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치열해질 미‧중 기술 패권 전쟁의 미래, 한국의 살길은?
반도체, 인공지능(AI) 등 첨단기술 산업 주도권을 놓고 미‧중 간 힘겨루기가 갈수록 치열해지는 미래에 한국은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까? 지난 5일 YWCA 대강당에서 열린 국제금융센터 세미나 ‘미·중 첨단기술 패권전쟁의 미래와 파급 영향’에서 뼈를 때리는 직언이 쏟아져 눈길을 끌었다.
이날 첫 발표자인 남은영 동국대 교수는 “한국의 클러스터가 실패하는 가장 큰 이유는 살기 좋은 곳에 만들지 않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미‧중 반도체 갈등 및 중국의 대응 전략’을 주제로 한 발표 중 중국의 산업 정책을 설명하며 나온 말이다. 남은영 교수는 “중국의 클러스터는 대부분 베이징(北京)‧상하이(上海)‧광저우(廣州)처럼 살기 좋은 도시에 있다”며 “반도체 등을 연구하는 우수 인재들을 붙잡으려 중국 기업들은 파격적인 주거 혜택을 제공한다”고 말했다. 첨단 산업 클러스터 건설 계획은 쏟아지지만, 실질적인 정주 여건 마련책은 미비한 한국의 현주소를 반성하게 되는 대목이다.
실제로 중국의 실리콘밸리라 불리는 베이징 중관춘(中關村), 알리바바 그룹을 중심으로 형성된 항저우(杭州) IT‧물류 클러스터, 혁신 도시 광저우 선전(深圳)의 하이테크 제조업 클러스터 등은 모두 중국 주요 도시에 분포한다. 중관춘엔 베이징대, 칭화대 등 중국 명문대 청년 창업센터가 모여있고, 선전은 소량의 시제품이라도 바로 만들 수 있는 제조 기반을 갖췄다. 남은영 교수는 이러한 기존의 우수한 클러스터를 더 확대하는 것이 중국의 전략이고, 이를 위해 중국이 엄청난 연구개발비는 물론 보조금과 세금 혜택을 쏟아붓고 있다고 강조했다.
남은영 교수는 중국 반도체 산업에 자급률 저조, 무역 적자 확대, 기술력 부족, 미국보다 적은 R&D 지출 등 여전히 많은 한계가 존재하지만 이러한 단점을 극복하기 위한 중국의 대응에 더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남 교수는 ▶산업 클러스터 구축 ▶기초 연구 중점 전략 ▶반도체 인재 양성 ▶반도체 소부장(소재‧부품‧장비) 국산화 ▶3세대 반도체 집중 육성 ▶AI 반도체 집중 육성을 반도체 관련 중국의 주요 대응 전략이라고 분석했다.
남 교수는 현재 중국 정부와 기업이 상당한 자본과 시간을 쏟고 있는 3세대 반도체(신소재 전력 반도체)와 AI 반도체의 중요성도 부각했다. 특히 3세대 반도체는 표면적으론 전기차용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인공위성이나 미사일에 쓰이는 군사용 반도체라 동향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중국의 군사 굴기 시도와도 연결됐다고 보인다. 또 AI 반도체는 기본적으로 D램 기술력을 기반으로 하므로 중국이 취약한 분야다. 또 많은 중국 기업이 미국의 제재로 블랙리스트에 오르면서 자체적인 개발과 수출에 한계가 생겼다. 한국 첨단 반도체 기업이 중국과 협력할 절호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날 한국은 ‘선도자’가 아닌 ‘추격자’의 관점에서 글로벌 기술 전략을 전면 수정해야 한다는 뼈아픈 지적도 나왔다. ‘미‧중 AI 및 차세대 배터리 기술 경쟁’을 주제로 발표한 백서인 한양대 교수는 “이미 너무 많은 분야에서 한국이 중국에 뒤처졌다”며 현실적인 대응을 촉구했다. 일부 분야에서 우리가 아직은 앞서 있으니 괜찮다는 착각을 하루빨리 버려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물론 중국이 현재 전기차 배터리 분야에선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하고 있지만 중국 제품이 안전 승인 기준을 간신히 넘기는 수준이라는 점은 변수다. 큰 안전사고가 날 경우 중국 배터리에 대한 거부감이 커져 한국에는 기회일 수 있다는 설명이다.
또 백 교수는 지금 당장 중국과 협력이 어렵다고 미국에 올인(All-in)할 필요도 없다고 했다. 물론 중국의 기술 탈취나 기술 자립에 대한 우려도 크다. 하지만 사실상 가장 큰 잠재적 우려는 한국 내 모든 핵심 제조업이 미국으로 이전해서 생기는 산업 공동화(空洞化)다. 백 교수는 “줄 때 주더라도 받을 건 다 받고 줘야 한다”며 반도체 분야만큼은 대만을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대만의 TSMC는 미국과 일본에 생산기지를 분산하는 정책을 펴고 있다.
한‧중 협력과 관련해 백 교수는 중국을 제3국에서의 위험을 파악하는 전초기지로 활용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중국이 해외에서 현재 무슨 고민을 하고 어떻게 해결하려고 하는지를 주목하면, 한국 기업이 글로벌 사우스나 유럽 등 제3시장에서 경쟁할 때 중요한 정보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중국과 당장 협력은 못 하더라도 소통하는 대화 채널은 계속 유지해야 하고, 우리의 이익과 손실을 정확히 따져 복합적인 전략을 세워야 한다는 점도 강조했다.
미국이 향후 한국의 대중국 반도체 수출을 직접 통제할 가능성에 대해 남은영 교수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답했다. 다만 여전히 많은 미국 회사가 중국과 반도체를 거래하고 있는 만큼 이들이 자국의 제재와 법률을 우회하는 방식을 자세히 살피면 한국도 리스크를 피할 수 있을 것이란 의견도 덧붙였다. 또 남 교수는 한국 반도체 중소기업이 중국 클러스터에 합류하고 중국 시장에 남아있도록 정부의 협력과 지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범용 반도체는 미국이 제재할 가능성이 매우 낮고,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중국의 첨단 산업 체인에 참여해 함께 성장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남은영 교수는 한국 반도체 산업의 단기적인 전략으로는 전문가 그룹의 지속적인 모니터링과 기업과 정부의 ‘핀셋’ 대처를 꼽았다. 또 장기적인 전략으로는 글로벌 벨류 체인(GVC) 연계율 낮추기, 소‧부‧장 자립화, DNA 반도체 등 차세대 반도체 기술에 대한 연구 강화 및 투자 확대 등을 제시했다. 중소 반도체 기업의 중국 진출을 지원하는 구체적인 방안에 대해서는 지방 정부의 역할을 언급했다. 경색된 한‧중 관계로 중앙 정부 차원의 소통이 어려울 땐 지방 정부 간의 대화 채널도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날 세미나를 주최한 국제금융센터의 이용재 원장은 “미‧중 기술패권의 향방은 우리 미래 먹거리와 직결된다”며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태(百戰不殆)”라고 강조했다. 또 그는 “첨단 기술을 둘러싼 미‧중의 갈등 사례를 살피고 양국의 산업통상 정책과 경제 방향에 따라 글로벌 경제와 한국 경제가 맞게 될 기회와 위험 요인을 합리적으로 분석해야 한다”며 “본 세미나가 맞춤형 대응 방안과 경영 전략을 수립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사공관숙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연구원 sakong.kwans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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