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 조사 후 벌어진 일 "얼굴 빼고는 전부 멍이..."
[변상철 기자]
배를 타고 4시간을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섬, 대한민국 영토이지만 북한 땅 장산곶이 코앞에 보이는 섬, <심청전>의 전설로 유명한 인당수가 흐르는 곳이 바로 백령도다.
'공익법률지원센터 파이팅챈스'는 백령도에 거주하고 있다는 납북귀환어부 피해자들을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섰다. 지난 3월 18일 오전 8시 인천연안부두를 출발한 여객선은 잔잔한 바다를 미끄러지듯 앞으로 나아갔다. 며칠간 풍랑이 높아 백령도행 선박이 운항하지 못한 탓에 여객선은 빈자리 하나 없는 만석이었다. 왁자지껄한 배 안의 분위기와는 달리 바다는 매우 조용했다.
▲ 항구에서 바라본 백령도. |
ⓒ 변상철 |
4시간가량 달려 백령도에 발을 디뎠다. 백령도에서의 첫 인사는 여객선 선원이 건네는 "내일 배는 통제됐다"는 말이었다. 무슨 뜻인지 몰라 다시 물어보니 내일 풍랑주의보가 예보돼 백령도를 오가는 배가 모두 결항됐다는 것. 예정에 없이 하루 더 섬에 머물러야 한다는 생각에 조금 당황스러웠지만(실제 풍랑주의보는 이틀 더 이어져 나흘을 섬에 머물렀다)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예정했던 납북귀환어부 피해가족을 만나기 위해 렌트카 회사에서 차량을 빌려 약속한 장소로 출발했다.
백령도 중심지라 할 수 있는 진촌리를 지나 20여 분을 더 달려 우리는 가을리의 한 주택 앞에 도착했다. 마당에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리니 텃밭에서 호미질을 하고 있는 노파가 우리를 쳐다봤다. '무진호' 선원이었던 고 박홍수 선원의 아내 손순애씨였다. 그리고 그의 아들 박세철씨가 문을 열고 우리를 맞았다.
고 박홍수씨는 1968년 10월 12일 무진호 선박에 승선해 백령도 앞바다에서 조업 중 북한 선박에 납치돼 억류, 같은 해 12월 17일 귀환했다. 무진호 선원들(장춘비·장익화·김두만·유문숙 등)은 해군방첩대, 인천경찰서 등에서 조사받은 뒤 같은 달 24일 백령도로 돌아왔다. 그리고 박홍수씨는다음해 5월 17일 인천지청에서 검찰조사를 받고 20일 돌아와 다음날인 21일 사망했다.
박홍수씨에 대한 피해사실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2023년 12월 19일 진실규명결정을 통해 확인됐다. 결정문에 따르면 경찰조사시 8일간 불법구금된 사실, 인천지청 조사 후 집에 돌아온 박홍수씨의 온몸에 멍이 들어있었다는 사실 등을 들어 수사기관의 가혹행위가 있었음을 인정했다. 이런 결정에 따라, 박홍수씨의 가족이 '파이팅챈스'에 피해사실에 대한 구제를 요청해 백령도에 들어오게 됐다.
구순 나이에 굽은 허리를 벽에 기대어 앉은 박홍수씨 아내 손순애씨는 남편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하소연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남편은 한국전쟁 때도 켈로부대에서 활약을 했어요. 한국전쟁이 끝난 뒤에도 다시 군에 징집돼 (해병대에서) 군복무를 또 했어요. 그럴 정도로 남편은 애국심이 철저한 사람이었어요. 심지어 남편이 납북되던 날도 군복을 입고 나갔어요. 납북될 때 군복마크를 북한군이 보면 해코지를 당할까봐 군복마크를 입으로 잡아 뜯었다고 하더라고요."
"북한 경비선이 총쏘며 다가와... 해경·해군 배 안 보였다"
납북 당하던 그날의 바다는 해무가 매우 짙었다고 한다. 백령도의 두무진 항에서 출항하려 했던 다른 어선들은 출항을 포기할 정도로 해무가 짙었다고 한다. 무진호와 같은 날 출항하려 했던 선원 정세훈씨(당시 21세, 두무진 거주)는 두무진에서 만난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박홍수씨가 승선했던 무진호가 납북되던 날 안개가 심하게 꼈어요. 저도 선원이라 조업하러 나가려 했지만 안개와 해무로 출항을 포기하고 나가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무진호를 비롯해 제생호, 3호, 9호가 출항을 했다가 납북됐더라고요."
당시 경찰과 해군은 납북됐던 어선 네 척의 행방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언론보도에 따르면, 해경·경찰은 조업 중이던 어선이 풍랑 등으로 인해 침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당시 제생호를 타고 조업 중에 무진호와 함께 납북됐던 선원 이O옥씨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 납북되는 과정에서 사망한 피해자를 기리기 위해 백령도에 세워진 위령비. |
ⓒ 변상철 |
당시 이들이 어로저지선 이남에서 조업 중 잡혀갔는지 알 수 있는 기록은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언론에 다뤄진 기사 중 유일하게 이들의 조업 위치를 언급하는 신문기사를 찾았다.
이들이 납북됐다가 귀환된 1967년 12월 17일 인천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같은 달 20일 경기도경찰국에서 선원들의 기자회견이 열렸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선원들은 '지난 10월 12일 어로저지선 남쪽에서 상어주낙잡이를 하고 있었는데 해무 속에서 나타난 북괴함정 네 척이 기관포와 기관총으로 무차별 난사, 북괴로 납치돼 갔다'(1967.12.20. 경향신문)며, 조업 중 납치된 장소가 어로저지선 이남 지역이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다.
귀환한 선원들의 경찰조사는 12월 24일까지 계속 됐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이 당시의 조사에 대해 '각종 자료조사 및 신청인, 참고인에 대한 진술 조사 결과, 수사기관이 무진호가 귀환한 1967년 12월 17일부터 같은 달 24일까지 영장 없이 불법구금 하였음'을 인정했다.
문제적 '검찰 조사과정'
또 하나의 문제는 검찰 조사과정이었다. 12월 경찰 조사 후 백령도에 돌아온 선원들은 생업에 종사하던 중 1968년 5월 17일 인천지청의 출석요구에 따라 재차 인천에서 조사를 받게 됐다. 인천지청 조사를 받고 20일 돌아온 박홍수씨는 다음날인 21일 자택에서 사망했다. 아내 손씨는 이렇게 말했다.
"남편이 인천에 조사받으러 다녀온 후에 방에서 끙끙 앓았어요. 내가 이렇게 옷을 들춰보니까 얼굴 빼고는 전부 멍이 들었더라고요. 얼마나 맞았는지. 그리고는 다음날 아침에 돌아가신거에요."
진실화해위원회 역시 "무진호 선원 박홍수가 1968. 5. 17. 인천지청에서 피의자신문을 받은 후 같은 달 21일 사망한 점과 관련해 박홍수가 수사정보기관의 공작 대상이었던 점, 아내 손순애가 박홍수 사망 3~4일 전 다시 조사받으러 갔다가 돌아온 후 사망하였다고 진술한 점, 신청인과 손순애가 박홍수의 온몸에 멍이 들어있었다며 직접 목격한 사실을 구체적으로 진술한 점을 종합"해 박홍수씨가 수사기관의 가혹행위를 받았던 것으로 판단했다.
우리는 백령도에 머물며 무진호 선원 고 박홍수씨뿐만 아니라 당시 함께 납북됐던 제생호, 3호, 9호의 유족들을 다수 만날 수 있었다. 진실화해위원회에서 무진호 선원 박홍수씨에 대한 죽음이 국가공권력의 가혹행위와 연관돼 있음을 확인하고 진실규명까지 했지만, 정작 백령도에 거주하고 있는 같은 피해자들의 유족은 국가의 이러한 진실규명 내용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피해자가 알지 못하는 진실화해위원회의 '납북귀환어부들과 그 유족에게 사과' 권고는 허공에 외치는 선언에 불과할 뻔했다.
지금이라도 피해자와 유족을 찾아 진실화해위원회와 검찰 등은 피해자에 대해 실질적인 사과와 피해회복조치 방안을 강구, 이행해야 할 것이다. 피해자가 알지 못하는 진실규명과 권고는 그저 허공에 대고 외치는 선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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