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이 발표한 '죽음 지원법'... 프랑스가 뜨겁다 [목수정의 바스티유 광장]
[목수정 기자]
▲ 지난 3월 7일, 파리 엘리제궁에서 열린 마이아 산두 몰도바 대통령과의 업무 오찬에 앞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미디어 컨퍼런스에 참석하고 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이날 '임종 지원'을 합법화하는 새로운 법안을 발표했다. |
ⓒ AP/연합뉴스 |
지난달, 프랑스 대통령 에마뉘엘 마크롱은 엘리제궁에 직접 기자들을 초대하여 정부가 오랫동안 공들여온 '죽음을 지원하는 법'의 골자를 발표했다.
만인의 만수무강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진화되어 왔던, 적어도 그것을 표명해 왔던 사회 진보의 방향에 '패러다임 전환'을 선언하는 듯한 이 생경한 표현은, 대통령 스스로가 선호하고 선택한 것이라고 프랑스 언론들은 전한다.
흔히 '안락사' 혹은 '존엄사'라는 불리는 방식의 프랑스적 해법을 제시하는 이번 법안은, 기존 유럽 일부 국가들이 실시해 오고 있는 방식을 절충하고 있다.
기존의 존엄사 방법식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적극적 안락사'와 '조력 자살'이 그것이다. 적극적 안락사는 의사가 환자를 사망에 이르게 할 의도로 환자에게 직접 치사제를 주입하는 방식이다. 벨기에,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스페인, 콜롬비아 등 5개국에서 이를 허용하고 있다.
조력 자살은 환자가 스스로 의료진의 지원 하에, 약물을 주입하는 방식이다. 이를 실시하는 대표적인 국가가 스위스다. 스위스는 1942년부터 당사자의 자발적 의지가 확인될 경우, 별다른 조건 없이 이러한 방식을 폭넓게 허용해 왔고, 자살 관광의 모티브를 제공해 오기도 했다. 오스트리아는 2022년부터 불치병에 걸린 중환자의 경우에 한하여 이 방식을 허용해 왔다. 프랑스 정부가 제안하는 '죽음을 지원하는 법'은 적극적 안락사와 조력 자살을 모두 택할 수 있게 하면서, 몇가지 조건을 제시한다.
노인들보다 중년들이 더 원하는 법
마크롱은 아래의 조건들이 임종을 지원하는 프랑스식 법의 차별성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1) 성년의 나이에 이른 사람일 것
2) 당사자가 명확한 분별력, 판단력을 지닌 상태일 것
3) 난치병 환자로 예후가 지극히 부정적인 경우일 것
4) 난치성 통증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상태일 것
정부 발표가 나온 직후, 프랑스 사회에는 뜨거운 찬반 토론이 일고 있다. 정부가 제시한 이러한 조건들은 인지능력의 저하를 동반하는 알츠하이머 같은 신경퇴행성 질환에 걸린 환자들을 원칙적으로 배제한다. 이런 면에서 존엄사 찬성론자들은 전반적으로 정부의 발표를 환영하면서도, 5월 국회가 열리면 현재의 그림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법의 수혜 범위를 확대해 줄 것을 촉구했다.
반면 반대 진영은 분노에 찬 성명을 통해 법안이 갖는 위험을 경고했다. 프랑스완화치료협회(SFAP)는 "정부의 수장이 엄청난 폭력성을 가지고, 환자들과 현장의 의료진들의 일상의 필요와는 거리가 먼 계획을 발표했다"라고 말하며, "이는 돌봄의 가치를 훼손하며, 의료 현장에서 벌어지는 치유의 역학 관계에 심각한 결과를 미칠 것"이라고 비난했다.
종교계도 일제히 우려의 뜻을 표한 가운데, 특히 가톨릭 교단은 성명을 통해 "약물 주입으로 죽음을 사주하는 것을 박애라 부른다면, 그것은 기만이다"라고 평하며, "가장 인간적으로 사람이 죽음을 맞이하도록 돕는 방법은 약물의 주입이 아니라 사랑과 관심, 존중을 건네는 것"이라는 내용의 성명을 냈다.
정치권에서는 좌파 진영이 두루 찬성 의사를 표하고 있는 데 반해, 우파 진영에서는 비판적 의견이 우세하며, 극우 진영은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하고 있다. 반면 여론 조사에선 압도적으로 찬성이 우세다. 여론 조사 기관에 따라 70~75%의 시민들이 제시된 법안에 긍정을 표했다. 특히 녹색당 지지자들은 95%로 가장 열렬한 지지층으로 분류된다.
세대에 따른 온도 차이는 정작 해당 법 적용에 가장 근접해 있는 노인들이 딱히 호의적이지 않음을 보여주면서 불편한 현실을 드러내기도 한다. 여론조사기관 IFOP가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당신은 <죽음 지원법>이 정부가 시급히 다뤄야 할 과제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25세 미만에선 23%, 35-49세에선 54%, 65세 이상에선 44%가 '그렇다'고 답했다.
▲ 존엄사 법제화는 정부가 우선적으로 진행해야 할 사안인가에 대한 설문조사 (2023.4, Ifop)예 :파란색, 아니오 : 분홍색 |
ⓒ ifop |
선택의 자유를 확대하는 길 vs. 의학과 돌봄의 본질 왜곡할 것
이 법의 채택을 위해 활동해 온 시민단체 '존엄하게 죽을 권리 협회(ADMD)'는 "존엄사의 문제는 죽음의 방식을 스스로 택할 수 있는 여지를 열어주는, 자유를 확대하는 문제이며, 그 누구의 자유도 침해하지 않는다. 더 이상, 프랑스인들이 스위스나 벨기에로 떠나지 않고,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자신을 살해하지도 않고, 평안히 스스로 죽음을 택하기 위해 이 법안이 국회에서 조속히 개정될 것을 촉구한다"라고 밝히며, 도덕적·윤리적 논거에 따라 해당 법의 남용을 걱정하는 세력에 반박했다.
의료 현장, 특히 노년의 환자들을 주로 접하는 요양 병원 의료진들이 밝히는 의견은 사뭇 다르다. 30년간 요양 병원에서 일해온 의사로, <존엄사는 사회적 진보인가?>라는 책을 펴낸 이자벨 마랭은, 방송 토론회에 참석해서 "파리 근교에서 의사로 일해온 지난 30년 동안, 요양병원 환자 중, 안락사를 희망하는 환자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라고 밝히며, "정부가 공들여 제시한 법안이 사실은 현장의 필요와 동떨어져 있고, 시급한 것은 요양 병원 시설이 부족한 지역에 충분한 의료 인력과 시설을 공급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 지난 3월 12일, 상원방송채널 Senat TV의 토론 프로그램에서 해당 주제로 토론하는 사람들. 우측 초록색 옷을 입은 여성이 이자벨 마랭. |
ⓒ senat 유튜브방송 캡처 |
1974년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은 낙태허용법을, 1981년 프랑수아 미테랑은 사형제 폐지를, 2013년 프랑수아 올랑드는 동성애자 결혼법을 통과시키면서, 각각 인간의 생로병사와 관혼상제에 개입하는 굵직한 법안들을 역사에 남겼다. 오는 6월 유럽의회 선거를 앞두고 마크롱이 직접 이번 법안을 힘주어 발표하는 것을 보며, 정치권에선 마크롱이 앞선 정치인들처럼 굵직한 발자국을 남기고자 한다며 법안이 지닌 정치적 계산을 분석하기도 한다.
정부의 '죽음 지원법' 이 고통받는 생 대신 평화로운 죽음을 택하고자 하는 사람들에 대한 존중으로 포장되었지만, 실상은 적은 비용으로 노인들을 빨리 보내고자 하는 계산이라는 일부 의료계의 비판이 있다. 이를 의식한 듯 현행 법안은 향후 10년간 11억 유로를 투여하여, 요양 병원 시설과 인력 확대 방안을 담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의료 현장의 지속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지난 20여 년간 지속적으로 공공병원의 병상수를 줄여왔던 것이 한결같은 정부의 의료 분야에서의 태도였기에, 그들의 약속이 얼마나 이행될지 여부에 대해선 의혹의 시선이 있다.
어떤 좋은 제도도 그것을 설계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의 의도에 따라, 얼마든지 악용될 수 있는 것이 현실이다. 마크롱 정부가 지금까지 실천해 온 정책 가운데 자본의 이해를 도모하지 않는 것은 찾아보기 힘들기에, 사람들은 현 정부가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이 법안의 감춰진 의도가 무엇인지를 찾는다.
특이한 것은, 집권 세력의 의도를 삐딱하게 뒤집어 보는 역할을 전통적으로 해온 세력이 좌파였다면, 지금은 우파와 극우파가 하고 있다는 점이다. 노령화 사회는 모든 선진 국가들이 맞이하고 있는 불가피한 현실이다. 제도를 무엇으로 부르든, 평화로운 방식으로 자발적인 죽음을 선택하고자 하는 이들에 대한 해법을 각 사회가 내놓아야 할 시점이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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