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의 DPP, 속내는 데이터 주권 확보… 중·일은 발빠른 대응
디지털제품여권(DPP) 등 유럽연합(EU)의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강화 움직임은 데이터 규제 형태로 나타난다. EU의 환경규제 이면에는 데이터 주권 확보 목적이 깔려있다. DPP 시행을 위해 데이터 교환 플랫폼이 마련되고 있지만 투명한 정보 공개는 자칫 기업의 기밀 유출로 연결될 수 있다. 이에 일본 등 주요국은 데이터 주권을 사수하기 위해 자체 데이터 플랫폼을 구축하는 등 선제 대응에 나섰다.
DPP 제도는 환경 규제라는 명분의 포장지에 싸여 있지만 이면에는 데이터 주권 확보라는 의도가 있다는 분석이다. 2010년대 후반 데이터 중심의 플랫폼 경제에서 유럽은 주도권을 뺏겼다. 가트너에 따르면 글로벌 플랫폼 경제 내 유럽 기업의 시장 점유율은 4%에 그친다. 미국 기업이 75%, 아시아가 20% 수준이다.
이에 EU는 2019년 데이터 주권을 확보하기 위한 프로젝트로 가이아엑스(Gaia-X) 개념을 발표했다. 미국이 장악한 거대 플랫폼 기업의 클라우드에 데이터를 제공하지 않고, 투명한 데이터 교환 플랫폼을 만들자는 취지다. 데이터 주권은 각자에게 있다는 시각이 반영됐다.
DPP 시행을 위해선 표준화된 데이터 교환 시스템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한 제조사의 탄소발자국(PCF)을 계산할 때 공급망 내 다른 관계사의 정보가 데이터의 약 90%를 차지한다. 더욱이 공급망 내 업체들이 언제든 바뀔 수 있다. 밴더사가 바뀌면 데이터도 수시로 바뀐다. 이에 필요할 때마다 데이터를 주고받을 표준화된 데이터 모델과 교환 방법을 제공하는 플랫폼이 필수적이다.
가이아엑스 체제 하에 가장 빠르게 만들어진 데이터 교환 플랫폼은 독일이 만든 ‘카테나엑스(Catena-X)’이다. 자동차 산업의 디지털 전환 과정에서 실시간으로 제품에 사용하는 부품과 제조과정 정보를 담은 플랫폼이다. EU는 카테나엑스를 시작으로 내년부터는 전 제조 산업으로 이 같은 시스템을 확대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데이터 교환 플랫폼의 신뢰성 문제가 떠올랐다. 정보를 투명하게 제공하다가 제조 기술이 유출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기업이 경쟁 우위를 점할 수 있는 민감한 요소가 디지털 여권에 포함된다면 기업 경쟁력을 잃을 수도 있다.
가령 독일 자동차 기업에 데이터를 제공해야 하는 제3국 배터리 기업의 경우 리사이클 데이터 제공 과정에서 리튬 등 희귀금속 함량 등을 공유해야 한다. 이는 제조기술 노하우를 유출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일본 등 주요국은 EU 규제안 윤곽이 드러나자마자 데이터 주권 확보를 위한 대응을 시작했다. 일본은 최근 카테나엑스와 유사한 자체 공급망 데이터 플랫폼 ‘우라노스’를 구축했다. 단순히 독일이 구축한 카테나엑스에 가입하는 형식이 아니라 서로의 플랫폼을 연동시키는 형식을 취하겠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타국에 끌려다니지 않고 민감한 정보 제공을 막을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렸다. 아울러 플랫폼 운영 비용을 내부적으로 해결하려는 목적도 있던 것으로 해석된다.
각국의 DPP 시스템 구축도 한창이다.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에 따르면 지난해 3월 일본 민간기업, 기관 및 학계가 참여하는 순환경제 파트너십 ‘J-CEP’는 플라스틱 DPP 개발을 위한 연구조직을 결성했다. J-CEP는 네덜란드 정보기술(IT) 회사와 협력해 DPP 구현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고 플라스틱 병뚜껑이 재활용 플라스틱 생산에 사용되는 전 수명 주기를 추적하고 있다.
중국은 PCF 데이터 공유 플랫폼 구축을 통해 탄소 중립과 DPP 제도 시행에 대응하고 있다.
중국의 유통 공룡 알리바바는 2021년 인공지능(AI) 기반 탄소 배출 관리 클라우드 플랫폼 ‘에너지 엑스퍼트’를 출시했다. 자동차 탄소 디지털 기술센터 유한공사는 지난해 2월 자동차 산업 공급망 PCF 데이터 공개 플랫폼을 개발했다. 난징푸촹은 같은 해 10월 배터리 여권(DBP) 시행에 대비해 DBP 제작에 대한 무료 컨설팅, POC 검증 등 실제 서비스 제공을 시작했다.
반면 아직까지 한국엔 이렇다 할 데이터 교환 플랫폼이 없다. 정부 차원의 통일된 정책도 마련돼있지 않다. 이에 한국도 궁극적으로 해외 데이터 교환 플랫폼을 대체할 ‘글로벌 공급망 데이터 플랫폼’을 구축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를 통해 배터리, 그린수소 등 국가 주력산업의 수출 경쟁력을 강화하고, 동시에 향후 예상되는 EU의 무역 규제에 대응해 양자간 협상을 할 수 있는 발판으로 삼을 수 있다.
이를 위해 범정부 차원의 대응책 마련이 필수적이다. 제조 데이터 수집은 ‘스마트팩토리’(사물인터넷을 통해 공정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수집하고 분석해 공장 스스로 제어하는 미래형 공장)를 토대로 이뤄질 수 있다. 그러나 스마트팩토리 주무 부처인 중소벤처기업부가 주도적으로 나서더라도 제조 대기업을 담당하는 산업통상자원부가 움직이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현재 디지털플랫폼정부위원회 산하 디지털트윈 태스크포스(TF)가 DPP 관련 전략을 짜고 부처간 교류를 주도하고 있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이 사안에 정통한 업계 관계자는 9일 “일본처럼 한국도 제조 노하우가 유출되지 않고 제조 데이터 주권을 유지할 수 있도록 정부가 플랫폼 구축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임송수 기자 songst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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