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가라는 남편... 동네 사람들 모두 울린 편지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기자]
▲ 정이형 선생 |
ⓒ 국가보훈부 |
1950년 5월 30일 제2대 총선, 서울 마포구 을의 후보자는 16명(경쟁률 16대 1)이었다. 전국 경쟁률 10.5 대 1, 서울 경쟁률 10.1 대 1을 상회하는 수치였다. 여기서는 독립운동가이지만 이승만 정권 각료였던 무소속 이종현이 25.1%의 득표율로 당선됐다.
그런데 득표율 2.4%로 8위에 그친 무소속 후보자의 이력이 상당히 특이했다. 8위를 기록한 정이형은 일제강점기 장기수였다. 독립운동 혐의로 해방 이틀 뒤인 1945년 8월 17일까지 무려 18년 5개월 17일간이나 옥살이한 인물이다. 일왕(천황) 암살을 모의했다는 혐의로 근 22년 2개월간 투옥된 박열을 연상케 하는 독립투사다.
"나의 직업은 독립운동이다"
정이형은 또 다른 면에서도 주목할 만했다. 해방 뒤에 미군정 입법기관인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의원이 된 그는 부일협력자·민족반역자·간상배 조사위원회 설치를 제안했고, '부일협력자·민족반역자·전범·간상배에 대한 특별조례법률' 초안을 제출해 이 법안이 수정을 거쳐 통과되도록 하는 데 기여했다. 미군정의 최종 거부로 결국 무산되기는 했지만, 그의 노력은 1948년 정부수립 이후의 국회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의 활동에 밑거름이 됐다.
이승만 정권의 훼방 속에서 진행된 1948년 8월 이후의 친일청산이 어느 정도라도 성과를 거둔 상태에서 1950년 총선이 치러졌다면, 정이형의 득표율이 달라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친일청산을 외치면 보수세력으로부터 빨갱이 소리를 듣는 상황에서 총선이 치러졌다. 그래서 그의 공로는 득표에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대한제국이 선포되기 하루 전인 1897년 10월 11일 평안도 의주(혹은 용천군)에서 대지주 가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정이형은 30세 연상의 이복형인 정원형(정원익)의 영향으로 항일 의식을 갖게 됐다. 정원형은 애국계몽단체인 서북학회 회원이었고, 독립군에 군자금과 군수물자를 공급했다.
정원형처럼 일제의 감시를 받게 된 정이형은 형의 권유로 고향을 떠나 금강산으로 갔다가 1919년에 전라도 장성에 정착했다. 여기서 이 지역 3·1운동을 주도하고, 1921년 7월 민족운동을 목적으로 손룡보통학교를 세웠다.
이런 활동은 그가 장성에서도 탄압을 받는 원인이 됐다. 박환 수원대 교수의 <만주지역 민족통합을 이끈 지도자 정이형>은 "1921년 음력 동짓달 동짓날 아침 일찍 형사 2명이 정이형을 산장에서 잡아갔다고 한다"라고 한 뒤 "1922년 음력 3월 2일에 풀려"나왔다고 설명한다.
장성에서 더 이상 활동할 수 없게 된 정이형은 형이 세상을 떠난 1922년에 만주 망명을 결행했다. 대한통의부 제5중대장이 되고 정의부 제1중대장이 된 그는 국내진공작전에도 참여했다. 국가보훈부가 발간한 <독립유공자공훈록> 제4권은 "1925년 3월에는 부하 30여 명을 인솔하고 평안북도 지방에 진입하여 일경 주재소 5개소를 습격하고 허다한 전리품을 가지고 무사히 귀대하였다"고 설명한다.
1921년에 장성에서 아침 일찍 체포됐던 그는 1927년 3월 11일에도 이른 새벽에 체포됐다. 이번에는 하얼빈에서였다. 장장 18년 5개월간 계속될 감옥 생활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그가 무기징역을 받고 장기수가 된 데는 법정 투쟁도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1927년 12월 19일 제1회 공판 때 신의주지방법원 판사가 직업을 묻자, 그는 당시의 금기어를 입에 담았다. "나의 직업은 독립운동이다"라는 대답이 나왔다. 이 시대에는 이런 발언이 신문지상에서는 "나의 직업은 ○○운동이다"로 표기됐다.
그는 제3회 공판 때는 "당신네 임의로 처리하고 싶은 데로 하시오"라고 발언했다. 어떻게 선고하든 개의치 않겠다는 의지를 전달한 것이다. 그런 뒤 일제강점기의 절반 이상을 감옥에서 지내다가 해방 이틀 뒤에야 옥문을 나섰다.
정이형은 제2대 총선 낙선 6년 뒤인 1956년 12월 10일 심장병으로 세상을 마쳤다. 그가 독립운동을 하고 장기수 생활을 하고 해방정국을 사는 동안에 굳건히 신념을 유지할 수 있었던 데는 그 자신의 의지에 더해 이복형의 영향도 컸지만, 또 다른 인물의 역할도 간과할 수 없다. 형이 죽기 얼마 전에 만난 두 번째 아내인 강탄탄(姜灘炭)의 공로도 매우 컸다.
▲ 1992년 1월 5일 자 <한겨레> 7면 특집 기사 |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
13세 때인 1910년에 김씨 여성과 혼인한 정이형은 첫 부인과 사별한 이듬해인 1920년에 여덟 살 적은 강탄탄과 재혼했다. 임진왜란 의병장 강항의 16대손인 강탄탄은 정이형의 독립운동을 실무적으로 보조했다.
1992년 1월 5일 자 <한겨레> 7면 전체의 특집 기사에 따르면, 장성에 거주할 당시에 정이형은 동료 5~10명을 집에 데리고 가서 회의나 대화를 하곤 했다. 이런 일이 한 달에 두세 번 있었다고 한다. 강탄탄은 이런 모임을 위한 식사 준비를 했다. 쌀이 부족할 때는 논에 나가 직접 벼를 베고 나락을 찧기도 했다고 한다.
정기적으로 회의 공간을 마련하고 식사를 제공하는 일은 정이형이 독립운동가의 리더십을 갖는 데 도움이 됐다. 독립운동가를 위해 누군가가 이런 일을 도맡아 했다면, 우리는 그 누군가의 행위도 독립운동의 범주에 넣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독립운동가의 아내가 그렇게 했다고 하면 그 아내의 행위를 독립운동이 아닌 가사노동에 포함시키곤 한다. 독립운동가를 도운 '남'은 독립운동가의 범주에 넣고, 독립운동가를 도운 '아내'는 독립운동가의 범주에서 빼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강탄탄의 역할은 회의 공간을 준비하고 음식을 만드는 선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남편이 손님들을 데리고 집에 와서 하는 독립운동뿐 아니라 밖에 나가서 하는 독립운동의 내용도 훤히 알고 있었다.
강탄탄 부부와 자손들의 단체사진이 실린 위 <한겨레> 기사의 서두에 "정이형의 삶은 남편의 활동 일지를 줄줄이 꿰는 강탄탄(87) 씨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역사의 숨결을 얻었다"는 대목이 있다. 가족사진 밑에는 "강씨는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날짜까지 정확히 짚어 남편의 활동에 관해 증언해 주었다"는 설명문이 있다.
강탄탄은 남편의 외부 활동을 상세히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반세기가 지난 뒤에도 날짜를 정확히 기억했다. 그의 기억력이 탁월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가 남편의 독립운동에 깊이 개입했으리라는 추론을 가능케 하는 대목이다.
강탄탄의 역할은 정이형이 신의주형무소-평양형무소-마포형무소-서대문형무소-대전형무소를 옮겨다니며 불굴의 장기수 생활을 이어가는 데도 이바지했다. 박환 교수의 위 책은 "강탄탄은 평생 독립운동가의 아내로서 훌륭하게 내조하였다"고 한 뒤 이렇게 설명한다.
"1920년대 중반 이후에는 정이형이 오랜 세월 동안 감옥 생활을 하게 되었어도 개가하지 않고 남편만을 섬기며 고난의 세월을 인내하였다. 또한 그렇게 어려운 가운데서도 만주 안동으로 가서 공장 일을 하면서 자식 뒷바라지를 하며 남편과의 재회를 손꼽아 기다린 항일운동가의 아내였다."
강탄탄을 독립운동가로 인정하든 않든, 그가 정이형의 독립운동을 뒷받침한 사실은 확실하다. 그 역시 한국 독립운동에 기여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정이형은 그런 강탄탄에게 거듭거듭 미안함을 표시했다. 위 책에 따르면, 1927년에 체포된 그는 강탄탄의 첫 번째 편지를 받고 나서 4~5개월 뒤에 보낸 답장에서 "왜 시집갈 생각을 않는가?"라고 물었다. 답장하는 데 시간이 걸린 것은 3개월에 한번만 편지를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체포된 뒤에 조카의 면회를 받은 정이형은 1932년 7월에 두 번째 면회인을 만나게 됐다. 이 면회인이 바로 강탄탄이다. 정이형은 강탄탄이 다녀간 뒤에 보낸 편지에서 "내가 한국에서 태어나지 않았거나 강탄탄 여사와 인연이 없었으면 좋았을 터인데"라고 썼다. 이 편지는 동네 사람들에게 회람됐고 "동네 사람들이 모두 울었다고 한다"고 위 책은 말한다.
강탄탄이 1920년부터 25년간 남편의 투쟁을 도운 것은 그 자신도 독립운동에 뜻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남편이 불필요한 일에 인생을 허비하고 있다고 판단됐다면 남편을 돕기보다는 말리는 쪽을 선택했을 것이다.
강탄탄은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남편의 독립운동을 줄줄 꿰고 살았다. 9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남편의 활동을 날짜까지 대면서 기억해 냈다. 그는 독립운동가 정이형의 행적을 머릿속에 기록해둔 사관(史官)이었다. 독립운동에 기여한 이 사관은 92세 때인 1997년 8월 2일 보훈병원에서 숙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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