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바퀴벌레가 옮기는 말, 유언비어
며칠 전 밤에 물을 마시려고 부엌 전등을 켰는데 집안을 누비던 바퀴와 갑작스레 마주했다. 바퀴도 놀랐는지 움직임을 멈춘 뒤 빠른 속도로 달아났다. 허둥지둥 살충제를 찾았지만 마루 뒤로 황급히 사라지는 바퀴 꽁무니를 바라만 봐야 했다. 바퀴는 마주할 때마다 다른 곤충에서 느낄 수 없는 묘한 당당함이 있는데 이 당당함이 우리를 위축시킨다.
우리는 바퀴와 늘 동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밤에 나와 음습한 벽과 바닥 사이를 누비는 바퀴는 늘 조심스레 탐색하면서 빠른 속도로 움직인다. 그리고는 어디론가 사라지는데 잠시 후 또 다른 바퀴가 나타난다. 그렇지만 여러 마리가 동시에 출현하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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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아닌 소문 SNS 타고 퍼져
진실과 섞인 거짓, 흥미 자극해
의연하게 행동하는 것이 상책
」
바퀴는 오랜 세월 살피고 살피면서 자신의 종을 보존해 왔다. 심지어 개미와 같은 동료 곤충까지 의식하며 살아왔다. 그래선지 개미와 바퀴는 서로의 영역과 먹이에 대한 자율조정이 이루어져 상대방 권역을 건드리지 않는다. 이 때문에 개미가 나오는 집에는 바퀴가 없다.
바퀴가 지구에 살기 시작한 건 3억 5000만 년 전인데 당시 곤충의 40%를 차지했다. 그러니 당시 지구의 주인은 바퀴인 셈이다. 바퀴는 500만 년 전쯤 등장한 인간과도 따뜻한 동굴에서 음식을 나눠 먹으면서 가깝게 지냈다. 그런데 인간이 돌변해 바퀴를 더럽고 징그러운 해충이라면서 없애려고 혈안이니 바퀴 입장에선 기가 찰 노릇이다.
바퀴가 인간으로부터 이처럼 천대받자 음식물 찌꺼기는 물론이고 동물의 사체와 구토물, 심지어 가래침도 먹게 되었다. 바퀴인들 이런 게 어찌 맛있겠는가. 살기 위해서 먹을 뿐이지. 그런데 이제는 사람이 먹는 음식 위를 다반사로 옮겨 다니면서 병균을 옮기니까 오죽했으면 인간이 바퀴를 ‘비(蜚)’로 칭하면서 ‘너는 벌레(虫)도 아니다(非)’라고 비하했을까.
우리가 자주 쓰는 유언비어(流言蜚語)는 사실이 아닌 소문으로 ‘바퀴가 퍼뜨리는 말’이라는 뜻이다. 몰래 돌아다니면서 더러운 것과 접하는 바퀴를 보고 비유한 표현이다.
유언비어는 옛날에도 있었다. 노(魯)나라 때 살인사건이 있었는데 살인자 이름이 공자의 제자 증삼(曾參)과 같았다. 이를 착각한 이웃이 증삼의 모친에게 “아드님이 사람을 죽였대요”라고 말했다. 두 번째로 소문을 들은 이웃이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세 번째 이웃까지 같은 말을 하자 증삼의 모친은 실제로 현장에 달려갔다고 한다.
유언비어를 들으면 첫 번째 반응은 ‘무슨 소리야?’이고, 두 번째 반응은 ‘그럴 리가?’이고, 세 번째 반응은 ‘그래?’이다. ‘그럴 듯하지만 확인이 안 되는’ 유언비어가 오늘날에는 SNS를 타고 빠른 속도로 퍼져나간다. 거기에 ‘악플’도 붙는다. 이쯤 되면 유언비어 피해자는 온 세상이 자기를 증오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 분노가 치미는 말이나 황당한 유언비어를 들으면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오랜 세월 자동차 정비공장에서 일하다 귀농한 친구에게 시골 생활에서 가장 힘든 게 무어냐고 묻자 농사일보다 자신에 대한 근거 없는 나쁜 소문을 듣는 것이라고 했다. 평생을 기계소음 속에서 산 친구에게 사기를 쳐서 번 돈으로 도망 와 숨어 산다는 소문까지 있었다고 한다. 이런 소문을 어떻게 극복했느냐고 묻자 “어떻게 하겠어. 그냥 넘어갔지 뭐. 가끔 동네 분들과 막걸리도 한 사발씩 하고…” 라고 대답했다.
영국인들이 좋아하는 ‘Keep calm and carry on’이라는 말이 있다. 의미는 ‘쫄지 마’이다. 영국 정부가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에 대규모 공중폭격을 예상하고 영국인들이 위축되지 않도록 만든 슬로건이다. 한자 문화권에선 ‘놀랄 일이 있어도 끄떡하지 말라’는 의미로 ‘처경불변(處驚不變)’이란 표현을 쓴다.
유대인들은 근거 없이 다른 사람을 깎아 내리는 말로 ‘라손 하라(lashon hara)’를 쓴다. ‘라손 하라’를 직역하면 ‘나쁜 혀’이다. 남이 내게 ‘라손 하라’를 하면 억울하고 당황스럽지만 의연하게 행동하는 게 상책이다. 셰익스피어도 “원수를 위해 마음의 불을 지나치게 태우지 말라”고 말했다.
살다 보면 어떤 난관이 닥치고 무엇이 나를 속상하게 할지 모른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유언비어’란 말을 만든 바퀴로부터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모진 세월을 견뎌낸 바퀴가 말을 한다면 나직이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우리가 살아남은 건 얻어맞아도 몸을 납작하게 만드는 탄성을 가져서지요. 인간도 생존력을 높이려면 우선 몸을 낮게 하고 탄력을 유지하면 어떨지요.”
바퀴의 이 말은 선거 때 몸을 낮추고 절을 하는 정치인들을 떠오르게도 한다. 내일 저녁이면 총선이 끝난다. 후보들을 둘러싼 유언비어도 잠잠해질 것이다. 하지만 곧 새로운 유언비어가 바퀴처럼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유언비어 유포자들은 우리가 완전한 진실보다 진실이 섞인 거짓에 더 흥미를 느낀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곽정식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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