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훈 칼럼] 한·중·일 정상회담 ‘국뽕’ 대신 공감 외교를
일본 왕벚나무 1400여 그루
제주 자생으로 교체한다는데
애꿎은 자연물에 반일 감정
불어넣으며 한·일 관계 복원
바라는 건 우물에서 숭늉찾기
타국과의 문화 공감대 통한
소프트 외교가 의외로 북핵 등
현안을 쉽게 풀어갈 수 있어
아름다운 시를 만들기 위한 표현법엔 비유와 상징 등 여러 수사법이 동원되지만, 단연 압권은 감정이입이 아닐까 싶다. 김소월의 시 ‘초혼’ 중 일부인 “붉은 해는 서산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에서처럼 시인은 님을 잃은 슬픈 감정을 사슴에 이입해 독자를 공감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다. 영국 시인 T. S. 엘리어트는 사슴처럼 화자의 정서를 주관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빗대어 표현하는 대상을 ‘객관적 상관물’이라고 했다. 1919년 발표한 에세이 ‘햄릿과 문제점들’에서 햄릿처럼 예술이 개인감정의 직접적 표출이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하면서 제시한 것으로 이후 문학 창작 용어로 정착했다.
일상생활에서도 사람은 온갖 정서를 타인과 나누려 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타인들은 그런 감정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데 그걸 공감 능력이라 부른다. 이런 관계가 소원해지는 사회는 삭막해질 수밖에 없다. 요즘 공감 능력 제로인 사이코패스들의 흉악범죄가 급증하는 건 우리 사회가 위기 상태임을 말해준다. 유행을 넘어 반려동물 열풍이 불고 있는 건 정보혁명 시대의 역설적 현상으로 느껴질 정도다. 소셜미디어가 소통 강화라는 본래 의도와 반대로 반목과 혐오를 조장해 공감 대상을 사람 대신 동물로 향하도록 하는 건 아닐까. 최근 아기 판다 푸바오에 대한 신드롬은 감정이입이 집단화한 경우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고립감에 빠진 많은 이들에게 국내에서 처음 태어난 푸바오가 희망의 상징이 된 걸 보면 BTS 등 아이돌 신드롬과는 분명히 차이가 있는 것 같다. 태평양 건너 미국인들 사이에 작은 벚나무 ‘스텀피’가 영웅으로 떠오른 것도 같은 맥락이다. 지구온난화에 따른 해수면 상승으로 워싱턴DC 포토맥 강물이 넘쳐나자 그루터기만 남은 채 고사 위기에 빠진 벚나무가 꽃을 피워낸 사진이 전해지면서 팬데믹으로 생명의 위협에 처한 이들에게 희망이 됐다. 생후 4년 차가 되어 중국으로 떠나 한국 팬들과 이별한 푸바오처럼 스텀피도 올봄이 지나면 베어질 운명이다. 강물 수위가 점점 높아지면서 방조제 개축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민초들을 희망으로 감정 이입한 판다와 벚나무가 20세기 초반부터 한반도 주변 열강들의 치열한 외교전에 동원됐음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중국의 판다 외교는 중·일전쟁 와중인 1941년 장제스 총통이 중국을 지원해준 미국에 감사 표시로 한 쌍을 보낸 게 처음이다. 일본은 조선 병합을 획책한 이른바 가스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해준 데 대한 보답으로 1912년 워싱턴DC 포토맥 강변에 왕벚나무를 심어줬는데 바로 그 스텀피의 조상뻘 되는 벚나무들이다. 우리나라도 1968년 여의도 제방 도로에 창경궁 왕벚나무를 옮겨다 심었는데 포토맥 강변을 흉내낸 것이라고 한다. 그동안 한·일 간 끝없는 벚나무 원산지 논쟁이 이어진 것도 ‘김치-기무치’ 싸움 만큼이나 끈질긴 자존심 싸움의 연장선이다. 유전자검사 결과 일본산과 제주 자생 왕벚나무는 부계는 다르지만, 모계는 올벚나무로 같아 구분이 쉽진 않다. 그런데도 올해 벚꽃놀이가 끝나면 여의도 일대 1400여 그루의 일본산 왕벚나무 대신 제주 왕벚나무를 심을 예정이라고 한다. 벚꽃축제가 시작된 2005년부터 20년 동안 여의도를 찾은 수많은 상춘객이 벚꽃에 부여했던 봄의 찬미 대신 반일 감정을 불어넣어야 할 판이다. 일본에 진주만 습격을 당한 미국이 포토맥 벚꽃을 그대로 둔 것과 비교된다.
이런 ‘국뽕(지나친 국수주의)’ 논리라면 일본 벚꽃축제인 ‘하나미 마쓰리(はなみ まつり)’를 벤치마킹해 1963년부터 이순신 장군의 임진왜란 승전을 기념해 열리고 있는 진해 군항제도 폐지해야 마땅하다. 일본은 교토 고류지(廣隆寺)의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의 재료가 6세기 신라에서 유입된 것으로 추정되는 한국산 적송(춘양목)임을 알고도 국보 1호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거꾸로 한국 국보 1호 숭례문에 일본산 재료가 들어갔다면 난리가 났을 것이다. 민족 우월성을 내세우기 위해 자연물까지 묻지마식으로 배척하면서 한·일 관계 복원을 기대하는 건 우물에서 숭늉 찾는 격이다.
다음 달 말 4년 5개월 만에 열리는 한·중·일 정상회담 성공의 계기를 세 나라의 서로 다른 문화를 받아들이는 공감대에서 찾으면 어떨까. 의장국이 한국인 만큼 윤석열 대통령이 공감 외교를 주도하기 바란다. 소프트 외교가 경색된 북핵 문제와 경제 갈등을 의외로 쉽게 풀어갈 수도 있다.
이동훈 논설위원 dh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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