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길원 목사의 고백록] 봄이다
“애당초 나서는 건 꿈꾸지도 않았다/ 종의 팔자 타고 나 말고삐만 잡았다/ 그래도 격이 있나니 내 이름은/ 격조사.”(문무학, ‘품사 다시 읽기’)
끝내 ‘격(格)을’ 찾고야 만 격조사! 종의 팔자에도 격이 있는데 하물며 사람에게랴. 기왕 품사 이야기가 나왔으니 되새김질하고픈 말이 있다. 고(故) 이어령 박사는 ‘명사로 생각하지 말라’ 했다. 명사로 생각하면 거기서 멈추지만 동사로 생각하면 더 나아갈 수 있다는 거다. 대체 동사로 산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핑이라는 개구리가 있었다. 자신이 살던 연못이 말라 버린다. 모험을 떠난 핑은 커다란 나무 장막 앞에 멈춰 선다. 장애물 앞, 핑은 실의에 빠진다. 그때 부엉이가 나타난다. “무언가 되기 위해서(to be)는 반드시 지금 이 순간 무언가를 해야만(to do) 한단다. 너를 멈추게 만든 그 나무 장막으로 나는 높은 곳에 앉을 수 있었지.” 핑은 용기를 낸다. 있는 힘을 다해 나무를 오른다. 마침내 부엉이가 앉아 있던 곳에 이르게 된다. 스튜어트 A 골드의 ‘핑’이라는 우화집에 나오는 이야기다.
내 모교는 부산 브니엘고등학교다. 당시 친구들 학교의 교훈은 대개 명사로 규정됐다. 이를테면 ‘진리 창조 자유’ 따위였다. 여학교는 대부분 ‘진선미’였다. ‘참되며 착하고 아름답게’라고도 했지만 그 역시 진선미(眞善美)의 명사가 아니고 뭔가. ‘높은 이상, 바른 심성, 으뜸 실력’도 매한가지였다. 그런데 내 모교의 교훈은 왜 그리도 길어야 하는지, 요즘 말로 ‘헐’이었다.
①나는 하나님과 사람과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련다. ②나는 마음껏 자라며, 마음껏 생각하며, 마음껏 일하는 사람이 되련다. ③나는 웃는 자와 같이 웃고, 우는 자와 같이 우는 사람이 되련다. ④나는 조국과 인류가 나를 기다리고 있음을 잊지 않는다.
그때는 몰랐다. 철들고 나서야 교훈이 품고 있는 가치를 깨달았다. 덴마크의 신학자이자 시인 정치가인 그룬트비가 말했던 ‘천 지 인’ 사상이 스며 있었다. 자유로운 영혼을 향한 갈망을 심어 주었다. 내 창의성은 순전히 교훈에서 비롯된다. ‘마음껏’이란 부사가 내 인생을 눈부시게 만들었다. 덤으로 찾아온 축복이었다. 웃는 자와 함께 웃고 우는 자와 함께 우는 삶은 나를 성직자로 불러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공감의 삶이 가정사역의 기초가 됐다. 버겁기만 했던 ‘조국과 인류’는 세계를 품는 월드 크리스천으로 이끌었다. 내겐 삶의 대헌장이었다.
어쩌다 교무실에 불려 간 일이 있었다. 선생님들 책상에는 이런 명패가 놓여 있었다. ‘나는 스승이다.’ 그날 이후 생경하기만 했던 자기 선언은 늘 나를 따라다녔다. 나 스스로 ‘존재’를 묻게 했다. ‘나는 누구로 살아야 하는가.’ 동사의 힘이었다.
며칠 전 아내와 함께 경기도 양수리시장을 찾았다. 카페 이름이 특이했다. ‘강이다.’ 나도 모르게 핸들을 꺾었다. 흐르는 강을 따라 걷고 싶었다. 그러다 첨벙 뛰어들고도 싶었다. 길옆 트럭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 있었다. “슬픈 눈물까지도 방수해 드립니다.” “아픈 마음까지도 철거해 드립니다.” ‘OO방수 공사’라는 회사명만 덜렁 적혀 있었다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는 뒤쫓아가 사진을 찍었다. 비로소 세상이 바뀌고 있음을 알았다. 명사형에서 동사형으로 전환!
요즘 성경을 명사가 아닌 동사로 읽고 있다.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가 아닌 ‘시작이다’ ‘이야기다’ ‘거룩이다’ ‘건국(建國)이다’ ‘행복이다’ 이랬더니 성경이 살아 움직였다. 수족관에 갇혀 흐느적거리는 물고기가 아니었다. 바다에서 막 낚아 올린 푸르른 활어처럼 싱싱하고 힘찼다.
격조사의 격을 높인 문무학 시인은 동사를 이렇게 정의한다. “너는 힘이다 견줄 데 없는 힘이다 너 없이 그 어디에 닿을 수 있으랴 널 만난 문장 끝에선 새 한 마리 비상한다/ 네가 계절이라면 언 땅의 봄이겠다 잠들었던 모든 것 깨어나 솟구치는/ 봄이다/ 꿈틀거리는 동작들이 참 많은.” 촌뜨기에 무지렁이 같던 나를 일으켜 세운 것은 순전히 길고 긴 모교 브니엘의 교훈이었다. 봄이다.
송길원 하이패밀리 대표·동서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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