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칠 때 안 떠나는 김연경, 아름다운 은퇴를 위한 조건
[이준목 기자]
▲ 김연경 '양손에 트로피' 8일 오후 서울 서초구 더케이호텔에서 열린 프로배구 2023-2024 V-리그 시상식에서 여자부 정규리그 MVP에 선정된 흥국생명 김연경이 트로피를 들고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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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구여제' 김연경이 다시 한번 현역 연장을 선언했다. 김연경은 지난 4월 8일 서울 양재동 더케이호텔에서 열린 '도드람 2023~2024 V리그 시상식'에서 정규리그 최우수선수상(MVP)을 수상하면서 팬들에게 현역 연장이라는 깜짝 선물까지 발표했다.
MVP 수상을 위하여 단상에 오른 김연경은 "다음 시즌에도 볼 수 있나"라는 사회자의 기습 질문을 받았다. "여기서 그런 질문을 받을 줄은 몰랐다"면서 잠시 망설이던 김연경은 이내 "정상에 서 있는 모습을 팬들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한 번 더 도전하기로 결정했다"고 시원하게 답을 밝혔다.
김연경은 해외무대에서 활약하다가 2022년 국내 무대로 복귀했고, 소속팀 흥국생명을 2년 연속 챔피언결정전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우승에는 늘 한 발이 모자랐다. 공교롭게도 김연경은 1차 국내 복귀였던 2020-21시즌을 포함하여 2022-23시즌, 2023-24시즌 모두 챔피언결정전에서 준우승만 3번에 그치는 아쉬움을 겪었다.
특히 올시즌 챔피언결정전에서 현대건설에 패한 후 웃음기 한 점 없이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챔피언결정전 준우승 트로피를 받아드는 김연경의 모습은 팬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내기도 했다. 당시 김연경은 현역 연장 지속 여부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김연경은 이미 지난 2023년에도 한 차례 은퇴를 진지하게 고민했으나 챔피언결정전 우승에 실패한 이후 고심 끝에 현역 연장을 선택한 바 있다. 자유계약선수(FA)가 된 김연경은 총 보수액 7억 7500만 원에 1년 계약으로 소속팀 흥국생명에 잔류했다. 기왕이면 정상의 자리에서 명예롭게 은퇴하고 싶다는 열망 때문이었다. 여자배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를 더 오래 보고 싶었던 팬들도 김연경의 결정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 MVP 수상소감 말하는 김연경 8일 오후 서울 서초구 더케이호텔에서 열린 프로배구 2023-2024 V-리그 시상식에서 여자부 정규리그 MVP에 선정된 흥국생명 김연경이 수상 소감을 말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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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시즌도 김연경은 여전히 리그 최고의 선수였다. 어느덧 36세로 운동선수로서는 황혼기에 접어든 나이에도 김연경은 정규시즌 36경기에 출장하여 총 누적 775득점(6위), 공격 성공률 44.98%(2위), 리시브 효율 42.46%(5위) 등 공수 양면에서 맹활약을 펼쳤다. 이미 시즌 중 2라운드와 5라운드 MVP에 오르며 통산 8회로 이 부문 여자부 최다 수상기록을 갈아치우기도 했다. 포스트시즌 6경기에서도 총 140점, 공격 성공률 45.45% 리시브 효율 41%로 고군분투했다.
김연경은 기자단 투표 총 31표 중 20표를 획득하며 우승팀 현대건설의 양효진(5표)을 크게 제치고 MVP에 선정됐다. 지난 시즌에 이어 2년 연속이자 개인 통산 6번째 MVP였다. 리그 베스트7도 아웃사이드 히터 부문에서 통산 4번째로 수상을 차지했다. 아직도 이런 실력을 자랑하고 있는데 은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시상식장에서 밝은 표정을 되찾은 모습으로 등장한 김연경은 특유의 시원시원한 입담으로 눈길을 사로잡았다. 김연경은 "지난해 자유계약 선수가 된 후 다른 팀에 가려고 했는데, 감독님의 권유로 팀에 잔류했다. 그런데 아본단자 마르첼로 감독님이 약속한 걸 못 지켜서 고맙다는 말은 못하겠다"라는 뼈있는 농담으로 웃음을 자아냈다.
같이 MVP 후보에 오른 절친 양효진에 대해서는 "양효진이 후보로 올라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내가 MVP를 받겠구나 생각했다. 개인적으로 내가 양효진보다는 나았다고 본다. 다른 선수였으면 경쟁이 되었을 같다"고 짓궂은 디스를 날리기도 했다.
하지만 현역 연장을 발표하며 팬들에 대한 감사를 전하는 순간만큼은 진지했다. 김연경이 "고민을 좀 많이 했다. 구단 흥국생명과도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내년 시즌 많은 팬분들을 위해서 한 번 더 도전하기로 결심을 했다"고 속마음을 밝히자 박수 갈채가 쏟아졌다.
김연경의 현역 연장은 한국 여자배구에 있어서도 호재다. 정규리그 동안 여자배구는 31만 141명의 관중을 동원하며 오히려 남자배구(23만 6891명)의 인기를 능가했다. 현대건설·흥국생명·정관장이 경쟁했던 여자부 포스트시즌은 국내 프로스포츠 중계로는 상위권에 해당하는 시청률 2%를 넘으며 인기몰이를 이어갔다.
그 중심에는 역시 간판스타인 김연경의 활약상과 이슈메이킹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현역을 대표하는 슈퍼스타로서 배구계 현안에 솔직한 직언을 날릴 수 있는 것도 김연경만이 할 수 있는 또다른 역할이었다.
사실 이미 김연경의 커리어 정도면 우승을 한 번 더 차지하고 못 하고는 더 이상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다. 일각에서는 농반진반으로 매년 준우승을 차지하더라도 김연경을 더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반응도 있을 정도다. 철저히 자기관리와 높은 스타성을 자랑하는 김연경은 앞으로도 마음만 먹는다면 몇 년은 더 충분히 선수생활을 이어갈 수 있을 전망이다. 물론 기왕이면 정상에 올라섰을 때 멋지게 은퇴하고 싶다는 김연경의 의지도 존중되어어야 한다.
하지만 김연경의 현역 연장은 동시에 소속팀 흥국생명과 한국 여자배구에 또다른 숙제도 남긴다. 흥국생명으로서는 김연경이라는 불세출의 스타를 보유하고도 세 시즌이나 준우승에 그쳤다는 것은 만족할 수 없는 성과였다. 흥국생명은 최근 몇 년간 이다영-이재영 자매의 학교폭력 의혹, 외국인 선수 옐레나의 태업, 의문스러운 감독교체, 오너의 윗선 개입 논란에 이르기까지 각종 내부적인 구설수로 바람 잘 날이 없었다.
그 후유증은 본의 아니게 '원맨팀'을 이끌게 되어버린 김연경의 부담으로도 이어졌다. FA가 아닌 김연경은 현역을 연장해도 다음 시즌 흥국생명과 동행을 이어가야 한다. 팬들은 흥국생명이 레전드 김연경의 말년을 망치지 않으려면 이제부터라도 각성해야 한다고 변화를 촉구하고 있다.
실력과 인기 면에서 김연경의 후계자가 될 만한 인물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여자배구의 고민거리다. 국가대표팀은 김연경의 은퇴 이후 아시아 무대에서조차 경쟁력을 잃고 추락을 거듭하고 있다. 다행히 프로리그는 지난해 항저우 아시안게임 참사 등의 악재에도 불구하고 흥행몰이를 이어가고 있지만, 새로운 스타들의 발굴이 없다면 미래는 그리 밝지 않다. 김연경마저 은퇴하고 난 이후를 생각하면 여자배구의 미래가 더욱 걱정되는 이유다.
박수칠 때 떠나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박수 쳐주는 사람들을 위하여 오랫동안 최선을 다하는 모습도 아름답다. 누구든 언젠가 끝은 있겠지만, 적어도 김연경의 마지막 순간은 김연경이 정한다. 배구여제에게는 그만한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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