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우의 시시각각]대통령의 벼랑 끝 유턴
윤석열 대통령이 의대 증원 대국민담화를 한다는 건 일요일인 지난달 31일 저녁부터 흘러나왔다. 오후 9시20분쯤 KBS가 인터넷 뉴스로 처음 내보냈다가 돌연 20분 만에 삭제했다. 용산 대통령실도 혼선을 빚는 듯 보였다. 결국 10시35분 출입기자단에 공식 공지가 떴다. “의사 증원 추진에 대해 대통령이 내일 소상히 설명드릴 예정이다.”
당초 의대 증원은 여론의 절대적 지지를 받는 이슈였다. 다만 두 달 가까이 의료 공백 사태가 이어지면서 피로감이 쌓여 갔고, 대통령실이 ‘2000명 증원은 돌이킬 수 없다. 숫자는 건드리지 마라’는 메시지를 반복하면서 ‘꼭 저래야 하나’라는 반감도 생겨났다. 게다가 총선은 9일 뒤였다. 이런 민감한 시점에 대통령이 직접 나선다면 ‘2000명 양보’라곤 말하지 못해도 ‘증원 문제도 열어놓고 얘기해 보자’는 취지의 발언은 나오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지 않다면 대통령이 굳이 전면에 나설 이유가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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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대 증원 담화에 '비둘기파' 배제
발표 뒤엔 "2000명에 매몰 안돼"
극적인 입장 변화, 통할 수 있을까
」
하지만 담화문은 강경했다. 대승적 타협보다 검사의 공소장처럼 직진이었다. 의사 집단의 반발은 “제대로 된 논리와 근거도 없이 힘으로 자신의 뜻을 관철하려는 시도”로 규정했고, 의료개혁이 좌초하는 건 “이해집단의 저항에 굴복하는 것으로 정상적인 국가가 아니다”고 했다. 의사 소득 OECD 국가 중 1위, 2035년 70세 이상 의사 비중 19.8%, 의사단체와의 협의 37차례 등 실무적인 수치도 제시했다. 특히 “역대 정부가 아홉 번 싸워 아홉 번 모두 졌다. 나라고 정치적 득실을 따질 줄 모르겠나”라면서 “국민이 나를 불러세운 건, 기득권 카르텔에 굴복하지 말라는 것”이라는 대목에선 비장감마저 느껴졌다. 대통령의 진정성에 고개가 끄덕여지면서도 ‘선거 막판 이렇게 갈등을 부추길 거면 왜 나선 거야’라는 의문도 들었다.
반전은 그 직후였다. 오후 들어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발로 “이번 담화의 방점은 대화”라는 얘기가 전해졌다. 이렇게 실컷 의사 집단을 두들겨 놓고 본심은 대화라고? 물론 담화 후반부에 의료계를 향해 “더 합리적인 방안을 가져온다면 얼마든지 논의할 수 있다”는 대목이 있긴 했다. 하지만 이는 복지부의 기존 입장과 동일하고, 사실상 원론적인 얘기 아닌가. 그런데 대화·논의가 초점이라니. 그뿐이 아니었다. 불가역적이라던 ‘2000명 증원’도 바꿀 수 있다는 전언이 또 나왔다. 급기야 성태윤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당일 저녁 방송에 나와 “2000명은 절대적인 수치가 아니다. 2000이라는 숫자에 매몰되지 않을 것”이라며 이를 공식화했다. 반나절 만의 롤러코스터였다.
이번 대통령 담화는 발표 사흘 전부터 준비됐다고 한다. 의대 증원과 관련해 대통령실 내부의 ‘비둘기파’는 철저히 배제된 채 ‘매파’가 주도해 초안을 작성했다. 그만큼 윤 대통령의 뜻은 완강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담화 직후 180도 달라졌을까. 여권 고위 관계자는 “그게 바로 윤석열식 벼랑 끝 유턴”이라고 설명했다. “담화에서 협상의 뜻을 내비치면 총선을 앞두고 정치적 득실을 따지거나 비굴하게 꼬리 내리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을까. 반면에 원칙적인 담화를 발표하고 나서는 본뜻이 전파됐으니 대통령 스스로도 돌아설 명분이 생긴 것”이라고도 했다. 돌이켜보면 2년 전 대선 과정에서 코너에 몰리던 이준석 대표를 “우리가 뽑지 않았나”라며 와락 감싼 것도, 결렬이 유력하던 안철수 후보와의 단일화가 대선 6일 전 극적으로 성사된 것도 비슷한 맥락이긴 하다.
이번 윤 대통령의 벼랑 끝 선회도 성공할 수 있을까. 의·정 협상은 여전히 교착상태지만, ‘불통’ 이미지는 조금 덜어낸 듯싶다. 대통령은 대화하려는 스탠스지만 의료계는 대통령과 면담한 박단 위원장을 성토하고 있으니 말이다. 의대 증원 논란이 총선에서 어느 쪽에 유리할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선거 이후라도 진척된 성과가 도출된다면 대통령의 뚝심만큼은 평가받아야 할 것 같다.
최민우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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