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저출산과 의대증원 문제, 접근법을 바꿔보자
출산율 하락과 의대 증원(의사 공급) 문제가 국가적 난제다. 저출산과 전공의 사태를 보면서 필자는 국민소득 2만~3만 달러 수준을 넘나든 지난 20여년간 경제·사회 정책의 맹점들을 새삼 주목한다. 그중에 하나는 소득이 증가할수록 시간의 기회비용이 높아짐에 따라 일상에서 재화나 서비스의 양보다 질을 더 중시하게 된다는 사실을 경시하는 정부 정책이다. 여기에는 질을 독립적인 수요·공급 대상으로 제대로 개념화하지 못하고 있는 경제학에도 책임이 있다.
저출산 문제를 보면 부모에겐 단순한 자녀 숫자 못지않게 질도 중요한 고려 사항이다. 부모가 자녀 출산과 양육으로 얻는 행복은 자녀의 수는 물론이고 그 질에서도 나온다. 이 때문에 소득이 증가하고 여성의 경제 활동이 증가해 양육의 기회비용이 높아지면 수와 질에 대한 선택 문제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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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득 증가할수록 양보다 질 중요
양 문제에 집착하는 접근은 실패
높아진 국민 욕구에 맞는 정책을
」
경제학 이론과 경험에 따르면 자녀 질(역량)에 대한 수요는 소득증가에 따른 탄력성이 1보다 큰 우등재(소득 증가율보다 수요가 더 크게 증가하는 재화 및 서비스)다. 반면 자녀 수는 대체로 마이너스 소득 탄력성을 갖는 열등재라는 것이 상식으로 통한다. 그래서 소득 증가에 따라 자녀의 절대 수는 줄어드는 반면, 질에 대한 수요는 소득보다 더 빠르게 증가해 양질의 교육 수요가 늘어난다.
그런데 한국은 물론 선진국에서도 모든 인간을 평등하게 부자로 만든다는 사회민주주의적 이념에 따라 평준화 교육에 치중하고 수월성(秀越性) 교육을 경시해왔다. 질을 중시하는 학부모의 수요 변화에 역행하는 평준화 교육으로 자녀 교육을 하향 평준화시키니 공교육이 무너지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이제 대학 평준화까지 하고 있으니 하나라도 잘 키워 고소득자 만들겠다는 부모의 자연스러운 욕구가 충족되기 어렵다. 결국 자녀를 과외 등 사교육 시장으로 내몰아 양육비 부담만 더 키운다. 설상가상으로 고질적인 대기업 규제가 넘치고, 성장을 촉진하기는커녕 역설적으로 성장을 제약하는 중소기업 정책을 쏟아내고 있다. 이 때문에 고소득 일자리 전망이 안 보이니 양육의 어려움이 가중되고 아이의 장래마저 불안해져 결혼은 물론 출산 동기를 더 떨어뜨린다.
이런 상황에서 부모는 아이를 적게 낳되 교육 투자를 많이 해서 최대한 인재로 키워 성공한 우등재로 만들고 싶어 한다. 하지만 국가의 경제·사회·교육 정책은 정반대로 가고 있다. 아이를 열등재로 만들고, 숫자만 늘리려는 정부의 단선적인 저출산 대책이 효과를 보기 어려운 구조다.
의사 공급 문제도 다르지 않다. 인명을 다루는 의료 서비스는 질적 차이가 크고, 소득 탄력성도 크다. 이 때문에 소득 증가에 따라 고급 의료에 대한 서비스 수요가 빠르게 증가한다. 경제개혁 이론에서는 의사 자격 제도에 따른 진입 규제가 의사의 독점 지대 추구를 조장할 경우 의사 수를 늘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이론은 의사 수가 적어서 생기는 지대와 의사의 실력 차이 때문에 생기는 지대를 구분하지 못하면 반쪽짜리 이론이다.
고소득 사회일수록 의사의 실력 차이에 따른 지대는 커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필요한 인센티브까지 잘못 문제 삼아 의사 수 늘리기에 집착하면, 자칫 의대 평준화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러면 의사 자질의 하향 평준화를 초래해 과거에 실패한 영국처럼 의료 시장을 더 사회주의화하게 될 우려가 있다. 따라서 의대 정원의 합리적 조정과 함께 고도화하는 의료 서비스 수요에 맞춰 다양하게 의과학을 포함한 차별화된 수월성 교육을 강화하는 것이 의료 개혁의 필수 보완과제라 할 수 있다.
의사 공급 문제는 저출산 문제와 연결돼 있다. 미래 직업 전망이 안 좋은 상황에서 부모는 어떻게든 자식을 그 좋다는 의사, 즉 최고의 우등재로 키우려 한다. 사람들이 질적으로 최고의 의료 서비스를 찾아 서울의 ‘빅5 병원’으로 몰리는 상황에서 정부 정책도 이제 의사 수는 물론 최고의 의료 서비스 공급을 균형 있게 살필 때가 됐다. 국민소득이 높아질수록 교육·의료·법률 및 과학·기술 분야 인적자원 시장은 질적 차별화가 심해져 평준화가 독이 된다. 이런 시장에 우등재가 원활히 공급되도록 정책을 펴야 선진국 안착이 그만큼 순조로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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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승희 전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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