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 빽빽한데 입을 게 없다? '캡슐 옷장'으로 쇼핑 유혹 벗었다 [비크닉]
■ b.트렌드
「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일들도 반복되면 의미가 생깁니다. 일시적 유행에서 지속하는 트렌드가 되는 과정이죠. 트렌드는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욕망과 가치를 반영합니다. 예측할 수 없는 미래의 모호함을 밝히는 한줄기 단서가 되기도 하고요. 비크닉이 흘러가는 유행 속에서 의미 있는 트렌드를 건져 올립니다. 비즈니스적 관점에서는 물론, 나아가 삶의 운용에 있어서 유의미한 ‘통찰(인사이트)’을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봄이라서일까요. 요즘 옷장 앞에서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졌습니다. 늘 사고 또 사도 입을 옷이 없는, 인류 최대의 난제 때문이죠.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는 늘 같은 검은색 터틀넥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같은 옷을 여러 벌 구비해 둔 덕이죠. 최근 잡스만큼은 아니지만, ‘간소한 의생활’을 원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고 해요. 이른바 ‘캡슐 옷장’을 꾸리려는 사람들이죠. 최소 가짓수의 옷으로 최대의 패션 효율을 낼 수 있는, 작지만 엄선된 옷장을 의미합니다.
오늘 비크닉은 바로 이 캡슐 옷장 트렌드에 대해 알아보려고 해요. 캡슐 옷장이 무엇이고, 왜 필요한지, 또 이런 트렌드 속에 숨겨진 의미는 무엇인지를요. 계절이 바뀌며 쇼핑의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지금, 좀 더 주목해봐야 할 움직임이니까요.
캡슐 옷장을 아시나요
캡슐 옷장(capsule wardrobe)에서 캡슐은 ‘작고 콤팩트하다’는 의미예요. 1970년대 미국의 한 의류 부티크에서 ‘필수 의류 품목’을 지칭하기 위해 처음 나온 개념이었다가, 1985년 미국 디자이너 도나 카란이 일 하는 여성을 위해 ‘7가지 편한 아이템(7 Easy Pieces)’으로 구성된 캡슐 옷장을 제안하면서 대중화됐죠.
이후 캡슐 옷장이 TV와 잡지 등 대중매체에 자주 등장하게 된 건 2000년대 이후에요. 자라·H&M 등 이른바 패스트 패션이 활성화했던 시기와 맞물리죠. 옷 쇼핑이 쉬워지고 너도나도 뚱뚱한 옷장을 구비하게 되면서, 더 효율적이고 단순한 옷장에 대한 요구가 나타나기 시작해요.
그러다 지난 코로나19 시기를 거치며 캡슐 옷장은 메가트렌드가 됩니다. 집 안에 갇혀 지내면서 ‘정리 열풍’이 불었던 때와 맞물리죠. 옷장을 가볍게 꾸리길 원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고, 틱톡에서 캡슐 옷장 해시태그(#capsulewardrobe)가 달린 게시물은 11만7000여개에 이르고, 관련 영상의 누적 조회수는 20억회에 달했습니다. 유튜브에서도 같은 해시태그를 단 영상이 1만2000여 건을 상회해요. 관심사 기반의 소셜 네트워크인 핀터레스트나 인스타그램에도 검색어 ‘캡슐 옷장’을 포함하는 게시물들이 수천 건에 이르죠.
국내에서도 지난해부터 블로그나 유튜브에 캡슐 옷장 관련 콘텐트가 늘고 있어요. 주로 생활을 간소하게 정리하는 미니멀리즘과 결합해 옷장을 정리해 단순한 상태로 유지하려는 움직임이에요.
3개월에 33개 돌려 입기
간단한 옷장을 의미하는 캡슐 옷장이 등장한 이유는 역으로 우리가 복잡한 의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해요. 빈 곳 없이 빽빽하게 옷장을 갖췄으면서도 계절마다 새 옷을 사들이고, 한두 번 입고 옷장 구석에 처박아두기 일쑤죠.
미니멀리스트의 관점에서 캡슐 옷장을 제안하는 책 『프로젝트 333』에서는 한 계절에 해당하는 3개월 동안 입을 패션 아이템의 가짓수를 33개로 한정하라고 조언해요. 33개라는 건 옷 외에 신발·액세서리까지 포함된 숫자이고, 이를 조합해 다양한 스타일의 경우의 수를 만들어내는 거죠. 저자 코트니 카버는 자신의 웹사이트 ‘프로젝트 333’에서 계절이 바뀔 때마다 같은 방법으로 정리한 ‘캡슐 옷장’을 공개하고 있어요.
울트라 패스트 패션의 등장
한발 더 나아가 캡슐 옷장은 옷의 윤리적·환경적 영향을 최소화하자는 움직임과도 연결돼 있어요. 인권·환경 운동의 하나로 옷의 소비를 줄이고, 옷장을 단순하게 가꿔나가자는 거죠. 있는 옷을 제대로 정리해서 효율적으로 활용하면 무분별한 옷 쇼핑을 줄일 수 있으니까요.
캡슐 옷장의 필요는 빠르게 생산하고 빠르게 소비하는 패스트 패션과 함께 자라났습니다. 최근에는 쉬인·테무 등 중국발 울트라 패스트 패션도 등장했죠. 더 많이 더 빠르게, 더 싸게 옷을 판매하는 업체들이에요. 100원짜리 옷이 있을 정도니, 우선 주문하고 보자는 사람들도 많죠. 실제로 최근 유튜브 등에는 ‘알리 옷 하울’ ‘테무 옷 하울’ 등의 검색어로 옷을 쇼핑한 뒤 리뷰하는 영상이 늘고 있어요.
옷의 무덤을 만들지 않기 위한 노력
지난해 11월 책 『옷을 사지 않기로 했습니다』를 출간한 이소연(29)씨는 캡슐 옷장이 옷 소비를 줄일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고 제안합니다. 중고거래 플랫폼의 콘텐트 에디터로 일하고 있는 이씨는 지난 2019년부터 햇수로 5년 동안 옷을 전혀 사지 않고 있어요. 한때는 1달러짜리 옷을 말 그대로 매일 같이 쇼핑하던 때도 있었지만, 어느 순간 쉽게 소비하는 저렴한 옷값 이면의 노동착취와 환경오염을 깨닫고 옷 소비를 멈췄죠. 이씨는 책에서 “옷장은 내가 아무렇게나 감정을 배출하듯 충동구매로 들여온 옷들로 가득 찬 무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직접 만나서는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줬어요. 5년 동안 옷을 사지 않았지만, 평생 입고도 남을 만큼 충분한 옷이 있다는 그는 “80억 인구가 매년 800억 벌의 옷을 사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한답니다. 또 “옷의 개수를 세고 용도를 분류해 눈에 보이는 형태로 진열해 두는 캡슐 옷장은 무심코 쇼핑하는 횟수를 줄일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점점 더 빨라지고 있는 유행의 흐름을 타지 않고 완전히 내려버리는 것”이라는 말도 보탰습니다. 옷장은 어차피 유행을 못 따라가고, 최신 유행의 옷을 계속해서 쇼핑할 것이 아니라면 거기서 자유로워지는 게 낫다는 의미죠.
‘싸서’ ‘유행이라서’가 쇼핑의 이유는 될 수 없다
지난달 17일 프랑스 의회는 세계 최초로 패스트 패션을 규제하는 법안을 제정했습니다. 가장 저렴한 의류에 대한 광고를 금지하고, 저가 품목에 대한 환경부담금 부과 등이 주요 내용이죠. 그러면서 초고속 패션 생산의 대표적 사례로 하루 7200개의 신제품을 내는 쉬인의 예를 들었습니다. 상원의 표결까지 완료되면 내년부터 패스트 패션 품목당 5유로(7300원)가 부과된다고 합니다.
캡슐 옷장은 단지 저렴해서, 유행이라서 옷을 무한정 늘리는 습관의 정 반대에 있습니다. 캡슐 옷장을 두고 빠르게 변하는 트렌드에 대한 반발로 해석하는 이유죠. ‘무슨 옷이 유행할까’가 아니라 ‘내 옷장과 스타일을 어떻게 멋지게 유지 할까’로 관심이 이동하고 있습니다. 효율적인 캡슐 옷장을 꾸리려면 결국 나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스타일을 찾을 수밖에 없으니까요. 나의 취향이 유행보다 중요해진 거죠.
봄을 맞아 쇼핑 계획을 세우셨다면, 잠시 멈추고 옷장에 있는 옷부터 꺼내 정리해보는 건 어떨까요. 캡슐까진 아니더라도, 적어도 내가 어떤 옷을 가졌는지를 알면 쇼핑이 훨씬 수월해질 테니까요.
유지연 기자 yoo.jiyo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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