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겹다 지겨워" 기계서도 마주하는 '팁 팁 팁'…미국인도 피로감 [뉴욕다이어리]

뉴욕=권해영 2024. 4. 7.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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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생활 두 달여가 지난 지금 모든 것이 적응해야 할 것 투성이지만 유독 익숙해지기 어려운 게 하나 있다. 팁 문화다. 오래 전부터 미국에 자리잡은 문화인 만큼 '이방인' 티를 내지 않고 식당 등에서 기꺼이 팁을 주려 하지만 '팁플레이션(팁+인플레이션)'에 피로감이 쌓일 때가 적지 않다.

우선 팁 비율 자체가 이전보다 높아졌다.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전만 해도 미국으로 여행이나 출장을 가면 팁 비율은 음식값 등 전체 서비스 비용의 15% 안팎이었다. 하지만 팬데믹을 거치며 이 비율이 18~22%로 뛰었다. 많게는 25%를 요구하는 곳들도 있다. 팬데믹발(發) 시중 유동성 공급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물가가 뛰며 서비스 비용의 일정 비율을 떼어 가는 팁도 자동적으로 올라가는 구조지만, 팁 비율 자체에도 인플레이션이 반영됐다. 부담은 되지만 미국 문화니 익숙해지려고 노력 중이다.

하지만 유독 피로감을 느끼는 건 서버에게 서비스를 받지 못할 때조차 팁을 강요받는 분위기다. 카페, 베이커리 등에서 주문을 하고 계산을 하려면 터치 스크린을 통해 항상 팁을 주겠느냐는 메시지를 마주한다. 특별한 서비스를 받지 않았으니 '팁 없음(No tip)' 옵션을 당당하게 누르지만 계산대 앞에 선 직원 얼굴 보기가 불편할 때가 많다. 단골 가게면 더 난처해진다. 머핀 가게에서 키오스크로 주문할 때조차 스크린을 통해 팁을 요구받을 정도니, 대면 주문 시 팁 요구는 이해해야 하는 걸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심각한 팁플레이션으로 요즘은 팁 문화에 익숙한 미국인들조차 피로감을 호소하고 있다. 최근 온라인 쿠폰 사이트인 쿠폰버즈가 미국인 1199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의 79.3%는 키오스크 같은 셀프 서비스를 이용할 때조차 팁을 주는 것은 너무 지나치다고 답했다. 절반에 가까운 47.3%는 키오스크 팁을 경험했다고 밝혔다. '죄책감' 때문에 팁을 준다는 응답자도 상당했다. 응답자 3명 중 2명은 직원과의 어색함, 대립을 피하기 위해 팁을 주고 있고, 60%는 팁을 충분히 주지 않아 서버의 공격적인 행동을 마주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팁을 주는 소비자들도 인색해지고 있다. 미국인 10명 중 7명은 팁을 이전보다 적게 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응답자들의 평균 팁 비율은 전체 서비스 비용의 12.9%로 음식점 등에서 요구하는 최소 18% 보다 훨씬 적은 수준으로 조사됐다. 미국 내에서조차 팁 문화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부족한 것이다.

사실 팁플레이션은 점주가 부담해야 할 비용을 소비자에게 전가하는 행위다. 원자재, 인건비가 모두 오른 상황에서 메뉴 가격을 더 많이 올리지 않으려면 팁플레이션은 불가피하다는 게 점주들의 주장이다. 하지만 소비자 부담이 갈수록 커지면서 일부 주(州)정부는 팔을 걷고 나섰다. 워싱턴 D.C.는 팁을 받는 직원들의 최저 시급을 단계적으로 인상해 오는 2027년부터 일반직 최저 시급과 맞추는 '레스토랑 법안'을 추진하고 있다. 이 법이 시행되면 메뉴판에 명시되지 않은 비용은 소비자에게 부과할 수 없다. 식당업계는 반발하고 있다. 팁이 없어지면 점주가 직원들의 임금 인상분을 고스란히 부담해야 한다며, 음식값의 20%를 서비스비 명목으로 일방적으로 부과하겠다고 나섰다. 이미 뉴욕에서도 일부 식당들은 음식값의 일정 비율을 서비스비 명목으로 부과하고 있다.

가뜩이나 물가 급등으로 주머니 사정이 어려워진 미국인들에게 팁플레이션은 큰 골칫거리로 떠올랐다. 팁 부담은 최근 물가 둔화 속에서도 좀처럼 진정되지 않는 서비스 비용 상승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친절한 서비스를 받은 데 대한 감사의 표시로 자발적으로 주는 팁이 서비스를 받지 않았는데도 반강제로 부담해야 할 추가 비용이 되면서 미국에서조차 팁 문화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커지는 분위기다. 최근 국내에서도 팁 문화가 조금씩 확산되고 있다. 식당, 미용실 등에서 친절한 서비스를 경험한 소비자가 자발적으로 주는 팁이 아닌, 계산대에 팁 박스를 올려 두는 점주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소비자에겐 또 다른 추가 비용일 뿐이다. 미국에서 수입되지 않았으면 하는 것 중 하나가 팁 문화다.

뉴욕=권해영 특파원 roguehy@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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