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 28개 따도 "다음 안 보인다"…日 명문 공대·의대 전격 통합
역대 노벨상 수상자(외국 국적 포함) 28명에 과학분야에서만 25명. 아시아 지역에선 압도적인 성과지만, 정작 일본 내부에선 '노벨상 강국'이란 명예가 옛말이 될지 모른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2020년대에 들어서는 수상자가 단 한명 뿐인데다 국제적으로 주목받는 우수 논문도 중국 등 후발주자에 뒤지는 상황이 덮쳤다. 일본 과학계는 연구 역량의 전반적인 하락을 원인으로 진단하면서 “이러다간 노벨상 수상자가 급감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걱정한다.
일본을 대표하는 이공계 명문대의 변신에도 이런 위기감이 깔려있다. 지난 3일 오전 보슬비가 내리는 도쿄 메구로구 오오카야마의 도쿄공업대 정문은 입학식을 맞아 몰려든 신입생과 가족들로 북적였다. ‘도쿄공업대학’이라고 새겨진 현판 앞에 부모와 학생 100여명이 기념사진을 찍기위해 줄을 서 있었다. 차례를 기다리던 이들 중 누군가 “곧 (학교명이) '도쿄과학대'가 된다”고 말했다.
1881년 개교한 도쿄공대는 도쿄대·교토대·히토쓰바시대와 함께 일본의 대표적인 명문 국립대 4곳, 이른바 ‘도쿄잇코(東京一工)’의 한 축이다. 명문대에 합격한 자녀를 자랑스러워하는 부모 마음은 일본도 매한가지. 그런 학교의 이름이 바뀐다니, 아쉬웠으리라.
도쿄공대는 오는 10월 도쿄의과치과대(1928년 설립)와 통합한다. 공모를 통해 선정한 통합 대학의 이름이 도쿄과학대다. 도쿄공대와 도쿄의과치과대 모두 일본 문부과학성이 선정한 연구 역량 최고 수준의 10개 대학인 ‘지정국립대’에 속한다.
도쿄공대는 글로벌 대학평가기관 QS의 2024 평가에서 세계 91위, 일본 4위에 올랐다. 도쿄의학치과대는 팬데믹 동안 일본에서 가장 많은 환자를 수용했던 곳으로, 코로나 바이러스의 원인균 연구에서 성과를 거뒀다. 치의학 분야는 세계 3위로 평가받았다(QS·2023).
한국처럼 저출생에 따른 학생수 감소가 심각한 일본에선 경영난을 우려한 대학 간의 통합이 종종 일어난다. 그러나 이 두 대학처럼 ‘대입의 승자’로 군림하던 학교들이 통합한 사례는 없다.
일본의 이공학, 의·치학을 대표하는 두 국립대가 통합을 결심한 건 연구 분야를 확대하고, 그동안 연구비·인력 확충으로 정체된 연구역량을 끌어올려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기관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다. 통합을 먼저 제안한 건 도쿄의과치과대였다. 팬데믹 기간 환자를 치료하면서 연구력을 키우려면 공대와의 연계가 필수적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찾은 파트너가 도쿄공대다. 당초 도쿄의과치과대(학생 수 3000여명)보다 규모가 큰 도쿄공대(1만여명)에선 대학 정체성을 잃을까 우려하는 신중론도 나왔다.
통합의 촉매는 2022년 일본 정부 주도로 조성된 대학펀드였다. 일본 정부는 10조 엔(약 88조원) 규모의 펀드를 조성하고, 펀드의 운용 수익을 국제 경쟁력을 갖춘 ‘국제탁월연구대학’에 최대 25년간 지원하기로 했다. 한 학교당 수백억 엔에 이른다.
지난해 10개 대학이 신청했지만, 선정 대학은 도호쿠대 한 곳뿐이었다. 일본 연구력의 '쌍두마차'인 도쿄대와 교토대마저 고배를 마실 만큼 심사가 엄격했다. 도쿄공대는 심사 통과를 위해 도쿄의과치과대와의 통합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두 대학은 이미 통합 대학명(도쿄과학대)으로 국제탁월연구대학 선발전에 뛰어든 상황이다.
두 대학 모두 통합의 최고 메리트로 연구 분야의 확대와 연구비·연구인력 등 연구 역량의 확충을 꼽는다. 이를 통해 두 대학이 종래 투자해온 기초과학·응용과학 분야를 한층 강화하는 한편 AI·빅데이터를 활용한 질병 진단·치료법, 의공학과 같은 각종 융복합 연구 등 새로운 분야를 개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두 대학은 감염증의 원인 미생물을 찾는 법, 알츠하이머병의 치료법 등에 대한 공동 연구에 이미 착수했다. 연구 성과에 따라 노벨상을 기대할 수 있는 분야다.
일본의 위기감…"노벨상도 우수논문도 줄어"
명문대의 자발적 통합, 정부 주도의 펀드 조성 등의 배경엔 연구력 하락에 대한 위기의식이 자리잡고 있다. 문부과학성 산하 과학기술·학술정책연구소가 발표한 ‘과학기술지표 2023’에 따르면 국제적으로 주목받는 일본 연구자의 논문은 해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우수 논문(피인용 상위 10% 이내)의 양이 1999~2001년에는 세계 4위 수준이었으나, 2019~2021년엔 13위로 추락했다. 한국(10위·2021년)보다 낮은 결과였다. 같은 기간 중국은 10위에서 1위로 뛰어올랐다.
또다른 지표는 노벨상 수상자의 감소다. 1949년 유카와 히데키(湯川秀樹)가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이후 일본은 총 28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이중 과학 분야가 25명으로 압도적으로 많았고, 특히 2010년대엔 11명을 배출할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다.
그러나 2020년대엔 지구 온난화 연구로 노벨 물리학상(2021년)을 받은 마나베 슈큐로(真鍋 淑郎) 외엔 수상자가 나오지 않고 있다. 2022·23년 두 해 연속 수상자가 나오지 않자 일본 매체에선 ‘줄어드는 노벨상 인재, 2030년대엔 수상자 더 감소’(니혼게이자이신문), '연구력의 장기 침체를 막아야'(요미우리신문) 등의 기사들이 이어졌다.
수상자들을 조사한 결과 노벨상 수상까지 걸린 연구 기간은 평균 약 22년 정도. 그래서 노벨상의 감소는 지난 20여년 간의 과학기술 정책의 오류를 보여준다는 지적이 나온다. 일본 연구자들은 특히 정부의 ‘선택과 집중’을 문제 삼고 있다. ‘잃어버린 30년’을 겪는 동안 과거와 달리 당장 돈이 되는 분야만 투자했기 때문에 생긴 부작용이란 설명이다.
2016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은 오스미 요시노리(大隅良典) 도쿄공대 명예교수는 최근 한 세미나에서 “과학기술 정책에서 단기적인 경제 효율성이 우선순위가 돼 버렸다”고 개탄했다. 연구·개발(R&D) 지원금이 줄고, 젊은 연구자의 안정적인 일자리가 줄면서 연구의 질이 떨어지는 악순환에 빠졌다는 설명이다. “성과가 나올지 안 나올지 모르는 연구를 할 수 있는 환경이 사라졌다”는 지적이다.
통합 앞두고 영어로 입학 축사
도쿄과학대의 출범이 일본의 연구력 부흥에 기여할 수 있을까. 마스 가즈야(益一哉) 도쿄공대 총장은 3일 입학식에서 신입생들에게 영어로 축사를 했다. 10월 출범하는 도쿄과학대는 영어를 '학내 제2 공용어'로 사용할 예정인데, 이는 외국 국적 교원과 유학생의 적극적 유치와 자유로운 연구 분위기 조성을 위해서다. 입학식을 막 마친 신입생 세키노 가즈히로(関野和広)는 기자에게 “이번 통합으로 창조적인 연구를 할 수 있을 것 같아 설렌다”며 “일본의 미래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일본의 4월은 출발점이다. 입학도, 입사도, 회계연도도 4월에 시작한다. 연구력의 부흥과 재도약을 꿈꾸는 일본 대학, 과학계가 이렇게 신발끈을 다시 묶고 있다.
도쿄=오누키 도모코 특파원 onuki.tomok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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