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여기 무서워서 못 있겠어요..." 통화 이틀 후 세상 떠난 아들

김선재 2024. 4. 9.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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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현충원에 묻힌 이야기] 군의문사 희생자 박정훈 이교

[김선재 기자]

 대전현충원 현충탑 내부에는 호국영령을 모신 위패실이 있다.
ⓒ 임재근
대전현충원에는 업무 중에 사망한 순직 군인들이 안장되어 있습니다. 순직 군인 중에는 특별한 사연을 가진 이들이 있는데요. 수십 년 동안 순직으로 인정받지 못하다가, 뒤늦게 순직으로 인정받아 안장된 사람들입니다. 바로 '군의문사 희생자'입니다.

'군의문사'는 '군인으로서 복무하는 중 사망한 사람의 사망 원인이 명확하지 아니하다고 의심할 만한 상당한 사유가 있는 사고 또는 사건'을 말합니다. 타살인데 사고사나 자살로 은폐 또는 조작된 경우, 부대 관리의 잘못으로 인한 안전사고인데 사고사나 자살로 은폐 조작된 경우, 끝으로 구타, 강요, 추행, 협박, 가혹행위, 집단따돌림 등 부대 내의 문제가 자살의 주요 원인인데 이런 원인이 은폐된 채 사망자 개인의 문제로 왜곡된 경우가 있습니다.

2005년 6월 29일 국회는 '군의문사진상규명 등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했습니다. 2006년 1월 1일부터 '군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가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군의문사 사건 600건이 접수됐고, 그 중 약 350건이 조사종결됐습니다. 진상이 규명된 사건은 120건입니다.

"아빠 여기 무서워요" 
  
 경비교도이교 박정훈의 위패 (현충탑 03-1-347위)
ⓒ 임재근
  
 대전현충원 현충탑 위패실 내부. 우측 장병1구역에 박정훈 이교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 임재근
 
대전현충원 현충탑 03-1-347위에는 박정훈 이교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습니다. 1996년 당시 박정훈 이교는 강원도 춘천교도소에서 경비교도대로 복무하고 있었는데요. 경비교도대는 1981년부터 2012년까지 시행되었던 전환복무 제도입니다. 육군훈련소에 현역으로 입대한 훈련병등 중에 일부가 차출되어 교정시설에서 근무하는 형태인데요. 주로 하는 일은 정문과 감시대 업무였습니다. 계급은 수교(병장), 상교(상병), 일교(일병), 이교(이병)로 나뉘었습니다.

1976년에 태어난 박정훈 이교는 아버지 나이 서른 아홉에 찾아온 늦둥이였습니다. 말썽 한번 부린 적 없이 자라난 착한 아들이었습니다. 손재주가 유달리 좋아서 장난감 자동차 조립을 좋아했습니다. 과학자가 꿈이었던 박 이교는 건국대 기계공학과에 특별 전형으로 입학할 만큼 공부도 곧잘 했는데요. 대학 2학년 1학기를 마친 후 자원해서 군대에 입대했습니다. 군대를 빨리 다녀와서 시간 낭비 없이 취업을 준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부모님은 경동시장에서 도라지와 더덕 도매상을 했습니다. 내세울 정도는 아니었지만, 두 아들을 키우는 데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가정의 평화는 한순간에 깨어졌습니다. 1996년 10월 22일 오후 5시 10분 가게로 걸려 온 전화 한 통 때문이었습니다.

"정훈이 아버님이십니까?"
"예, 그렇습니다만. 대체 무슨 일로 그러시나요?"
"정훈이가 갑자기 쓰러졌습니다. 빈혈로 쓰러져 지금 춘천의료원에 있습니다. 빨리 좀 오셔야겠습니다."

부모님은 부랴부랴 택시를 잡아타고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저녁 7시 춘천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요. 별일 아니기를 바라며 내린 부모님은 응급실로 안내되지 못했습니다. 의료원 입구에 침대가 놓여있었고, 그 위에는 애지중지 키운 사랑하는 아들이 옷을 다 벗고 누워있었습니다. 이미 사망한 이후였습니다.

"가슴과 배, 허벅지에 시퍼런 멍 자국이 뚜렷했습니다. 뭐 터지거나 찢어진 상처는 없었습니다. 배 옆엔 주사 바늘이 꽂아진 채로 있고, 교도소장은 보이지도 않더만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부모님은 한참 숨을 고르고서야 어찌 된 일인지 물어볼 수 있었습니다. 오후 2시 10분 정도에 박정훈 이교가 교도소 직원 아파트 옥상에서 스스로 뛰어내렸다고 소대장은 설명했습니다. 얼굴 피부병으로 인한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성격, 만성적 우울증' 때문에 투신했다는 내용이 군이 설명한 자살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은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아토피가 시작되기는 했지만, 꾸준하게 치료를 받고 거의 다 완치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화천훈련소에 면회하러 갔을 때는 사회에 있을 때보다 오히려 얼굴이 좋았습니다. "군대에 와 보니 부모님 은혜도 알겠다"며 열심히 생활하겠다고 다짐하던 아들이었습니다. 그런 아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사실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이틀 전 아들에게서 걸려 온 전화가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아들은 누구에게 쫓기듯 목소리를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아빠, 나 춘천교도소로 발령받았어요. 여기 무서워서 도저히 못 있겠어요. 다른 데로 좀 갈 수 있게 해줘요. 그리고 이거 전화한 것도 알면 부대에서 맞아 죽어요."

박정훈 이교의 머리나 몸에는 골절 같은 상처는 없었습니다. 군대 관계자들은 입을 모아 구타나 가혹행위는 전혀 없었다고 되풀이했습니다. 이튿날 사건 현장을 찾았을 때 아들이 투신했다는 바닥에는 핏자국 하나 없었습니다. 박 이교의 동료 군인과 이야기 하고 싶었지만 간부에 의해서 철저하게 차단당했습니다. 군에서 시행한 부검에서는 폐가 조금 안 좋은 점 외에 다른 특이점은 없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교도소 측은 장례비용까지 지원하며 장례를 서둘라고 권했습니다. 경황이 없는 와중에 조목조목 더 따져보지도 못하고 부모님은 아들을 화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한 줌 재가 된 박 이교의 유해는 의암댐 다리 밑 강물에 뿌려졌습니다.

그날 이후 가정은 산산조각 났습니다. 아버지 가슴은 찢어졌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지켜주지도 못했고, 억울한 죽음을 밝히지도 못했다는 죄책감에 짓눌렸습니다. 장사도 내팽개치고 술에 의존했습니다. 술 한 잔 못하던 어머니 역시 마찬가지 였습니다. 술에 취해 밤낮없이 유해를 뿌린 곳을 찾았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잊을 수가 없더라고요.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하죠. 솔직히 살맛이 나겠습니까. 너무 속이 터질 것처럼 아프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하는데, 그거 안 겪어 본 사람은 몰라요. 맨 정신으로 도저히 못 살겠어서 술만 마셨지요."

어머니는 한강에 뛰어들기까지 했습니다. 세 번이나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습니다. 그 사이 가게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습니다. 가게와 집을 처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99년 부모는 이혼까지 하였고 아버지는 기초생활보호대상자가 됩니다. 단란했던 가정이 그야말로 풍비박산 나버렸습니다.

군의 진상규명 방해와 은폐 행위

술에 절어 지내던 중 눈이 번쩍 뜨이는 뉴스가 있었습니다. 2003년 정도부터 '군의문사특별법'을 제정한다는 뉴스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자신과 같은 처지에 놓인 유가족을 찾아갔습니다. 아버지는 칠순이 다 된 나이에 유가족협의회 회원이 되었고 농성에 꼬박 참석했습니다.

드디어 2006년 6월 22일 군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가 박정훈 사건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결과가 나오기까지는 6개월이 걸렸습니다. 모든 의혹이 해명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결과는 충격이었습니다.

박정훈 이교가 처음 춘천교도소로 전입해 온 날부터 선임들은 신병에게 가차 없는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외박 나갔다 만취로 돌아온 선임은 처음 보는 박 이교를 30분 넘게 폭행했습니다. 가슴과 복부에 주먹질이 이어졌습니다. 날마다 술판을 벌인 선임들은 '원산폭격'과 '관물대 위에 발 올리고 깍지 낀 채 엎드려뻗쳐'를 시켰습니다. 박 이교가 쓰러질 때마다 짓밟았습니다.

100명에 달하는 선임 관등성명을 하루 만에 외우도록 강요했고, 욕설과 함께 폭행이 이어졌습니다. 끼니마다 3인분 식사를 강제로 먹도록 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선임병에 의한 성추행까지 드러났습니다. 거절 뒤에는 역시나 끝날 줄 모르는 폭력이 따라왔습니다.

더욱 경악스러운 점은 군이 자행한 진상규명 방해와 은폐 행위였습니다. 선임 대원들은 후임들을 입단속 했습니다. "구타나 가혹행위에 대한 진술을 하지 말라"고 협박했습니다. 교도소 조사관 역시 성의가 없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가슴부위 멍 자국에 대해 "1번 축구하다 다쳤다, 2번 감시대에서 굴렀다, 3번 뛰다가 넘어졌다, 이 중에 몇 번이야?"라고 대놓고 물었습니다. 간부들은 '가족 같은 분위기'였다며 항변했습니다. 어디에도 진실은 없었습니다.

모든 진실이 만천하에 드러났지만 박 이교가 대전 현충원으로 오기까지도 험난했습니다. 법무부는 2007년 2월 박 이교에 대해 '순직' 결정을 내립니다. 박 이교의 유가족은 국가보훈처에 유족 등록 신청을 했는데요. 11월 믿기 힘든 통보를 받습니다. 국가보훈처는 박 이교의 가족을 유족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자해 행위로 인한 사망과 부상'은 국가유공자가 될 수 없다는 해석이었습니다.

"법무부도 순직을 인정했는데, 보훈처만 버티며 안 된다고 합디다. 한마디로 자살이니까 해줄 수 없다는 거예요. 보훈처가 억울한 죽음을 살피기는커녕 부모 가슴에 또 한 번 못을 박고 있는 게 말이나 됩니까? 20년 동안 곱게 키워 보낸 건데, 튼튼하고 그런 애가 구타와 가혹 행위에 못 견뎌 목숨을 끊을 정도면 국가에서 명예 회복은 시켜 줘야 할 거 아니예요."

결국 국무총리행정심판위원회 결정이 내려진 이후인 2008년 11월 21일이야 국가보훈처가 국가유공자 유족 등록 신청을 받아들였습니다. 행정심판위원회는 "고인의 사망은 선임 대원들의 지속적인 구타와 욕설, 암기 및 다량의 식사 강요 등에 기인한 극도의 스트레스로 우울증이 급격히 악화돼 정상적인 의사 능력이나 자유 의지가 결여된 상태에서 발생한 것이며 '국가유공자법'에 규정된 '자해 행위'에 해당하지 아니하고, '소정의 군인으로서 직무 수행 중 사망한 경우에 해당'한다"고 명시했습니다.

2008년 6월 19일 의문사 처리되었던 14분을 모시는 '순직 군경 의문사 희생자 합동 안장식'이 대전현충원에서 엄수되었습니다. 선임 대원의 구타와 욕설 가혹행위 등으로 우울증이 악화되어 자살에 이른 8명, 군 복무 중 지병으로 사망한 3명, 공무 관련 사고사로 뒤늦게 인정된 2명, 국민 방위군 사건 1명이었습니다. 유해가 있는 7명은 매장되었고, 박정훈 이교와 같이 유해가 없는 7명은 위패 봉안되었습니다. 순직 결정이 나기 전, 박 이교의 아버지는 언론 인터뷰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군대에 간 순간 부모 품 안의 자식이 아니고, 국가의 자식이 되는 거 아닙니까. 군대에서 죽게 해 놓고 자살이라고만 팽개치면 어느 부모가 자식을 군대에 보내겠어요. 재산 다 날려 먹고 셋방살이 하지만, 그건 일도 아니에요. 죽기 전에 정훈이 억울함을 풀어주는 게 내 소원입니다. 더 이상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습니다."

덧붙이는 글 | *참고 군의문사 유족들은 말한다 <돌아오지 않는 내 아들> (김진아, 2008, 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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