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증금 곧 줄게 방 빼" 집주인, '사기' 아니다? 대법원 판단 왜
“짐 정리하고 관리비 정산해서 점심 전에 나갈게요. 키는 부동산 쪽에 드리면 될까요? 보증금 입금 예정 시간도 알려주세요.”
지난 2020년 9월, A씨는 2년간 살았던 서울의 한 오피스텔에서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보증금은 1억 2000만원. A씨는 이삿날인 금요일에 당연히 이 돈을 전부 돌려받을 수 있을 줄 알았다.
“제가 이체 한도가 5000만원이라 오늘 다 못 드리고, 다음 주 월요일에 나머지 드릴게요. 새로운 임차인이 들어오기로 했으니 부동산에 문 비밀번호 알려주세요.”
집주인 B씨는 이삿날에 5000만원만 보내왔다. 이미 이삿짐을 다 싼 A씨는 부동산에 비밀번호를 알려주고 일단 떠났다. 주말 지나 월요일이 되자 이번엔 “일단 2000만원 먼저 드릴게요”라던 B씨는 “나머지 5000만 원은 언제 보내실 건가요?”엔 답이 없었다.
검찰은 B씨를 사기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 ‘무엇에 대한 사기인가’가 쟁점이 됐다. 형법상 사기는 ‘사람을 속여 재물의 교부를 받거나 재산상의 이익을 취득’하는 것인데, B씨가 얻은 것(=A씨가 처분해 손해본 것)을 무엇으로 볼 것이냐다. 검사는 B씨가 A씨의 ‘오피스텔 점유권’을 처분하게 해 빼앗은 셈이므로 사기라는 논리를 폈는데, B씨 측 변호사는 “A씨가 오피스텔을 돌려준 건 계약 종료에 따른 임차인의 의무였을 뿐이고, B씨가 이로 인해 얻은 재산상 이득이 없다”며 단순 채무불이행일 뿐이라고 맞섰다.
1·2심은 검찰의 손을 들어줬다. 서울중앙지법은 “사기죄의 객체로서의 재산상의 이익에는 채무이행의 연기도 포함된다”며 “A씨로서는 오피스텔 반환을 거절하고 계속 점유할 권리가 있었음에도 B씨에게 속아 점유를 이전했기 때문에 이는 사기죄의 재산상 처분행위에 해당한다”고 봤다. B씨는 이 사건 외에도 수십억원 대 투자 사기도 함께 걸려 도합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B씨는 항소했지만, 서울고등법원의 판단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대법원은 B씨의 여러 혐의 중 오피스텔 건 만큼은 검찰 주장대로 사기죄로 볼 수 없다며 사건을 돌려보냈다. 대법원 1부(주심 노태악 대법관)는 지난달 12일 “A씨가 추후 나머지 보증금을 반환하겠다는 B씨의 말에 속아 나머지 보증금을 받지 않고 오피스텔 점유권을 B씨에게 이전했더라도 사기죄에서 말하는 재산상 이익을 처분한 것으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판결문을 통해 “사기죄는 타인이 점유하는 타인의 재물과 재산상의 이익을 객체로 하는 범죄”이고 “재물을 점유하면서 누리는 사용권이나 수익권은 재물과 별개의 이익이라 보기 어려우므로 재물에 대한 사용권이나 수익권은 사기죄에서 말하는 재산상의 이익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오피스텔은 어쨌든 B씨 소유라 ‘타인의 재물’이 아니고, 오피스텔에 대한 점유권이란 것도 결국 오피스텔과 완전히 별개의 것이 아니라 보면 ‘타인의 재산상 이익을 빼앗았다’는 말이 성립할 수 없단 얘기다.
전문가들은 반드시 보증금을 전액 반환받은 것을 확인하고 이사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전경석 변호사(법률사무소 오율)는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했다면 원칙적으로 이사를 하지 않는 것이 좋다”며 “혹시 이사를 미룰 수 없는 경우라면 임차권등기명령 신청을 해 대항력과 우선변제권을 갖추거나, (새 집으로) 전입신고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전 집에) 최소한의 짐이라도 남긴 뒤 비밀번호를 알려주지 않는 방식으로라도 점유 상태를 유지하는 방법 등을 고려해볼 수 있다”고 말했다.
문현경 기자 moon.h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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