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보면]'착한 아이들'은 왜 물리학 교수를 죽였나(上)
중고등학교 소년들로부터 시작된 홍위병
中 청년들 성경이 된 '마오쩌둥 주석 어록'
마오쩌둥이 홍위병을 위험하게 느낀 계기
넷플릭스 시리즈 '삼체'에서 예원제(진 쳉·로잘린드 차오)는 외계와의 통신을 수행하는 비밀 연구소에서 일한다. 그는 인류 최초로 외계 문명으로부터 전파를 수신받는다. 내용은 섬뜩하기 그지없다.
'회신하지 마라. 난 이 세계의 평화주의자다. 내가 먼저 이 메시지를 받은 건 너희 문명의 행운이다. 너희에게 경고한다. 회신하지 마라. 회신하면 우리가 갈 것이다. 너희 세계를 점령할 것이다. 회신하지 마라.'
예원제는 경고를 무시한다. 바로 메시지를 보내 인류를 위기에 빠뜨린다. '와라, 우리 문명은 이미 자구력을 잃었다. 이 세계를 점령하도록 내가 돕겠다.'
그는 인류에게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다. 부정적 사고의 발단은 아버지 예저타이의 죽음. 1966년 칭화대학에서 열린 공개 비판에서 반혁명 분자로 내몰렸다. 물리학 수업에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가르쳤다는 이유에서다. 홍위병의 사정없는 혁대 매질에 숨을 거두고 만다.
홍위병의 사상적 무기는 사회주의 이론이었다. 교육받은 대로 자산계급을 찾아내 감시하고, 폭력적 공격을 가했다. 비단 과거의 일이 아니다. 2000년대 들어 부상한 '분노 청년'도 애국주의로 무장해 비슷하게 움직인다. 주요 공격 대상만 외국으로 다를 뿐이다.
두 집단을 아우르는 중심에는 중화주의가 있다. 모두 서양을 폄하하고 비판한다. 중국이 세상의 중심이 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지도자들은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대약진운동 실패로 정치적 위기에 몰렸던 마오쩌둥은 홍위병을 앞세워 당권파로부터 권력을 빼앗았다. 분노 청년은 공산당이 톈안먼 사건으로 위기에 직면하면서 생긴 분노를 외국으로 돌리는 데 이용됐다.
공산주의에 대한 냉소주의가 팽배한 지금도 기류는 여전하다. 시진핑 주석은 다시 한번 문화대혁명을 일으켜 사상을 통제하려 한다. 그에게 문화대혁명은 아주 익숙한 문화다. 중국 연구가 김인희 씨는 저서 '중국 애국주의 홍위병, 분노 청년'에 다음과 같이 썼다.
"시 주석은 1953년 출생으로 저우언라이의 최측근이며 국무원 부총리였던 시중쉰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 중난하이에서 생활했으며 공산당 간부의 자녀들이 다니는 81중학을 다녔다. 그러나 아버지가 1965년 정치적 이유로 하방(당원이나 공무원의 관료화를 막기 위해 이들을 일정 기간 농촌이나 공장에 보내 노동에 종사하게 한 운동)됨에 따라 81중학에서 '암흑세력의 자식'이라고 비판받게 됐다. (중략) 시 주석의 청소년 시기는 문화대혁명과 맞물린다. 아마도 문화대혁명은 어린 시 주석이 사고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작용을 했을 것이다. 그는 어쩌면 중난하이에서 생활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21세기 마오쩌둥이 돼야겠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알고 보면' 좋을 정보를 두서없이 전달한다. 영화·시리즈를 흥미롭게 관람하는 팁이다.
*마오쩌둥은 홍위병을 '착한 아이들'이라고 불렀다.
*절강성 출신 우한은 1934년 칭화대학 사학과를 졸업하고 윈난대학과 서남연합대학에서 교수로 활동했다. 1949년 중공 정권이 탄생한 뒤에는 북경시 부시장 등 공직을 역임했다. 1957년 공산당에 가입한 그는 1960년 11월 쓴 '해서파관'으로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해서파관'을 물고 늘어진 인물은 마오쩌둥의 네 번째 부인 장칭이다. 우한과는 마오쩌둥의 개고기 파티에서 처음 만났다. 역사에 박식했던 마오쩌둥은 우한과 흥미롭게 역사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둘 사이에서 장칭은 역사 이야기를 몰라 긴 시간 한 마디도 꺼낼 기회가 없었다. 그러다가 겨우 한 마디를 끼어들었는데, 우한은 그것이 틀렸다고 지적했다. 장칭은 자신을 조금도 배려하지 않은 우한에게 화가 났으나 마오쩌둥이 있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복수할 날만 기다리고 있다가 '해서파관' 극본이 발표되자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주인공 해서를 파직한 황제를 마오쩌둥, 무고하게 파면된 해서를 펑더화이로 바꿔볼 여지가 있다고 간주했다. 펑더화이는 마오쩌둥이 주도한 대약진운동의 오류를 지적했다가 반당 분자로 내몰렸던 인물이다. 우한의 해서에 대한 칭송은 펑더화이에 대한 찬사로 곡해됐고, 관련 내용은 군 중앙지 지에팡쥔바오와 당 기관지 런민르바오에 게재되면서 문제가 커졌다. 아이러니하게도 '해서파관'은 마오쩌둥의 사전 승낙으로 집필된 작품이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이 작품을 자신에 대한 은연중 비판으로 간주하고 말았다.
*쉰일곱 살이던 우한은 겨우 열다섯 살이 된 홍위병들에게 온갖 조롱과 멸시를 받았다. 홍위병은 모래를 지져서 목에다 넣고 혁대로 온몸을 때렸다. 귀를 심하게 비틀기까지 하며 고통을 줬다. 집으로 돌아가 연금당한 우한은 수시로 끌려 나와 거리를 청소했다. 갖가지 이유로 길가의 굵은 모래 위에서 무릎에서 피나 날 정도로 꿇어앉기를 반복했다. 우한은 1968년 3월 학생들에게 반역자로 고발당해 공안에 체포됐다. 이듬해 10월 11일 억울함에 피를 토하고 죽었다.
*우한의 부인은 남편을 옹호했다가 노동 개조대로 들어갔다. 병이 악화해 집으로 보내졌는데, 병원에서 우한의 부인임을 알고 치료를 거부해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당시 열다섯 살이던 딸은 갑작스러운 재난에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 하루하루를 고통 속에 지내다가 맹장염에 걸렸는데 어머니와 같은 이유로 수술받지 못했다. 진통제와 수면제를 먹고 숨졌다.
*중국을 뒤흔든 문화대혁명은 중고등학교 소년들로부터 시작됐다. 베이징대학 철학과 당 총서기였던 네위안쯔는 1966년 5월 25일 학내 대자보를 붙였다. 칭화대학 부속 중학교 학생이던 부다화, 왕밍, 뤄샤오하이, 장샤오빙, 타오정 등은 5월 29일 이를 접하고 위안밍위안의 폐허에서 모임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소련의 청년 근위군과 같은 조직을 만들기로 했다. '마오쩌둥 주석을 보위하는 붉은색의 보위병'이라는 의미에서 '홍위병'이라고 명명했다. 열세 살에서 열아홉 살의 소년들 홍위병을 꾸린 순간이었다.
*청소년들이 어린 나이에 정치무대에 서게 된 결정적 계기는 1966년 5·16 통지다. "우리나라는 현재 위대한 무산계급 문화혁명의 고조(高潮)를 맞이했다. 이 고조는 자산계급과 봉건 잔여 세력들이 아직 보존하고 있는 모든 부패한 사상 진지와 문화 진지에 힘 있는 충격을 가한다", "무산계급 문화혁명의 깃발을 높이 들고, 철저히 반당·반사회주의의 소위 '학술권위'라는 자산계급 반동 입장을 폭로하고, 학술·교육·신문·문예·출판계의 자산계급 반동사상을 철저히 비판하며, 이들 문화영역에서의 영도권을 탈취해야 한다" 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학술 문제를 계급 간 정치투쟁으로 바꾸려는 시도였다.
*1965년 하반기부터 1966년 초까지 마오쩌둥은 정치적 위기에 처해 있었다. 당시 주석인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은 대약진운동에 비판적 견해를 피력했다. 사회주의운동도 속도를 조절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마오쩌둥은 당내 수정주의가 만들어져 자본주의 길을 가려 한다고 비판했다. 우한에 머물던 1966년 7월 8일 장칭에게 "천하에 큰 혼란이 일어난 뒤에야 천하가 잘 다스려질 수 있소"라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 마오쩌둥은 무산계급 대혁명, 즉 문화대혁명을 일으켜 류샤오치를 포함한 자신을 비판하는 세력을 제거하고자 했다. 고민 끝에 청소년이 가장 적극적이고, 보수적인 사상이 옅으며, 일정 정도 지식이 있어 문화대혁명을 담당하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마오쩌둥은 1966년 7월 28일 장칭으로부터 칭화대학 부속 중학교 홍위병 조직이 쓴 '혁명의 조반 정신 만세'라는 대자보를 전달받았다. 조반 정신이란 반란을 일으키는 정신을 뜻한다. 마오쩌둥은 홍위병에게 "모든 지주계급, 자산계급, 제국주의 수정주의와 그들의 주구에 대해 분노하고 성토하고 반란을 일으키는 것은 이유가 있는 것으로 우리는 너희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보낸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홍위병을 정식으로 인정한 글은 해당 조직이 전국에서 우후죽순 일어나는 계기가 됐다.
*런민일보는 1966년 8월 23일 사설에서 "마오쩌둥 주석이 스스로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을 결정했다"고 했다. 마오쩌둥의 말을 인용해 다음과 같이 썼다. "완고하게 자본주의 길을 따르는 당권파는 여러 가지 방법과 수단으로 무산계급 문화대혁명 결정에 저항하고 군중 운동을 억압해 문화대혁명을 파괴하려 한다. 혁명 학생들이 광범위하게 일어나 혁명을 일으키고 자본주의 길을 가려는 늙은이들을 반대한 것은 매우 잘한 일이다. 그들의 고집불통이 죽어도 참회하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면 그들을 무너뜨린다고 해도 별일이 아니며 또한 좋은 일이다. 혁명하는 학생조직인 홍위병, 홍기전투소조 등의 혁명조직은 무산계급 독재 하의 합법적인 조직이다. 그들의 행동은 혁명적이며 합법적이다. 누구든 혁명 학생의 혁명 행동을 반대하는 것은 마오 주석의 지도를 직접 위반한 것이며 당 중앙의 결정을 위반한 것이다." 이 사설을 통해 마오쩌둥은 홍위병이 당권파, 즉 자신의 정적인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을 제거할 것을 독려했다. 더불어 홍위병은 자신의 군대이니 누구도 막지 말라고 했다.
*문화대혁명 시기 마오쩌둥에 대한 숭배는 절정에 이르렀다. 홍위병은 마오쩌둥의 지시를 자신들의 무기로 삼았다.
*1966년 8월 18일 군복을 입고 홍위병 완장을 찬 마오쩌둥은 톈안먼 광장에서 홍위병 100만 명을 처음 접견했다. 그는 공개적인 지지를 표명했고, 여덟 차례 접견을 통해 홍위병 1200만 명을 만났다. 마오쩌둥은 톈안먼 성루에 올라 홍위병을 접견했다. 그가 등장할 때면 '동방홍'이란 노래가 울려 퍼졌다. 동방의 붉은 태양이란 뜻으로, 마오쩌둥을 상징했다. 마오쩌둥이 톈안먼 광장을 떠날 때 흘러나온 노래 '대해를 항해할 때는 조타수에 의존한다' 속 조타수도 같은 의미였다.
*마오쩌둥은 홍군의 대장정(농촌에서 이뤄진 토지혁명과 유격 전술로 다져진 홍군은 국민당군의 포위와 추격을 뚫고 탈출을 시도했다. 이때 산맥 열여덟 곳을 넘고 강 열일곱 곳을 건너 1만2500㎞ 대장정을 이룩했다)에서 영감을 얻어 대교류 운동을 개시했다. 홍위병에게 무료 기차표를 지급하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문화대혁명을 전하도록 했다. 베이징의 홍위병은 문화대혁명 이념을 전파하기 위해 전국 각지의 학교와 공장을 순례했다. 지방의 홍위병은 학습을 위해 베이징으로 몰려들었다. 마오쩌둥은 홍위병들의 대교류로 교통 문제가 발생하자 혁명 선배들의 경험을 본받아 도보로 여행하라고 했다.
*마오쩌둥은 1966년 11월 10일과 11일 베이징에서 일곱 번째로 각지에서 모인 홍위병 200만 명을 접견했다. 성루에 오르자 홍위병은 "마오쩌둥 주석 만세!"라고 소리쳤다. 혁명의 어린 장수들은 선홍색의 '홍위병' 완장을 차고 손에는 붉은색으로 빛나는 '마오쩌둥 주석 어록'을 들었다. 차량 행렬은 30여 리에 달하는 붉은색의 거대한 흐름을 만들었다.
*혁명은 인민이나 당에 대한 충성을 빗겨 갔다. 오직 마오쩌둥에 대한 충성만을 가리켰다. 마오쩌둥은 존경이 아니라 신앙의 대상이 됐다. 집마다 마오쩌둥 초상화를 걸고, 곳곳에 마오쩌둥 어록을 적은 팻말을 설치했다. 항상 마오쩌둥 어록을 학습하고, 그의 사상을 선전했다. 매일 아침 각 직장에선 마오쩌둥 초상화를 향해 세 번 고개 숙여 인사하고 마오쩌둥에게 가르침을 청했다. 업무가 끝나면 똑같은 행위를 하고 마오쩌둥에게 그날의 성과를 보고했다.
*어떤 군대의 간호학교 교사와 학생은 마오쩌둥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붉은 비단에 화려한 실로 "마오쩌둥 주석님 만수무강하십시오"라는 글을 새긴 깃발을 만들었다. 오래 살라는 의미의 수(壽) 자는 모든 교사와 학생이 이틀 밤을 새워 한 땀씩 수놓은 것이었다.
*마오쩌둥 어록을 작은 책으로 묶어 사병들에게 암기시키자고 제안한 사람은 린뱌오였다. 붉은색 표지라서 '소홍서'라고도 불린 '마오쩌둥 주석 어록'은 1964년 출판됐다. 중국 청년들의 성경이 됐으며 마오쩌둥 개인을 숭배하는 부적이 됐다. 그렇게 전국은 마오쩌둥 사상을 공부하는 학교가 됐다. 홍위병은 단순히 마오쩌둥 사상을 학습하고 선전하는 것에 머물지 않았다. 계급투쟁의 선봉으로 직접 사회정화에 나섰다. "혁명은 곧 반란이며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 것은 100% 수정주의"라며 마오쩌둥 지시를 구호로 삼고 폭력을 행사했다. 마오쩌둥은 혁명이란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타도하는 폭력적 행동이라고 강조했다.
*홍위병의 폭력적 행동은 점점 거세지고 범위도 넓어졌다. 학교에서 사회로, 베이징에서 전국으로, 선생님과 친구에서 우귀사신으로, 다시 권력을 가진 주자파로 나아갔다. 우귀사신은 소 귀신과 뱀 귀신이란 뜻이다. 문화대혁명 때는 봉건적 요소와 부르주아적인 것과 관련한 모든 사람을 그렇게 불렀다.
*홍위병에게 찍힌 사람들은 온갖 비판을 받고 잔혹한 형벌을 받았다. 1966년 10월 홍위병은 우귀사신 약 2만 명을 적발해 비판했다. 그들과 그의 가족 수십만 명도 도시에서 쫓아냈다.
*'마오쩌둥 주석 어록' 가운데 홍위병이 자주 인용한 말은 "만약 적이 반대하면 우리는 옹호할 것이다. 만약 적이 옹호하면 우리는 반대할 것이다"이다. 홍위병은 복잡한 사회를 무산계급과 자산계급으로 구분하고, 현대화와 관련 있는 사상과 물건, 전통을 모두 봉건주의, 자본주의, 수정주의 사상이라며 부숴버렸다.
*문화대혁명의 목적은 자본주의로 이어지는 구멍을 모조리 틀어막고, 수정주의를 길러내는 모든 부화기를 박살 내는 것이었다. 긴 머리나 파마머리를 잘못된 머리 모양이라며 길거리에서 자르는 일이 벌어질 정도였다. 부르주아의 산물인 꽃집도 파괴했다. 타락한 부르주아의 상징인 고양이도 학살했다.
*문화대혁명 시기 폭력행위를 비교하면 여자가 남자보다 더 잔인했다. 그리고 중학생이 대학생보다 더 잔인했다. 홍위병 운동에 참여했던 션판이란 작가는 당시 열두 살이었다. 홍위병이 인민해방군 사령관이던 뤄 장군을 심판한 순간을 다음과 같이 기억했다. "그 끔찍한 모습을 보면서도 나는 아무런 동정심도 느끼지 않았다. 확성기의 구호를 따라 외쳤다. 피가 끓어올랐고 앞에 앉은 적에 대한 분노가 점점 더 커졌다. 집회가 절반 정도 진행됐을 때 늙은 장군의 몸이 다시 앞으로 무너져 내렸다. '또 죽은 연기를 하는군'이라고 우리는 소리쳤다. '어서 일으켜 세워! 어서!' 그러나 장군은 정말로 죽어 있었다."
*마오쩌둥이 홍위병이 위험한 존재임을 깨닫기 시작한 건 그들을 정식으로 인정한 지 갓 두 달쯤 되는 시점이었다. 그는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17주년 기념일인 1966년 10월 1일 홍위병을 네 번째로 접견했다. 이날 모인 홍위병은 무려 150만 명. 마오쩌둥은 오전 접견을 마치고 인민대회당에서 쉬다가 톈안먼으로 돌아와 홍위병과 함께 불꽃놀이와 국경절 행사를 즐길 예정이었다. 그러나 톈안먼 광장으로 향하던 그의 차는 열렬한 지지를 보이는 홍위병들로 인해 되돌아가야 했다. 마오쩌둥은 이날 일로 홍위병의 존재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10월 18일 다섯 번째로 접견할 때 그의 표정에는 짜증이 섞여 있었다. 마오쩌둥은 11월 3일 홍위병을 여섯 번째로 접견했는데, 이전보다 더 피곤해 보였으며 어쩔 수 없이 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1966년 하반기부터 중국에선 각지에서 무장투쟁이 벌어졌다. 많은 공장도 휴업에 들어갔다. 교통도 홍위병의 대교류로 마비됐다. 마오쩌둥은 11월 25일과 26일에 연달아 홍위병을 접견하고 대교류 시에 편의를 제공하지 않겠다고 통지했다. 이듬해 1월 권력다툼 뒤 조반파 내부에서 무력투쟁이 일어나 전국은 내전 상태에 빠졌다. 홍위병의 폭력행위는 규모가 매우 커져서 많은 지역에 군대가 개입하고 총과 대포, 탱크가 동원됐다.
*마오쩌둥은 1967년 런민일보 등에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을 끝까지 진행하자'라는 사설을 발표하며 홍위병을 공격했다. "우리 현대사에서 혁명은 모두 학생운동에서 시작해 노동자 운동, 농민 운동으로 발전했는데, 이는 객관적인 규율이다. 문화대혁명은 장차 이러한 규율에 따라 더욱 발전할 것이다." 홍위병의 역사적 사명이 끝났음을 말하는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1967년 3월 14일 중공 중앙과 국무원은 "학생들은 모두 원래의 생산 단위로 돌아가거나 혹은 학교로 돌아가 혁명을 복습하고 생산노동에 참가하라"고 통지했다.
*런민일보는 1968년 12월 22일 '우리는 두 개의 손을 가지고 있는데 도시에서 공짜 밥을 먹을 수 없다'라는 사설을 발표했다. 마오의 지시를 전달하는 방식으로 "지식 청년은 농촌으로 가서 가난한 농민에게 교육을 다시 받은 것이 매우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 뒤 전국에서 대규모로 상산 하향 운동이 시작됐다. 많은 지식 청년이 농촌, 산간, 변경지역으로 이동해 농업 생산에 참여하며 노동을 단련했다. 그때부터 홍위병은 지식 청년이란 이름으로 대신하게 됐다. 1968년부터 1980년까지 1200만~1800만 명에 달하는 학생들이 도시에서 추방됐다.
참고 자료 : 김인희 지음·발행처 푸른역사 '중국 애국주의 홍위병, 분노청년(2021)', 빌 헤이턴 지음·조율리 번역·발행처 다산초당 '중국이 말하지 않는 중국(2023)', 김재선 지음·발행처 한국학술정보 '모택동과 문화대혁명', 김범송 지음·발행처 역락 '모택동과 중국혁명 1(2024)', 필립 쇼트 지음·양현수 번역·발행처 교양인 '마오쩌둥 2: 문화혁명의 붉은 황제 1937~1976(2019)' 등.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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