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걸린 금수저 판사…그를 구원한 건 욕설 뱉던 소년범이었다 [안혜리의 인생]

안혜리 2024. 4. 10. 0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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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1일 서울 삼성동 법무법인 율촌에서 김성우 변호사를 만났다. 그는 스스로 인생의 옐로카드를 받은 후에야 전성기가 찾아왔고, 전반전과는 다른 인생을 살게 됐다고 말한다. 김경록 기자


'천생 판사'는 아니었다. 오히려 법원 식구들로부터 "검사를 했어도, 정치를 했어도 잘했겠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하지만 본인이 꼽은 인생의 가장 행복한 시절은 판사, 그것도 출세 가도에서 빗겨나 눈에서 파란빛 레이저를 쏘는 소년범들과 씨름하던 가정법원 판사 때였다. 그런 사람이 암 발병 때도 지켰던 법복을 스스로 벗었다. 소위 '사법 농단'으로 불렸던 사법 파동이 결정적 계기였다. 당시 공격당할 만큼 힘 있는 자리에 있지 않았고, 그렇기에 핍박받은 건 없었다. 다만 이념에 경도된 일부 정치적 판사들 탓에 사법부 전체가 문제 있는 집단이 돼버렸고, 자랑스럽고 가치 있다고 여겨온 판사라는 직업에 대한 자부심에 깊은 상처를 입어 내린 결론이었다.

「 부친도 "감당 못하겠다"던 금수저
혼자 잘 났다 날뛸 때마다 경고장
암, 소년범, 사법 파동, 계란 프라이
욕심 버리니 거꾸로 채워지더라

지난 2016년 치매를 앓던 신격호 당시 롯데 총괄회장의 성년후견 사건 담당 판사로 국내에선 낯설었던 이 제도를 안착시킨 김성우 법무법인 율촌 변호사(55·사시 39회·연수원 31기) 얘기다. 이후 법조계의 손꼽히는 가사·상속 분야 전문가가 돼, KCC 오너 일가의 1120억원대 이혼소송, 아워홈 경영권 분쟁 등에 이어 현재 상속 분쟁 중인 구광모 LG그룹 회장을 대리하고 있다. 그는 최근 낸 『아직은 가족, 끝까지 가족』에서 '가족 간 격렬한 상속 다툼이 어릴 적 우연히 바꿔 들고 온 오빠 도시락에만 들어있던 계란 프라이 같은 사소한 응어리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며 작은 일이 큰 분쟁의 씨앗이 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그의 사직은 물론, 어쩌면 큰 파장을 불러온 많은 나랏일도 그렇게 시작된 것일지 모른다. 김 변호사의 아버지는 김영삼 전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고(故) 김광일 변호사다. 금수저 엘리트 판사의 반전 인생 이야기를 두 차례에 걸쳐 듣고 재구성했다. 안혜리 논설위원
지난 2016년 김성우 판사(가운데)가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의 성년후견인 감정 전 사전검증을 위해 서울대병원을 찾았다. 뉴스1


인생 전반전 : 오만한 금수저 서울법대생


골칫거리가 된 모범생. 서울법대 입학(88년) 후 사법고시 합격(97년)까지의 삶은 이렇게 묘사할 수 있겠다. 대학 신입생 때 아버지는 현직 국회의원이었고, 이후 대통령 비서실장, 정치특보를 했다. 어릴 때부터 1등을 놓치지 않았던 수재가 집안 배경까지 좋으니 거리낄 게 없었다.

"사시는 100m 달리기인데 넌 왜 마라톤을 하느냐"던 아버지 말씀처럼 긴 시간 고시 폐인처럼 지내면서 적잖은 사고를 쳤다. 한번은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한밤에 운전하다 아파트 단지 안 시계탑을 들이받았다. 깨진 차창 앞 유리에 얼굴이 온통 피범벅이 될 만큼 중상이었는데도 야단맞을 게 무서워 인근 상가 지하로 도망갔다.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이던 아버지는 밤새 아파트 단지를 뒤져 겨우 아들을 찾아냈다. 그러곤 "너를 감당 못 하겠다"며 신림동 고시촌으로 쫓아냈다. 윤석열 대통령, 나경원 전 의원 등이 거쳐 간 서울 서초동의 그 유명한 EE 독서실의 한량 생활이 이렇게 막을 내렸다.

고교 시절인 지난 1987년 교련 사열식에 온 아버지와 함께. 부친은 YS 때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김광일 변호사다. [사진 김성우]

쫓겨나서야 정신을 조금 차렸고, 그렇게 몇 년 뒤 합격했다. 어차피 법무관은 나이 제한에 걸려 할 수 없으니 이등병으로 입대해 법무관실에서 26개월 현역병 생활을 했다. 한참 어린 법무관들의 쓰레기를 치우고, 시키는 복사도 참 열심히 했다. 지금도 양손 복사가 능숙하다.

제대 후 '유급만 면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연수원 생활을 시작했는데 의외로 최상위권 성적을 받아 판사가 됐다. 게다가 첫 임지는 대법관까지 노려볼 수 있는 엘리트 코스인 서울중앙지방법원이었다. 이때부터 성공만 보고 달렸다. 기왕 이 길에 들어섰으니 무조건 이겨야지, 뭘 해도 제일 잘한다는 얘기를 들어야지, 당연히 재판도 제일 잘해야지. 머릿속은 이런 생각들로 채워졌다. 성공 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아내와 두 아들에게도 공감은커녕 내 잣대만 강요했다. 이 기준에 맞아야만 사랑스러웠고, 안 맞으면 고통스러웠다. 학창 시절 공부 못 하는 애들을 전혀 이해 못 했던 것처럼 이때까지도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성과를 못 내는 사람을 보면 열심히 안 해서, 최선을 다하지 않아서 그런 거라고 속으로 무시했다. '계란 프라이'의 아픔이 얼마나 큰 지도 공감하지 못했다. 참 잘 나가던 30대인데, 지금 돌이켜보면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인생의 전환점은 갑자기,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방식으로 찾아왔다.


인생 후반전 : 암이란 옐로카드 받은 엘리트 판사


소위 1급지라는 안양지원 시절엔 구치소나 안양교도소에서 중벌 선고하는 판사로 '악명'을 떨쳤다. 내가 맡은 형사 2단독에 걸리면 "집엔 못 간다"는 말이 피고인과 변호사들 사이에 돌 정도였다. 이렇게 천방지축 날뛰면서 칼을 휘두르던 2010년 암에 걸렸다. 갑상선암, 그것도 1기라 의사인 친형을 비롯해 주변에선 별거 아니라고들 했다. 그런데 절제 수술 전 검사에서 신장암까지 발견됐다. 전이가 아닌 원발성이고 1기였지만 무서웠다. 같은 병을 앓았던 아버지 때문이었다.
지난 2002년 연수원 졸업 후 예비판사 임용식 모습. 연수원 성적이 좋아 첫 임지부터 줄곧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사진 김성우]
아버지는 2002년 암 치료를 받았다. 나은 줄 알았는데 2006년 전이돼 4년째 힘든 투병생활을 이어가던 중이었다. 수술은 잘 끝났지만, 한 달 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나도 아버지처럼 재발과 전이를 거쳐 곧 죽겠구나' 싶은 공포가 극에 달했다. 죽는다 생각하니 법원에서 추구했던 출세·명예, 심지어 돈도 다 하찮았다. 오로지 아직 어린 두 아들과 좀 더 시간을 보낼 수 있기만 바랐다.

주위 조언을 듣고 편한 데로 옮기기로 했다. 그렇게 간 게 서울가정법원, 그중에서도 "제일 편하다"는 소년재판이었다. 가자마자 가정법원 판사들이 "마음으로 재판해야 한다"길래, 속으로 '실력 없는 판사들이 사실·법리 대신 마음 운운한다'고 콧방귀를 뀌었다. 그런 비아냥은 두 달 만에 꺾였다.

보통 하루에 60명쯤 보는데, 소리 지르며 야단치다 보니 오전 재판만 끝나도 번아웃이 된다. 법정에 가기 전엔 늘 '(소년 재판이 내리는) 1~10호 처분 중 소년원 2년 보내는 가장 센 10호 처분을 내려야지'라고 마음먹는데, 막상 아이들의 기막힌 사연과 딱한 환경을 직접 들으면 마음이 약해지다 못해 눈물범벅으로 재판을 마치곤 했다.

생각해보면 암이라는 옐로카드를 받아 마음이 가난해진 탓에 공감 능력이 최고조라 더 그랬던 거 같다. 시설행인 6~10호 처분 중 6호는 아동복지시설에서 6개월을 보내는 비교적 가벼운 벌이다. 일주일에 반나절 재판만으로 업무를 끝내는 판사도 있지만 대다수 판사들은 바쁜 시간을 쪼개 6호 처분 아이들을 챙긴다. 주기적으로 시설에 있는 아이들을 방문하고, 숙제로 내준 애들 편지에 일일이 답장하다 보면 결국 형사 단독 때보다 더한 격무에 시달렸다. 그래도 아침에 눈만 뜨면 한시라도 빨리 법원에 가고 싶었다. 나아지는 애들을 보는 게 너무 좋았다. '레드카드가 아닌 옐로카드를 받은 건 이런 일을 하라는 하늘의 뜻인가보다' 싶었다.


인생의 인저리 타임 : 지는 법 배워 행복한 변호사


서울법대생, 엘리트 판사…. 잘 나가던 인생 전반전엔 성공이 전부였다. 소년재판을 통해 법조인, 심지어 매출로 평가받는 변호사에게조차 제일 필요한 덕목이 '최고'가 아니라 '진심'이라는 걸 배웠다.
지난 2013년 서울가정법원 소년법정 판사 시절 소년범 아이들로부터 받은 편지들. [사진 김성우]
소년재판 시절 6호 처분으로 종교시설에 입소한 애들을 방문하면, 수녀님들이 늘 처분 내린 판사별로 애들을 모아놓았다. 1단독 판사는 왔는데, 2단독은 없으면 재판 때 그렇게 대들고 욕하던 애들조차 "우리 판사님 어디 갔느냐"고 애타게 찾는다. 어른한테 야단도 제대로 못 맞아봐서 그 정도 관심도 고픈 아이들이라 나오는 반응이었다. 이 애들은 처음엔 판사가 시키니 어쩔 수 없이 아주 무성의하게 편지를 써오는데, 일일이 답장을 보내면 아이들도 점차 마음을 열고 속내를 털어놓았다. 진심이 담긴 그 편지들을 아직도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다.

그 시절 한 달 동안 소년분류심사원에 보내는 임시보호처분도 많이 내렸다. 잠깐 멈춰 서서, 내가 지금 어디 서 있는지, 어디로 가는지, 뭘 하는지 보라는 취지였다. 당사자는 물론 따라온 부모 역시 처음엔 극렬하게 항의하는데 한 달 후 법정에서 다시 만나면 고마워하지 않은 경우를 보지 못했다. 이처럼 한 명이라도 나로 인해 다른 길을 가게 된다면 판사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살아있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성공만 좇을 땐 안 보이던 것들이다. 돌이켜보니 내가 아이들을 인도한 게 아니라 아이들이 나를 인도했다. 그 시절을 내 인생 최고의 전성기로 꼽는 이유다.

솔직히 아직도 욕심을 완전히 버리진 못했다. 명예도 얻고 싶고, 기왕 돈에 팔려왔으니 돈도 많이 벌고 싶다. 다만 달라진 건 스스로 내려놓으려고 노력한다는 것, 그리고 놓으면 채워지는 게 있다는 걸 안다는 점이다. 전엔 남의 눈을 많이 의식했다. 이젠 내가 정말 진심으로 했다면 설령 결과가 기대보다 좀 나빠도 괜찮다.

지난 2008년 법원에 온 두 아들 함께. 소년재판을 하면서 애들을 윽박지르던 권위적인 아빠에서 경청하고 응원하는 아빠로 바뀌었다. [사진 김성우]

이렇게 일을 대하는 태도는 물론 가족을 대하는 태도도 소년재판 경험을 통해 많이 달라졌다. 부모가 어떻게 하면 애들이 잘못되는지 잘 안다. 내가 예전에 했듯이 무조건 윽박지르고 안 들어주면 애들은 엇나간다. 애들이 더 크기 전에 그걸 알게 돼서 다행이었다. 이젠 20대가 된 두 아이한테 늘 "네가 선택한 길은 아빠가 무조건 지지한다"고 말해준다.

옐로카드 받고 나서 전성기를 지나 지금은 내 인생의 인저리 타임(추가시간)이다. 골을 넣을 수도, 거꾸로 골을 먹을 수도 있지만 진심을 다하고 있으니 그거로 됐다.

안혜리 논설위원

안혜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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