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지금 다시 계몽
우리는 쉽게 냉소적이 된다. 저출산·고령화·저성장 문제에 닥치고도 정치 갈등으로 사회적 자원을 낭비하며 20년 가까이 제대로 된 구조개혁을 이뤄내지 못한 현실에 지치기도 한다. 그러나 비관주의나 패배주의 대신 인류의 진보를 믿으며, 과학과 이성의 힘으로 우리가 직면한 문제를 개선해나갈 수 있다고 역설하는 세계적인 학자가 있다. 하버드대학 심리학과 교수인 스티븐 핑커다. 그는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2011), 『지금 다시 계몽』(2018), 『이성』(2021)이라는 일련의 저작을 통해 계몽주의 이념, 즉 이성에 기반한 과학적 사고와 휴머니즘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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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지편향 극복이 문제 해결의 출발
이성에 기반한 올바른 선택이 중요
선거판의 비합리성 극복 위해서는
공공 담론이 정치로부터 벗어나야
」
계몽주의는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에 걸쳐 유럽에서 발전한 지적·문화적 운동이다. 전통적 권위, 특히 교회 및 절대군주의 권위에 도전하며, 지식과 개인의 자유·권리에 기반한 사회질서의 재편을 주장했다. 계몽주의 가치인 자유·평등·박애는 미국의 독립선언문과 프랑스 혁명에 영향을 미쳤다. 계몽주의 운동은 근대 과학적 방법론의 발전, 근대 민주주의 이념의 형성, 경제 및 사회적 자유의 확대에도 기여했다. 경제학의 고전이며 자본주의 이론의 기초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 『국부론』도 계몽주의 시기인 1776년에 출판되었다. 이 책의 저자인 애덤 스미스 역시 부가 어떻게 생겨나는지에 대해 이성적으로 분석한 대표적인 계몽사상가다.
그런데, 지금 왜 다시 계몽주의가 필요한가? 우선 우리의 인지편향이 심각하기 때문이다. 인지편향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상황에 대해 비논리적인 추론과 판단을 하는 오류를 말한다. 사회문제 해결은 인지편향을 고치는 데서 출발한다. 가령, 뉴스는 정치적 증오, 범죄, 약물남용, 전쟁, 환경오염 등으로 가득하다. 뉴스는 폭탄이 터지지 않은 도시나 총격이 일어나지 않은 학교는 보도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구체적인 사례가 잘 기억날수록 그 사건이 더 자주 발생한다는 인지편향을 갖고 있다. 미국인들은 이슬람 테러를 심각한 위협으로 보지만, 그 위험 수준은 장수말벌이나 꿀벌의 공격보다 낮다. 2주 전 작고한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이자 행동경제학 창시자 대니얼 카너먼의 연구 결과다. 저널리즘의 속성과 인지편향이 맞물려 비관주의로 빠지는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답은 데이터 기반의 이성적 사고, 과학, 휴머니즘에 있다.
둘째, 계몽주의는 인류의 진보에 기여한 제도에 대한 냉소를 막아준다. 인류는 평균수명의 증가, 극단적 빈곤의 감소, 전쟁과 폭력의 감소, 교육수준의 향상 등에서 놀라운 진보를 이룩했다. 이런 진보는 다양한 분야에서 데이터로 측정 가능하다. 특히 한국이 보여준 진보는 기적에 가깝다. 한국인의 기대수명은 1970년 62.3세에서 2022년 82.7세로 증가했고, 1000명당 영아사망률은 같은 기간 48.3명에서 2.3명으로 극적으로 줄었다. 실질 국내총생산(GDP)은 1953년 20조원 수준에서 2023년 1996조원으로 100배가량 늘었다. 25~64세 인구 중 대학 졸업 인구의 비율을 나타내는 고등교육 이수율은 1997년 19.8%에서 2022년 52.8%가 됐다. 그 어떤 나라도 이렇게 단시간에 정치·사회·경제·문화에서 높은 성취를 이루지 못했다.
셋째, 교착 상태에 빠진 구조개혁과 공공담론을 진척시킬 실마리를 계몽주의에서 찾을 수 있다. 가장 시급한 것은 공공담론을 정치와 분리(탈정치화)하는 것이다. 이슈들이 정치화하면 사람들은 이성적이 되기 어렵다. 실험에 따르면, 사람들은 새로운 정책에 대해 자신이 지지하는 당이 제안하면 찬성하고, 반대하는 당이 제안하면 싫어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앨 고어가 만든 ‘불편한 진실’이란 영화다. 민주당 출신 정치인이 이 영화를 만드는 바람에 기후변화에 좌파 낙인이 찍혔다. 이 때문에 일부 환경보호론자들은 이 영화가 환경운동에 득보다 독이 되었다고 평가한다. 정치와 선거의 규칙은 사람들의 비합리성을 최대한 뽑아내게끔 극악하게 설계되어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핑커의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는 인류 역사에서 폭력이 점차 감소했음을 논증한다. 이 책 제목은 에이브러햄 링컨의 1861년 3월 4일, 제1차 취임연설에서 빌려왔다. 남북전쟁 직전 노예제를 둘러싼 분열의 정점으로 치닫는 상황에서 취임사는 다음과 같이 마무리된다.
“비록 열정이 우리 사이를 시험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결속을 끊어놓아서는 안 됩니다. 이 땅 곳곳의 모든 전장과 애국자의 무덤에서부터 모든 살아 있는 마음과 가정에 이르기까지, 기억의 신비한 화음이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들’에 의해 다시금 어루만져질 때, 연합의 합창이 다시 울려 퍼질 것입니다.”
아무도 링컨을 순진했다고 비웃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루어낸 우리 사회의 진보를 믿어야 한다. 이성·과학·휴머니즘으로 우리 사회가 더 올바른 선택을 하는 데 집중할 때다. 낭비할 시간이 더 이상 없다. 다시 계몽을 생각하는 투표일 아침이다.
박선영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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