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늬만 자본…재계 ‘숨은 부채’ 이렇게 많았나
미국 금리 인하 전망의 불확실성이 확대되면서 재계에서는 ‘숨은 부채’를 둘러싼 우려가 확산하고 있다. 숨은 부채는 사모펀드(PEF)와 주요 금융사에 상장을 조건으로 지분을 파는 프리 IPO나 상환전환우선주(RCPS)·전환우선주(CPS) 등을 뜻한다. 이는 회계상 부채가 아니라 자본으로 분류돼 부채비율 악화를 피할 수 있다는 점에서 최근 수년간 자금 조달 수단으로 각광받았다. 하지만 프리 IPO, RCPS, CPS 등은 형식적으로 자본으로 분류될 뿐 잠재적 상환 부담과 일정 수준의 부채 성격이 내재돼 있다. 이 때문에 ‘무늬만 자본’일 뿐 실질적인 차입 부담은 장부상 부채보다 높다는 게 전문가 진단이다. 향후 경기 방향을 일률적으로 진단하기 힘든 모호성이 짙어지자 금융당국과 신용평가업계에서는 주요 기업을 중심으로 숨은 부채를 예의 주시하는 분위기다.
RCPS 등 자금 조달 수단 각광
재계와 산업계에서 숨은 부채를 둘러싼 우려의 시선이 확산하고 있다.
통상 숨은 부채로 분류되는 유형은 프리 IPO, RCPS, CPS 등이 속한다. 여러 이유로 상장이 여의치 않거나, 부채비율이 높아 회사채 조달에 난항을 겪는 기업이 이런 자금 조달 수단을 택한다. 프리 IPO, RCPS, CPS 등의 장점은 조건에 따라 회계상 자본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재무지표 개선과 자금 조달까지 도모할 수 있어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묘수로 여겨진다. 다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부채에 가깝다는 점에서 기업의 실질적인 차입 부담을 늘리는 양면성이 존재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주로 비상장기업 자금 조달 수단으로 각광받는 RCPS가 대표적이다. RCPS는 채권처럼 만기 때 투자금 상환을 요구할 수 있는 ‘상환권’과 우선주를 보통주로 전환할 수 있는 ‘전환권’을 동시에 갖는 종류주식(보통주와 다른 주식)이다.
RCPS를 자본으로 인식하는 근거는 전환권이다. 부채 고유의 속성은 만기와 상환 의무다. 만기가 존재하고 갚아야 할 의무가 있다면 이를 부채로 봐야 한다는 게 회계 대원칙이다. RCPS 전환권은 이런 속성을 교묘하게 비껴간다. RCPS 투자자가 기업에 빌려준 돈을 상환받지 않고 주식(보통주)으로 바꿀 수 있는 권리(전환권)를 택할 수 있다면, 이 기업은 상환 의무가 없으므로 RCPS를 자본으로 볼 수 있단 논리다.
회계기준에 따라 RCPS를 바라보는 관점도 다르다. 비상장사가 주로 택하는 일반기업회계기준(K-GAPP)에서는 RCPS를 자본으로 인정한다. K-GAPP에서는 실질보단 형식에 우선순위를 두고 자본·부채 여부를 판단하기 때문이다.
반면, 상장사가 의무적으로 도입하는 한국채택국제회계기준(K-IFRS)은 다소 복잡하다. RCPS의 실질을 따져 부채인지 자본인지 구분한다.
우선, K-IFRS 아래 RCPS가 자본으로 인정받으려면 크게 상환권 행사 주체, 리픽싱(Refixing·전환가액 조정) 조항 여부, 만기 영구성 등의 요건을 따진다. 쉽게 말해, 상환권이 RCPS 투자자가 아니라 발행사(기업)에 있으면서 투자금이 발행사에 오랜 기간 묶여 있을수록 자본으로 인정받기 쉽다.
하지만 형식적으로 이런 요건을 충족해 자본으로 분류됐더라도 실질적으로는 부채에 가까운 성격이 내재된 경우가 태반이다. 통상 RCPS 발행 땐 상장 요건 이행 등 투자자 요구 사항을 충족 못할 경우, 이자율을 대폭 상승시키는 스텝업(Step-up) 조항을 첨부한다. 그렇지 않아도 배당률이 높은데 스텝업이 붙어 있으므로 경우에 따라 금융 비용이 더 늘어날 수 있다. 리픽싱 조항이 없는 경우도 찾기 힘들다. ‘자본 요건 충족’이라는 포장지로 그럴듯하게 감싸더라도 결국 상환 과정에서 부채로 돌변할 수 있는 리스크가 내재돼 있는 셈이다.
프리 IPO나 CPS도 다르지 않다.
프리 IPO에 나설 때 재무적투자자(FI)들은 특정 시점까지 일정 수익률(IRR·내부수익률) 기준을 충족하는 상장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에 대비해 동반매도청구권(드래그얼롱·Drag-along) 등 안전장치를 둔다. 동반매도청구권은 상장 실패 시 대주주 보유 지분을 함께 매각하는 것. FI 소수 지분만으로는 프리미엄을 받고 제값에 팔기 어려워 경영권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대주주 지분을 묶어 매도할 수 있게 안전장치를 둔 것이다. 하지만 경영권을 지켜야 하는 대주주 입장에서는 FI의 동반매도청구권 행사가 결코 달갑지 않다. 종국에는 사전에 약속한 수익률에 맞춰 FI 보유 지분을 되살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로, 통상 FI 측 동반매도청구권에 대한 방어 수단으로 기업은 FI 지분을 되살 수 있는 콜옵션을 갖는다. 이런 점에서 프리 IPO 역시 경우에 따라 거센 상환 압박에 직면할 수 있다.
CPS도 자본과 부채, 양면성을 모두 갖고 있다. 상환권이 있는 RCPS와 달리, CPS는 상환 의무가 없는 우선주에 가깝다. 원리금 상환 의무가 없으며 만기가 길다. 만기 도래 땐 보통주로 전환된다는 점에서 영구채와 비슷하다. 다만, CPS 역시 부채 속성에 주목해야 한다는 우려 섞인 시선이 팽배하다. CPS 투자자에게 일정 수준 배당을 약속한 것 자체가 채무 의무로 볼 수 있다는 논리다. 특히 주가 변동에 따른 리픽싱 조항이 있을 경우 CPS를 보통주로 전환하기 전까지 정확한 자본 규모를 알 수 없으므로, CPS 조달 금액 전체를 자본으로 볼 수 없단 주장도 CPS 부채 논리에 힘을 싣는다.
비용 청구서 줄줄이 도착
금융 기법 고도화로 최근 수년간 재계에서는 RCPS 등을 중심으로 부채 회피 전략을 적극 활용해왔다. 기존 주력 사업 성장성이 한계에 도달하면서 기술 혁신 산업을 중심으로 포트폴리오 다각화가 화두로 떠올랐고 자회사 설립, 대규모 설비 투자 등의 이유로 자금 조달 수요가 크게 늘었다. 문제는 부채비율을 높이지 않으면서도 자본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RCPS 등 숨은 부채가 적극 활용되면서 기업의 실질적인 부채 상환 능력을 왜곡하는 착시 효과가 빚어진다는 데 있다. 고금리 장기화 가능성과 맞물려 ‘에브리싱 랠리’ 이후 자산 시장 ‘피크아웃’ 우려가 커진 데다 전기차 등 기술 기반 산업이 불연속적 성장 패턴을 보이자 숨은 부채 우려가 커지고 있다.
재계에서 부채 회피 전략을 가장 적극적으로 펴온 곳은 SK그룹이다.
SK그룹은 최근 수년간 주요 계열사가 PEF에서 조 단위 자금을 조달해 신사업 투자에 썼다. SK E&S(3조1000억원·KKR), SK온(1조3000억원·한투PE 등), SK엔무브(옛 SK루브리컨츠·1조1000억원·IMM PE), SK에코플랜트(1조원·이음PE 등) 등이 대표적이다.
SK온은 2026년까지 IPO를 해야 한다. 한투PE 측에는 IRR 7.5% 수준을 보장했다. 이 수익률을 충족 못할 경우 투자자들은 동반매도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다. 대주주 SK이노베이션은 동반매도청구권 행사에 대한 방어 수단으로 FI 지분을 되살 수 있는 콜옵션을 갖는다. 시장에서는 최소 30조원 이상 기업가치를 인정받아야 프리 IPO 과정에서 약속한 수익률 조건을 충족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전기차 ‘캐즘(수요 단절 구간)’ 전개 시나리오에 따라 재무적 부담이 가중될 위험이 내포돼 있다는 게 시장 인식이다. PE업계 관계자는 “전기차 성장률이 둔화하는 단계를 벗어나 수요 절벽에 부딪힐 경우가 최악의 시나리오”라며 “기술 혁신 산업의 성장 궤적은 불확실성이 높다는 점을 투자자들도 우려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SK E&S가 사모펀드 콜버그크래비스로버츠(KKR)를 상대로 발행한 RCPS 역시 속을 들여다보면 부채 성격이 짙다는 게 시장의 시각이다. RCPS 발행 규모만 2021년 2조4000억원에 이어 모두 3조1350억원에 달한다. SK E&S는 비상장사임에도 K-IFRS를 택하고 있고 RCPS 자본 요건을 갖췄다. 상환권이 투자자가 아니라 발행사인 SK E&S에 있으며 KKR은 전환권만 갖는다. 다만, 실질을 따져보면 부채 성격이 짙다.
우선 동일한 규모 조달 시 회사채 대비 조달 비용이 비싸다. RCPS 우선배당률만 약 4%에 IRR 기준 7.5%(2023년 발행분은 9.5%)를 충족해야 한다. 투자자가 전환권 청구를 할 시점의 보통주 가치가 사전에 정한 기준 가치를 밑돌 경우 배당률이 가산(연 5~5.5%)되는 ‘스텝업’ 조항도 발동된다. 익명을 원한 애널리스트는 “상환권이 발행사에 있다지만 시간이 갈수록 금융 비용이 올라가는 구조여서 실질적으로는 일정 기간 경과 뒤 상환 압박이 커질 수밖에 없어 부채 성격이 강하다”고 평가했다.
SK에코플랜트 RCPS를 두고도 ‘무늬만 자본’을 깔고 앉았다는 수군거림이 적지 않다. 배당률이 높은 데다 일정 기간 상장 못하면 배당률을 대폭 올리는 스텝업 조항이 포함돼 있다. SK E&S처럼 조달 비용 자체가 비싼 데다 시간이 갈수록 실질적인 상환 압력이 가중된다는 점에서 부채 속성이 두드러진다는 우려가 팽배하다.
한국기업평가 관계자는 “RCPS는 회계상 자본으로 분류되더라도 투자자 수익률과 보통주 미전환 시 우선주 스텝업 배당률 등을 고려할 때 부채 성격이 존재해 이를 온전히 자본으로 평가할 수 없다”며 “부채 회피 전략을 적극적으로 펴온 일부 기업에 대해 실질적인 상환 능력을 면밀히 모니터링 중”이라고 말했다.
CJ·신세계도 ‘발 동동’
이외 주요 그룹에서도 숨은 부채를 깔고 앉은 곳이 적지 않다.
SK그룹 못지않게 입길에 오르는 곳은 카카오다. 카카오그룹은 PEF가 선호하는 RCPS 등 메자닌보단 보통주로 자본 투자를 다수 받았다. 수년 전 저금리 국면에서 카카오그룹 계열사 인기가 하늘을 찌를 때라 가능했다. 우선주가 아닌 보통주를 통한 자본 유치이므로 배당 등 직접 현금 유출이 발생하진 않는다. 하지만 일정 요건을 충족 못할 경우 투자자가 보유 지분을 매각할 수 있는 ‘풋옵션’이 달려 있거나, 주요 의사 결정 권한을 FI 측과 분담하는 식으로 구조가 짜인 경우가 많다. 결국 FI가 빌려준 돈을 회수하는 과정에서 빚을 진 기업 입장에서는 유무형의 비용 지출이 불가피하다.
카카오그룹 안팎으로 검찰 수사 등 대형 악재가 겹치면서 카카오엔터테인먼트·카카오모빌리티 등 카카오 비상장 계열사에 투자한 FI의 엑시트(투자금 회수) 계획에도 빨간불이 켜졌다. 카카오엔터테인먼트는 사우디아라비아국부펀드(PIF)·싱가포르투자청(GIC) 등에 투자받을 때 IPO 기한을 명시하지 않았으나, 경영 실패로 IPO 무산 시 투자자가 지분을 팔 수 있는 ‘페널티 풋옵션(매도청구권)’ 조항을 넣은 것으로 알려진다.
카카오모빌리티는 2017년 TPG컨소시엄, 2021년 칼라일을 비롯해 PEF로부터 끌어들인 누적 자금이 1조원에 달한다. FI 측의 “투자금을 돌려달라”는 요청에 카카오는 2022년 TPG 등 FI 지분과 카카오 지분 일부를 MBK파트너스에 넘기는 방안을 추진했지만 노조 등 내부 구성원 반발로 무산됐다.
CJ그룹은 CJ CGV 해외 자회사 CGI홀딩스가 골칫거리다. CGI홀딩스는 CJ CGV 중국·베트남·인도네시아 통합 법인이다. MBK파트너스와 미래에셋증권 PE본부 등 FI는 2019년 총 3336억원 규모 CPS를 인수하며 CGI홀딩스 지분 약 28.6%를 확보했다. 오는 6월 양자 간 계약 만료가 도래한다. FI 측은 당초 홍콩 증시 IPO를 통한 자금 회수를 목표로 했으나 코로나 팬데믹 이후 업황 악화로 상장이 무산됐다. CGI홀딩스는 FI 지분을 되살 수 있는 콜옵션(매수할 수 있는 권리)을 갖고 있다. 이 콜옵션은 형식적으로는 발행사가 갖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투자자 보유 지분 매각을 위한 풋옵션(매도할 수 있는 권리) 성격이 짙다. FI 측은 소수 지분 투자에 대한 안전장치로 CJ CGV 보유 지분을 끌어와 함께 팔 수 있는 동반매도청구권도 갖고 있다. 소비재 업종 인기가 곤두박질친 데다 모기업 CJ CGV 재무 상태가 악화 일로를 걷는 터라 FI 보유 지분은 CJ그룹 입장에선 잠재적 부채로 전락했단 평가다. 이 탓에 시장 일각에서는 CJ CGV가 최근 신종자본증권(영구채) 발행으로 조달한 자금 가운데 일부를 FI에 빌린 돈을 갚는 데 쓸 것으로 보고 있다.
신세계그룹 이커머스 계열사 SSG닷컴도 FI로부터 자금 회수 압박을 받고 있다. SSG닷컴은 지난 2018년 FI에 총 1조원 규모 투자를 유치하며 2024년 상장을 약속했다. 하지만 국내 이커머스 시장에서 쿠팡이 사실상 지배적 사업자로 등극하면서 IPO는 속절없이 미뤄졌다.
지난 2021년 기준 SSG닷컴은 주주 간 계약 요건을 충족해 FI들이 주식을 되팔 수 있는 풋옵션 부담은 덜었다. 하지만 3조원을 들여 인수한 지마켓(옛 이베이코리아)과 시너지가 불투명한 데다 SSG닷컴만의 차별화 전략도 기대하기 힘들다. SSG닷컴 자체 동력만으로 FI 자금 회수에 대응하기 힘든 구도지만, 모기업 이마트 역시 수년 전 정용진 회장이 주도한 대규모 인수합병(M&A) 후유증에 허덕인다. PE업계 관계자는 “신세계그룹은 지마켓과 SSG닷컴 간 합병을 통해 중복 투자를 줄이고 조직 효율화를 노렸지만 합병 작업은 지분 희석을 우려한 FI 측 반대로 시작도 못한 것으로 안다”며 “FI가 주요 의사 결정에 대한 거부권을 갖고 있어 신세계그룹 입장에선 달리 손쓸 방도가 없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LG그룹에서는 LG CNS를 향한 FI의 자금 회수 압박이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LG CNS는 LG그룹 계열 정보기술(IT) 서비스 업체로, 지주사인 LG가 지분 약 50%를 갖고 있다. 구광모 LG그룹 회장도 1%가량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2대 주주는 맥쿼리PE로, 특수목적회사(SPC)를 통해 35% 지분을 확보했다. 당시 공정거래법 개정으로 총수 일가가 20% 이상 지분을 보유한 기업이 자회사 지분 50% 이상을 갖고 있으면 사익 편취 규제 대상에 포함돼 LG는 LG CNS 지분을 팔아야 했다.
FI 측에 약속한 최저 수익률 기준을 지키기 위해 LG CNS는 대주주 LG와 주요 주주 맥쿼리PE를 대상으로 고배당 정책을 펴왔다. 맥쿼리PE는 투자 수익률이 일정 기준에 미달할 경우 부족분에 대한 회수 방안을 제시해달라는 약정도 LG와 맺었다. 맥쿼리PE와 LG 양측은 상호 콜옵션(LG)과 풋옵션(맥쿼리PE) 권리도 주주 간 계약에 담았다. 이 역시 수익률 보장을 위한 안전장치로 CGI홀딩스와 비슷한 ‘풋옵션 성격의 콜옵션’이다. LG 입장에선 LG CNS IPO를 통한 FI 자금 반환이 최선이지만 상장 추진은 안갯속이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54호 (2024.04.10~2024.04.16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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