)과 옥천교(창경궁 금천교 이름)의 거리가 17~19m 정도 되는 것에 비하면 덕수궁은 채 3~5m 안팎으로 그 거리가 말도 안 되게 가깝다. 대한문이 계속 궁 내로 밀려났기 때문이다. 금천교 위에서 아쉬움을 안고, 중화전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누리집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이향후, <궁궐로 떠나는 힐링여행 : 덕수궁>, 인문산책, 2023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서울 편 2>, 창비, 2017 안창모, <덕수궁>, 동녘, 2009 문화재청, <덕수궁 복원정비 기본계획>, 문화재청, 2005 김종헌, <덕수궁의 복원과 보존>, 한국건축역사학회, 2004 김정동, <고종황제가 사랑한 정동과 덕수궁>, 발언, 2004 *이 기사는 개인 채널에도 함께 게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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