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에 빚진 마음, 젊은 건축인 여행 지원으로 갚고 싶었죠"

이은주 2024. 4. 10.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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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설계 김태수 건축가
김태수장학재단 젊은 건축인 해외여행 지원
30년 기록 담아 『포트폴리오와 여행』 출간
재미건축가 김태수씨가 1986년 개관한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건물 앞에 서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지난 6일 오후 서울 세종대로 도시건축전시관 도서관에 국내 건축 관련 전문가 60여 명이 모였다.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을 설계한 우규승 씨를 비롯해 최두남 서울대 명예교수, 민현식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장, 김미현 목천김정식문화재단이사장, 전봉희 서울대 교수 등이 참석했다. 김태수 해외건축여행 장학제(이하 '김태수 장학제')의 30주년 기념집 『포트폴리오와 여행』 출간을 기념하는 자리였다. 이 행사의 시발점을 마련한 재미 건축가 김태수(87) 씨도 8년 만에 한국을 찾아 자리를 함께했다.

김씨는 30여 년 전 미국에서 활동하면서 장학재단(T. S. Kim Architectural Fellowship Foundation)을 설립한 주인공. 과천 국립현대미술관과 서울 관훈동 금호미술관, 천안 교보생명 연수원 등이 그의 설계로 지어졌다. 그가 한국 건축계 발전에 도움이 되고 싶다며 젊은 건축인의 해외여행을 지원하기 시작한 일이 서른 해를 넘기고, 수상자 30인의 포트폴리오와 여행기를 담은 책이 최근 출간됐다.

특이한 점은 이 장학제도가 학부 또는 대학원 과정의 학생에게 학업 성과를 평가해 장학금을 주는 게 아니라 일을 시작한 건축인에게 해외 건축 여행 기회를 제공했다는 점이다. 이 일은 그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이었을까. 그가 설계해 1986년 개관한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그를 만났다.

Q : 당시 장학재단을 만든 이유는.
A : 고국에 늘 빚진 마음이 있었다. 대학 때부터 한국 건축 발전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자고 생각했는데, 1961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뒤 미국에서 줄곧 활동해왔다. 1980년대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을 설계하고, 1990년대 서울 사무실을 열며 한국을 자주 오갔는데 작게나마 도움이 될 일을 하고 싶어 시작한 일이었다.
장학생은 해외 유학을 다녀오지 않은 건축계 실무자 중에서 포트폴리오를 심사해 뽑았다. 1992년 첫 수상자를 뽑은 이래 지난해까지 32명에게 주어졌다. 처음엔 미화 8000달러를 수여하는 것으로 시작했으나 몇 차례에 걸쳐 액수를 늘려왔으며, 2022년 우규승 건축가가 10만 달러를 기증하면서 1만7000달러를 수여하고 있다.

Q : 포트폴리오로 뽑은 이유는.
A : 포트폴리오와 2차 면접을 거쳐 뽑았다. 특히 포트폴리오는 단순한 작품집이 아니라 건축가의 모든 비전과 상상과 아이디어를 담은 한 권의 책으로, 건축가에겐 최고의 재산이다. 포트폴리오 없는 건축가는 상상할 수 없다.
한편 이 장학제는 학연 등에 얽매이지 않고 공정하게 심사하는 게 중요한 기준이었다. 서현 서울대 건축학과 교수는 이 기념집에 "30년의 세월을 버틴 공정성이 이 상의 가치를 만들었다, 성별과 학력에 의한 선입견을 붕괴하는 변화 앞에 이 장학제가 있었다"고 썼다.

Q : 왜 여행 장학금인가.
A : 미국에서 경험해보니 건축 대학에서 여행 장학금을 상으로 수여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한국에서 해외여행 자유화가 시작될 무렵이었고. 건축가에게 여행은 정말 중요하다. 건축은 이미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직접 가 보고 경험해야 한다.

6일 서울 세종대로 도시건축전시관에서 열린『포트폴리오와 여행』출간 기념회. [사진 황두진 건축가]

김씨는 서울대 건축과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예일대 건축대학원에서 수학했다. 졸업 후 뉴욕 필립 존슨 사무실에서 실무를 익혔고, 1970년 코네티컷주 주도인 하트퍼드시에 건축사무소를 설립해 활동해왔다. 미국에서 '밴 블록 주택'이라는 저소득층을 위한 공공건축을 통해 주목받았고, 1970년대 후반 미국 뉴잉글랜드 지역의 자연경관과 조화를 이룬 '미들버리 초등학교'를 설계해 세계 유수의 건축 매체에 소개되기도 했다. 이밖에 미국 해군 잠수함 훈련학교, 튀니지 미국 대사관 등을 설계했다. 국내에선 교보생명 연수원, 대전 LG화학 기술연구원 등을 설계했다.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을 설계한 건축가 김태수씨는 "미술관이 문을 연 지 거의 40년이 됐다"며 "다행히 잘 나이 들어가는 것 같아 기쁘다. 더 구석구석 활발하게 이용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1961년 미국으로 건너가 발달한 건축 문화를 보고 받은 충격이 컸다"는 그는 "그러나 남의 것을 흉내 내면 안 된다는 걸 깨닫고 '나만의 것'에 집중하며 차츰 자신감을 얻어 졸업 땐 18명 중 3명 안에 들어 졸업 작품을 전시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웅장한 서양식 건축물을 보며 자라지 않았지만, 초가집 여러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자연과 조화를 이룬 모습, 웅장하면서도 아기자기한 한국의 산세를 보며 살아온 게 모두 내 자산임을 알았다"고 했다.

2016년 자신의 회고전이 열린 이후 처음으로 과천 미술관을 찾은 그는 "산중에 있는 사찰처럼 주변 경관과 잘 어우러지게 하는 게 당시 설계의 핵심이었다"며 "건물이 잘 나이 들고 있는 것 같아 기쁘다"고 말했다.

김태수 장학재단은 국내에서 진행한 해외건축여행 장학제 외에도 서울대 건축과 설계 스튜디오(방문 교수)와 미국 예일대 건축과, 미 하트포드대 건축과 졸업생에게도 여행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다. 김씨는 "그동안 선정된 30여 명 중 15명의 건축가가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며 "건축 일을 계속하지 않는 분도 있다. 하지만 그분들이 젊었을 때 받은 건축 교육과 건축 여행 경험이 삶에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 믿는다. 그게 우리 모두의 역사이며 자산"이라고 말했다.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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