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첫 투표' 고3 아이들의 촌철살인, 너무 적확했다
[서부원 기자]
▲ 제22대 국회의원선거일인 10일 광주 북구 광주비엔날레 전시관에 마련된 용봉동 제6투표소를 찾은 유권자들이 투표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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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독 올해 우리 학교 고3 중엔 윤석열 대통령이 '선물한' 나이로 18세가 된 아이들이 많다. 세 명 중 한 명꼴이었는데, 지난주 부리나케 조회나 수업 시간을 활용해 선거 교육에 나선 까닭이다. 적어도 총선의 의미와 투표하는 방법 정도는 미리 일러 주어야 할 성싶어서다.
'생애 첫 투표' 세 명의 고3 학생들
한 명은 지난 주말에 이미 투표를 마쳤고, 나머지 둘은 막 투표하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사전 투표한 아이는 이른 아침이었는데도 20분 넘게 줄을 서야 했다며 당일 투표소의 열기를 전했다. 주민등록증 대신 학생증을 가지고 갔다가 두 번 걸음을 했다며 멋쩍어하기도 했다.
▲ 3월 29일 대구 달서구 한 인쇄소에서 대구시선거관리위원회 관계자가 인쇄된 제22대 국회의원선거 비례대표 투표용지를 점검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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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이나 새누리당처럼 이미 사라진 정당의 이름이 버젓하고, 공화당과 우리공화당처럼 아예 구분조차 되지 않는 곳도 있어 마치 아이들 장난처럼 여겨지기도 했단다. 대한국민당과 대한민국당을 두고선 함정 파놓고 실수를 유도하는 시험 문제에 비유하기도 했다. 오로지 선거를 위해 급조한 정당은 제한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는 아이도 있었다.
지역구 출마 후보자들에 대한 인식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당장 총선이든 지선이든 선거 때만 되면 '작년에 왔던 각설이'처럼 얼굴을 내미는 후보자들에 대한 질타였다. 그들을 향해 "선거 출마가 직업 아니냐"고 반문하면서, 선거를 희화화한다며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 선거 공탁금을 내고 이름 석 자를 알리는 광고 행위라고 잘라 말했다.
선거 때마다 반복된 그들의 '돈지X'이 우리 정치 퇴행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라고 단정하기도 했다. 아무리 자질이 뛰어난 인물이라도 선거 공탁금을 걱정해야 할 만큼 가난하면 정치에 애초 발을 내디딜 수 없다는 거다. 기성 정치인들이 온갖 비리에 연루되고, 자금 마련에 혈안이 된 현실이 또 다른 증거라고 했다.
그들은 누구를 찍었을까?
은근슬쩍 누구를 찍었는지, 어느 정당에 투표했는지 물었다. 아이들은 대번 비밀투표의 원칙에 위배가 되는 위험한 질문이라고 낄낄거렸다. 그저 후보자와 정당에 대한 10대의 선택 기준을 알고 싶다는 뜻이었다며 한 발 뺐다. 투표가 킬러 문항 앞에서 요행을 바라고 찍는 게 아니라면, 그들 나름의 기준이 있으리라 봤다.
"주변에선 오로지 '정권 심판'을 외치는데, 이번 선거는 '상식과 몰상식의 대결'이라고 생각해요. 저희 눈으로 봐도 지난 2년간 너무나 황당하고 몰상식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서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게 창피할 지경이었으니까요."
아이들도 훤히 꿰고 있었다. 대통령의 부인이 명품 백을 받고도 처벌받지 않고, 이태원 참사로 엄청난 희생자가 발생했는데도 책임지는 고위공직자가 하나 없다는 데에 분노했다. 기성세대에겐 물가고의 민생난이 주요 이슈일 테지만, 아이들에겐 해병대 채상병의 허망한 죽음과 정권의 수사 방해가 몰상식의 대표 격이었다. 한마디로, 이번 선거에 '뭣이 중헌디'였다.
그들에게 정당별 호불호는 없었다. 솔직히 아이들은 정당의 이름에는 아무런 관심조차 없었다. 정당들이 1년이 멀다 않고 여론의 추이에 따라 당명을 손바닥 뒤집듯 바꿔온 탓이기도 하지만,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인식이 컸다. 그들은 여당과 야당을 '빨간 당'과 '파란 당' 등으로 통칭했다. 상징색 외엔 구분이 안 된다는 뜻이다.
그들 모두 이번 총선을 두고 '최선'이 아닌 '차악'을 뽑는 선거일 뿐이라고 성토하는 와중에, 한 아이는 그 말조차 사치라며 말을 끊었다. 그는 후보자와 정당의 이름 외엔 아무것도 모르는 '깜깜이 선거'라고 규정했다. 대뜸 내게 지역구 출마자의 공약 중 아는 게 있으면 하나라도 가르쳐달라고 해서 순간 뜨끔했다.
솔직히 나 역시 '정권 심판'이라는 글귀 외엔 떠오르는 게 없었다. 거리엔 정당별로 울긋불긋한 현수막이 하늘을 가릴 듯 펄럭이지만, 공약이라고 할 만한 내용은 드물었다. 서로를 심판하겠다며 악다구니 쓰는 모습에 아이들 보기 민망할 정도였다.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유튜브 콘텐츠를 현수막에 옮겨 적은 듯한 느낌이었다.
"온통 뭔가를 건설하고 설치하겠다는 개발 공약뿐이고, 청소년은커녕 청년 세대를 위한 공약 자체가 거의 보이지 않는데 무슨 투표 기준이 있겠습니까? 질문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거죠. 그래놓고선 청년 세대의 투표율이 낮다고 손가락질하는 어른들을 보면 어이가 없어요."
한 아이가 쭈뼛거리는 나를 향해 '카운터 펀치'를 날렸다. 후보자든 정당이든 청소년을 위한 공약을 내놓은 경우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집으로 배달된 선거공보물을 시험공부 하듯 꼼꼼하게 살펴봤다는 그는 선거 때마다 청소년들은 '투명 인간' 취급을 당하고 있다며 볼멘소리를 했다.
▲ 제22대 국회의원 선거 사전투표 첫날인 5일 광주 북구 삼각동에 마련된 사전투표소에서 시민들이 투표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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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모두 '투표할 때만 주인과 자유인이 되고, 선거가 끝나면 다시 노예로 돌아간다'는 장 자크 루소의 통찰에 무릎을 쳤다. 우리의 현실에 대입해도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고 했다. 표를 달라며 큰절까지 서슴지 않던 후보자들이 금배지를 단 순간 표변하여 유권자의 머리 위에 군림해온 행태를 그들도 익히 알고 있다.
"이제 성인이 되었구나 싶어 어깨가 으쓱하긴 하지만, 선거에 대한 효능감 같은 건 없어요."
아이들과 나눈 대화 중에 가장 서글펐던 이야기다. 이는 자신이 선택한 후보자가 당선되지 않았다는 걸 지적하는 게 아니다. 생애 첫 투표를 한 그들마저 누구를 뽑아도 세상이 별반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무력감이 팽배해있다는 뜻이다. '촛불 혁명'으로도 바꿔내지 못한 대한민국을 그깟 선거 한 번으로 될 것 같으냐는 한 아이의 조롱이 뼈아프다.
'민주주의의 꽃'이라면서 선거를 마치 승패에 연연하는 게임처럼 여기는 강퍅한 세태도 꼬집었다. 공중파와 유튜브가 경쟁이라도 하듯, 정치공학 운운하며 '승부 예측'만 해대는 모습이 황당하다고 말했다. 이번 선거가 끝나면 우리 사회가 어떻게 달라지고 우리의 삶이 얼마나 나아지는지 분석해주는 걸 본 기억이 없다고 했다.
아이들이 말하는 '선거에 대한 효능감'이야말로,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미래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동력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1조 2항의 주상 같은 선언은 선거를 통해 구현되고 증명되어야 한다. 그 책임은 오롯이 우리 기성세대에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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