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자 돕는 ‘피해자 구조금’… 망연자실 유족 “국가의 배신”
대법선 당사자 간 손배 청구권 일종으로 봐
가해자 엄벌 vs 피해 회복 ‘양자택일’ 강요받아
예비 신랑 류모(29)씨는 지난해 7월 23일 낮 12시47분 강원도 영월의 한 아파트에서 결혼을 약속했던 정혜주(24)씨를 살해했다. 세간에는 예비 신부를 흉기로 191차례 찌른 참혹한 사건으로 알려졌다. 경찰과 의사, 영안실 담당자, 장의사 모두 유족에게 시신을 보지 않는 것을 권할 정도로 피해자의 상태는 끔찍했다. 지난달 29일 만난 피해자의 모친 차경미(54)씨는 “우리는 첫째 딸의 시신조차 볼 수 없었다”며 “그 사건 이후 우리 가족의 시간은 완전히 멈춰 버렸다”고 토로했다.
유가족은 여전히 사건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7년 전 이혼한 차씨의 남편은 지난해 농사를 망쳤다. 둘째 아들은 다니던 반도체 부품·설비사에서 퇴사했고, 막내 아들은 사건 이후로 ‘누나’라는 말을 더는 입에 담지 않는다. 어머니 차씨도 극심한 불면증과 하지불안에 시달렸다. 지난해 9월엔 서울의 한 정신병원에 한 달간 입원해야만 했다.
차씨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 지내다 지난 1월이 돼서야 한자리에 모일 수 있었다. 그나마 기초생활수급자였던 차씨가 지난해 11월 한국토지주택공사(LH)의 주거 지원과 유족구조금을 받은 덕분이었다. 가족은 트라우마를 일으키던 사건 현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사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가해자와 합의하지 않은 사람들의 피해를 나라에서 조금이라도 보상해주는 좋은 시스템이 있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유족은 1심 선고에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춘천지법 영월지원 제1형사부는 지난 1월 11일 살인 혐의로 기소된 류씨에게 징역 17년을 선고했다. 검찰 구형량인 25년에서 8년이 줄었다. 재판부는 흉기로 191번 찌른 살인을 ‘우발적 행위’라고 봤다. 무엇보다 검찰이 피해자 유족에게 지급한 유족구조금 4273만500원을 피고인 측이 변제한 사실을 정상 참작했다. 국가의 구상권 행사에 따라 피고인 측이 추후 변제한 유족구조금을 ‘피해 회복을 위한 진지한 노력’으로 판단한 것이다.
한국은 강력범죄로 피해자가 사망하고 가해자에게 피해를 배상받지 못한 유족에게 합의 여부와 관계없이 유족구조금을 지원한다. 헌법 제30조에 따르면 구조청구권은 피해자의 엄연한 권리다.
정부 위탁을 받은 범죄피해자지원센터가 피해자들에게 지원 사항을 안내하고, 관할 검찰청이 심의를 거쳐 피해자 월 급여의 24~48개월 수준의 구조금을 지급한다. 이후 법무부로부터 소송 권한을 위임받은 검찰청이 피고인에게 구상권을 행사하는데, 납부 고지·송달 등 자진 납부를 유도한 뒤 가압류 등의 강제 절차를 진행한다.
지난달 20일 춘천지법에서 열린 항소심 첫 공판에서 만난 차씨는 “가해자 측의 합의 요청도 없었고, 공탁도 없었다”며 “그런데도 국가가 지급한 구조금이 어떻게 피고인의 죗값이 되느냐”며 울분을 토했다. 그는 “나라에서 유족구조금을 준다고 해서 받았는데, 그 덕에 (피고인이) 감형됐다. 양형에 영향을 미칠 줄 알았다면 엄마로서 받았겠느냐”며 “국가가 저를 배신하고, 저희에게 사기를 친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법원이 유족구조금을 피고인에게 유리한 사정으로 판단하는 사례는 이번 재판만이 아니다. 엄벌을 탄원하는 유족 의사와 달리 법원은 국가가 지급한 유족구조금을 피고인이 갚았다는 사정만으로 정상 참작을 하는 관행을 보여 왔다.
국민일보는 대법원 판결문 열람 서비스를 통해 ‘유족구조금’이 언급된 형사 사건 1·2심 판결문 50건을 분석했다. 2014년 8월부터 지난 1월까지 이뤄진 재판 가운데 외부에 공개된 판결문이 대상이다. 그 결과 이들 재판의 72%(36건)가 유족구조금을 피고인에게 유리한 정상으로 참작했다. 이 가운데 32건은 유족이 피고인의 엄벌을 탄원하며 합의하지 않은 사건이었고, 27건의 경우 합의는 물론 공탁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분석 대상이 된 사건에서 피해자는 모두 사망했다. 피고인들에게는 살인, 상해치사 등의 혐의가 적용됐다.
법원의 이런 판단이 국가의 범죄피해자 지원 제도를 ‘피고인 조력 제도’로 변질시켰다는 비판도 나온다. 안성훈 형사법무·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유족구조금은 국가가 피고인을 대신해서 주는 돈이 아니다. 합의와 상관없이 범죄 피해를 당하면 누구나 받을 수 있는 기본권”이라며 “법원의 논리대로라면 검찰, 지원센터, 법원이 유족과 합의하지 못한 가해자를 위해 대리 행위를 하는 격”이라고 지적했다.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살인 범죄의 감경 요소로 ‘피해 회복’을 규정하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피고인의 진지한 노력 끝에 합의에 준할 정도로 피해 회복을 시킨 경우’가 해당한다. 안 연구위원은 “구조금을 지급하는 전제가 ‘유족 측이 피해 회복을 못 받았다’는 점”이라며 “즉 가해자가 피해 회복을 위한 진지한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뜻”이라고 강조했다.
유족구조금을 피고인에게 유리한 정상으로 인정하는 건 헌법재판소 판례와도 어긋난다. 헌재는 범죄 피해자의 구조청구권을 ‘국가가 보호 의무를 다하지 못한 점과 피해자에 대한 최소한의 구제가 필요한 점’ 등을 이유로 인정한다. 그러나 대법원은 국가 책임이 아닌 피고인의 ‘불법행위로 인한 소극적 손해배상금’으로 보는 판례를 쌓아 왔다. 이현빈 변호사는 “유족구조금은 국가가 당연히 지급해야 하는 기본권적인 측면도 갖고 있다”면서도 “동시에 대법원은 판례에서 당사자 간 민사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손해배상 청구권의 일종으로 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일선 현장의 실무자들은 이런 취지의 판결들로 인해 범죄 피해자 지원 제도의 근간이 흔들린다고 호소한다. 피해자의 구조금 수령이 피해 당사자 의사에 반하는 결과를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범죄피해지원센터의 한 관계자는 “구조금을 재판 전에 서둘러 받아야 하는 상황에 처한 분들도 있다”며 “그런데 유족에게 ‘구조금이 피고인의 양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안내하면 누가 구조금 신청을 하겠느냐”고 하소연했다. 결국 피해자들이 ‘가해자에 대한 엄벌과 피해로부터의 회복’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강요받고 있다는 것이다.
유족 차경미씨는 “돈이 필요했다면 차라리 개인적으로 합의를 봤을 것”이라며 “결국 내가 4000만원을 아이 목숨값으로 받은 것 아닌가. 구조금이랍시고 받은 금액이 더 큰 상처를 줬다”고 자책했다. 서울고법 춘천재판부 형사1부(재판장 민지현) 심리로 진행되는 이 사건은 오는 17일 선고 공판이 열릴 예정이다.
이정헌 기자, 김효빈 인턴기자 h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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