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情談] 모두가 다른 걸 보는 시대의 대화

2024. 4. 10. 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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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라 신한카드 빅데이터 연구소 연구원

공통의 관심사가 없기에 더 상대를 알 수 있다.
각자만 아는 얘기를 들을 수 있기에

신기하다. 지하철 안 사람들은 모두 같은 것을 보고 있는데 다 다른 것을 보고 있다. 모두의 시선이 휴대폰을 향하지만 저마다의 화면을 장악한 것들은 제각각이다. 동물, 웹 소설, 게임, 야구 경기, 쇼핑까지 이용하는 콘텐츠나 플랫폼의 장르도 다양한데 그 플랫폼 안에서 선택의 가능성은 수백만 가지로 확장한다. 내 옆사람이 보는 것을 나는 전혀 알지 못한다.

과연 오늘날 ‘대세’는 존재할까? ‘아니요’가 더 정답처럼 느껴지는 질문이지만 분명 대세는 있다. 영화 ‘파묘’ 관객 수가 1100만명을 넘어섰다. 오컬트 장르로서는 최초다. 그런가 하면 임직원 52명의 스타트 기업에서 만든 가상 아이돌 ‘플레이브’가 대형 소속사의 글로벌 아이돌을 제치고 지상파 음악방송 1위를 차지했다. 사람의 형체보다 더 인기가 많은 건 중국으로 건너간 최연소 삼성물산 사원인 판다, 푸바오다.

오컬트, 판다, 버추얼 아이돌. 전혀 달라 보이는 이들의 공통점은 기존에 대중성을 담보하던 익숙한 장르가 아니라는 것이다. 선택의 가짓수가 무한히 많아질수록 대중은 점점 더 작게 분열하며 그 규모감을 줄여나간다. 대중과 마니아 사이의 우열도, 깊이 차이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대중성은 더 이상 중요한 잣대가 아니다. 평범의 규격과 기준마저 희미해지고 있다. 주류와 비주류를 가르는 견고한 장벽이 허물어지고 허물어진 장벽 위로 흐르는 대세는 기세가 다르다. 점점 그 너비는 줄고 농도는 진해진다.

적당히 좋아하는 사람 만 명의 존재감을 진짜 좋아하는 사람 백 명이 만들어낸다. n차 관람, 무한 재생 등 몰입을 바탕으로 한 팬덤의 활동이 새로운 형태의 대세를 만든다.

바라보는 대상은 모두 다르지만 바라보는 마음은 모두 같다.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 즉 ‘팬심’은 이 시대의 가장 강력한 대세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화면에 떠오르는 것에 대한 크고 작은 열광을 품고 살고, 그 열광과 진심의 축적이 각자의 견고한 세계를 건축한다. 하나의 커다란 대세의 자리가 더 다양한 가능성들로 채워진다. 느슨하고 넓은 대세 대신 여러 개의 강력한 대세에 몰입하는 사람들이, 나와 다른 사람이 더 많아지는 것은 더 많은 삶의 방식의 가능성을 의미한다.

나는 종종 낯선 사람과 어색한 침묵을 깨기 위해 “그거 봤어?”라는 질문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곤 했다. 모두가 보는 주말 예능도, 모두가 아는 떠오르는 스타도 없는 그러니까 모두가 다른 걸 보는 요즘, 질문을 바꾸어 이렇게 묻는다. “넌 요즘 뭘 좋아해?” 그에 돌아오는 대답이 나를 새로운 세계로, 내가 전엔 하지 않던 대화로 이끈다.

공통의 관심사가 없기에 오히려 상대를 더 진정하게 알아갈 수 있다. 다 아는 이야기가 아니라 각자만 아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왜 가상 아이돌을 좋아하는지 신나서 설명하는 이야기를 통해 상대를 더 풍부하게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내 세계도 덩달아 조금씩 확장한다. 상대의 세계를 좋아할 순 없어도 그 세계가 있다는 걸 아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연결된다.

종의 다양성이 생태계의 건강함을 보장한다는 진리를 바탕으로 한다면 모두 다른 걸 좋아하는 이 세계는 강력한 대세가 자리한 세계보다 훨씬 건강한 세계다. 단, 다양성의 세계에서 생존 조건은 교류와 연결이다. 타인의 세계를 진심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을 포기하면 우리는 전보다 훨씬 더 작고 편협한 세계에 갇혀 고립된다.

이제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어려운 실천을 지금에 맞게 조금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 보자. ‘네 이웃이 사랑하는 것에 대해 들어보자’. 결국, 모두가 다른 걸 보는 시대의 가장 강력한 생존 무기는 다른 이의 세계를 이해하려는 공감력과 이해심일지 모른다. 더 많은 것들과 공감하고 연결되며 우리는 진심으로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가 더 넓은 세계의 일부라는 단순한 사실을.

정유라 신한카드 빅데이터 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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