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전 최초로 ‘ESG’ 개념을 주창하다 [홍기훈의 ‘세계를 바꾼 경제학 고전’]
저자 아돌프 벌리는 미국의 법학자, 경제학자, 변호사, 교육자이자 외교관이다. 루스벨트 행정부의 자문기관인 ‘브레인 트러스트’의 주요 멤버로 활약했다. 컬럼비아대 교수, 국무부 차관보(라틴아메리카 담당), 브라질 대사를 역임했다. 그의 궁극적인 사상적, 정책적 목표는 독점 대기업 지배로 인해 훼손된 자유경쟁 원칙을 복구하는 것이다.
또 다른 저자인 가디너 민스는 1896년 코네티컷주에서 태어나 하버드대에서 화학을 전공하고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뒤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섬유 회사 경영, 학문적 연구, 정부기관에서의 근무 등을 거쳐, ‘근대기업과 사유재산’ 집필에 참여했다. 민스는 이 책을 통해 기업과 경제에 대한 중요한 통계 자료를 제공하며, 현대 기업 이론 발전에 기여했다.
벌리는 마르크스와 마찬가지로 주주 권리를 강화한 이익을 강력히 옹호했다. 이로 인해 ‘미국의 카를 마르크스’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나 그는 공산주의를 지지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유경쟁이 이뤄지는 시장을 이상적인 사회로 봤다. 독점 대기업의 부작용을 주주 권리 강화와 지배 구조 개선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그는 이런 맥락에서 마키아벨리가 20세기 초반에 태어났다면 국가가 아니라 스탠더드오일과 같은 독점 대기업을 연구했을 것이라 주장하기도 했다.
19세기 중엽부터 말까지 미국은 도금의 시대(Gilded Age)를 맞이했다. 이 시대 미국은 남북전쟁이 끝나고 사회적, 지역적 대통합을 이루면서 비약적인 경제 발전을 이룩했다. 급속한 산업화를 바탕으로 대량생산을 추구하게 됐다. 대량생산을 위해서는 대규모 인프라 구축이 필요했고 이 인프라 구축에 참여한 이들은 큰돈을 벌 수 있었다. 경제 발전에 필수적인 산업에 자본이 몰리기 시작했다.
돈이 몰리는 산업에 속한 기업들은 서로 합병을 통해 산업 내에서의 비즈니스를 수직계열화했다. 이를 트러스트(Trust)라 부른다. 소수 기업이 필수 산업을 독점했다. 이들은 산업 독점을 통해 몸집을 키워 대기업이 된 후, 그 규모를 이용해 다른 기업의 산업 진입을 막으면서 자신들의 독점을 공고화했다. 당시에는 이런 트러스트가 약 200개 정도 존재했다. 대표적인 예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철강왕 앤드류 카네기의 카네기스틸, 석유왕 존 록펠러의 스탠더드오일트러스트, 담배 산업의 제임스 듀크가 만든 아메리칸토바코 등이다.
이런 독점 대기업들은 가격 조작과 같은 비도덕적, 가끔은 불법적인 방식을 통해 산업 내 독점적 지위를 유지했다. 일례로 1869년 제이 굴드와 짐 피크스를 중심으로 하는 거대한 금융 자본가들이 담합을 통해 시중의 금을 매수해 인위적으로 가격을 올린 바 있다. 당연히 되팔아서 시세차익을 내려고 한 것. 그런데 이들의 무리한 매수가 금 시장 붕괴를 불러왔다. 이 여파로 9월 24일 금요일, 주식 시장이 폭락하면서 수많은 사람이 파산했다. 이날이 역사상 처음으로 ‘검은 금요일(Black Friday)’이라 불린 날이다. 금 시장 붕괴 시초를 제공한 제이 굴드는 시세 조작만이 아니라 뇌물을 통한 로비도 서슴없이 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 의회는 1890년 ‘반독점법(Anti-Trust Act)’을 발의하지만 실제적인 문제 해결에는 실패했다. 독점 대기업에 비판적이던 루스벨트 대통령은 1903년 기업국(Bureau of Corporations)을 만들고 독점 대기업들을 견제하고자 했다. 이 책은 이런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해 대기업이 미국에 미치는 영향을 총체적으로 분석하고 주주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책이 나온 1930년대, 미국에서는 독점 대기업에 의한 경제력 집중 문제가 계속해서 제기되고 있었다. 문제는 주장을 뒷받침할 정확한 통계가 없다는 것. 얼마만큼의 자본이 어떤 형식으로 대기업에 의해 통제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통계가 없었다. 이 책은 통계와 실증 근거를 토대로 독점 대기업의 위험성을 최초로 알렸다. 200대 대기업이 미국이 보유한 자본의 22%를 통제하고 있음을 통계적으로 보여줬다.
이에 더해 주식회사의 지배 구조와 소유 구조가 소액주주 비중에 따라 변화할 수 있음을 수치로 증명했다. 아돌프 벌리는 소액주주 비중 증가에 대한 통계치를 기반으로 기업 소유 구조가 변화하고 있음을 검증했다. 그는 기업의 지배 구조가 주주총회, 이사회, 경영진으로 소유와 경영이 분리돼 구성돼 있는 이유는 기업 규모가 크고 업무가 너무 많아 주주들이 직접적으로 경영에 참여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책이 쓰이던 당시 독점 대기업들이 발전된 주식 시장을 통해 기업을 공개(외부 투자자들에게 회사의 주식을 파는 행위)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대부분 기업에 소액주주가 들어오게 된다. 주주 숫자가 엄청나게 늘어나자, 주주총회에 모든 주주가 참석할 수 없게 됐다. 주주 권리 행사가 더 어려워진 것. 벌리는 이런 현상을 주주들이 능동적(Active) 소유자에서 수동적(Passive) 소유자로 전락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대리인 문제가 더 심각해졌다는 의미다.
ESG의 선구자 역할을 하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벌리는 정부가 규제를 이용해 기업 경영진이 주주 이익과 사회 전체에 대한 책임을 위해 일하도록 강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규제로 경영진이 온전히 주주 이익을 위해 일하게 만들어 대리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동시에 경영진이 사회적 책임에 대한 고민을 하게 만들어 독점 대기업의 부정적인 문제를 최소화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근대기업과 사유재산’은 1932년에 쓰인 책이다. 우리는 보통 ESG의 시작을 2004년 UN이 제정한 ‘사회적책임투자원칙(PRI)’에서 찾는다. 그러나 사실 ESG 중 기업 거버넌스에 대한 고민을 시작한 책 중 하나가 바로 ‘근대기업과 사유재산’이다. 이 책은 세계에서 최초로 대기업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과 그 의미에 대해 실증적인 분석을 내놨다. 또 대기업의 법적 지위와 사회적 의의 그리고 정치적 함의를 두고 진지한 질문을 던진 최초의 책 중 하나다. 이후 재무이론, 기업지배구조, 법경제학 등 경제학과 재무학의 다양한 분야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독점 대기업의 경제력 집중에 대한 논의에 있어, 이 책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또, 기업의 사회적 책임론을 이론화시키고 체계화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론은 아돌프 벌리와 하버드의 법학자인 도드의 유명한 논쟁으로부터 시작됐다고 알려졌다. 이 논쟁은 기업 이해관계자 범위를 기업 내부 이해관계자에 한정시킬 것인지 아니면 다른 외부 관계자까지 포함시킬지에 대한 논쟁이었다. 논쟁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개념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궁극적으로 CSR(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 이론이 체계화되는 데 엄청나게 공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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