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 실종된 '역대급' 선거, 이 영화에 답 있다

고은 2024. 4. 6.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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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후보자에게 추천하는 영화] <나의 올드 오크>

[고은 기자]

정치인 필수 시청 영화 100선이 있다면 이 감독의 모든 영화를 목록에 올리고 싶다. 블루 칼라의 시인으로 불리는 '켄 로치' 감독은 노동자의 곁에서 일평생 빈곤과 계급에 대해 말해왔다. 그는 영화 제목에서부터 그동안 몰랐고, 알려고 하지 않았던 사람들의 이름을 부른다. 

<나, 다니엘 브레이크>, <미안해요, 리키>에는 홈리스, 실직자, 노동자 등 사회 시스템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심장병으로 일을 못하게 돼 실업 급여를 신청하려던 다니엘은 관료주의적인 행정 절차 앞에서 번번이 좌절하고, '개인 사업자'라는 허울 좋은 말에 넘어가 일을 시작한 리키는 산재 보험에서도 배제되는 택배 노동자가 되어 매번 과로한다. 

여기에는 복지 정책의 시혜를 바라는 게으른 사람이나 귀족 노조라는 얄팍한 알은체가 낄 틈이 없다. 영화는 단지 어제보다 오늘이 조금 더 나아지길 바라는 약한 사람들끼리 연대하는 모습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시대가 요구하는 정치인의 덕목은 사회가 변화함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공감 능력'은 으레 중요한 자질로 꼽힌다. 정치인의 공감 능력이란 살아보지 못한 타인의 삶을 상상하는 능력일 것이다. '국민을 대변하겠다'는 말에는 각기 다른 자리로부터 출발한 요구를 면밀히 듣고 가장 시급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약속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그런 정치가 가능하려면 정치인은 자신이 알고 있다는 오만함은 내려놓고 타인의 삶을 부단히 공부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켄 로치의 모든 영화가 좋은 교본이지만, <나의 올드 오크>는 지금 한국 정치 상황에서 절실하게 필요한 일침을 놓는다. 거장이 남긴 마지막 한 마디를 총선 후보자가 꼭 듣길 바라는 마음으로 전해본다. 

"영국 부자 동네는 난민 안 받잖아"라는 말에 숨은 뜻
 
 올드 오크 펍에서 맥주를 즐기는 동네 주민들. 주민들의 생계를 위협하는 난민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논의 중이다.
ⓒ 영화사 진진
 
'올드 오크'는 오래된 술집이다. 쇠락한 동네에서 쌓여가는 불안과 근심을 잠깐이라도 잊을 수 있는 휴식처이기도 하다. 영국 북동부 더럼 지역의 주민들은 집안 대대로 광부였다. 1984년 당시 영국 총리였던 마거릿 대처가 비효율성을 이유로 국영 탄광을 폐쇄하기 전까진 그랬다. 이렇다 할 사회보장책 없이 지역을 지탱하는 산업이 몰락하자, 광부들 대다수가 실직자가 됐고 하층민으로 내몰렸다. 

영국 정부도 이들을 오랜 시간 방치하면서 지역은 점점 슬럼화됐고 집값이 헐값으로 떨어져 외국 자본이 투기하기에 이른다. 평생을 나고 자란 지역에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는 와중, 시리아 난민이 탄 버스가 예고 없이 들어온다. 

주민들은 노골적으로 적개심을 드러냈다. 안 그래도 팍팍한 삶에 이민자들을 환대할 여유 같은 건 없었다. 오히려 난민들이 내 복지 혜택을 가로채고, 값싼 노동으로 내가 노동할 기회를 빼앗는다고 생각한다.

이때 올드 오크를 운영하는 TJ만이 "먼 길 왔는데 쉬게 하자"는 말로 흥분한 사람들을 가라앉힌다. 주민들도 난민을 비난하는 일이 을들의 싸움밖에 안 된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 듯하다. "영국 부자 동네는 난민을 안 받잖아"라는 불평 또한 어느 지역에 난민을 수용할 것인지도 정치가 결정하는 문제라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은 절망 속에서도 '이것'을 발휘할 힘이 있다
 
 광부 파업 당시 흑백 사진과 그 아래 문구. "함께 먹으면 더 강해진다"라는 메시지가 적혀 있다.
ⓒ 영화사 진진
 
지금껏 켄로치의 영화가 자본가와 노동자, 국가 시스템과 노동자를 반대편에 둔 채 노동자들 간의 연대를 말해왔다면 <나의 올드 오크>는 몰락한 하층민 옆에 시리아 난민을 둔다. 같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끼리 연대하는 일도 고행인데 두 집단은 다른 언어, 문화, 정치 상황 속에서 다른 결의 고통을 겪는 만큼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지 궁금했다. 

켄 로치는 '서로를 향한 연민'이라는 답을 꺼내놓는다. 특별한 우정을 나눈 난민 소녀 '야라'와 'TJ'는 따뜻한 음식과 함께 있어 주는 행위로 상실의 슬픔을 치유한다. TJ의 반려견 '마라'가 큰 개에게 물려 죽었을 때, '야라'의 아버지의 비보가 전해졌을 때에도 이들은 어김없이 음식을 들고 서로의 집에 찾아갔다. 

"함께 먹으면 강해진다"라는 신념은 탄광 파업 시절을 넘어 어떤 위기 상황에서도 통하는 이치였다. 다른 주민들도 하나둘씩 꽃을 들고 야라의 집 앞으로 가 슬픔에 잠긴 가족들과 포옹을 나눴고, 가장 적대적이었던 인물 또한 복잡한 얼굴로 걸어와 함께하는 것으로 애도에 동참했다. 

"어려움 속에서 약자를 비난하는 선택은 가장 손쉬운 것"이라는 메시지도 쉬운 선택을 한 사람을 비판하기만 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절망 속에서도 인간은 조금만 애쓰면 연민을 발휘할 수 있다는 말에 가까웠다. 이는 망가지고 약해진 사람들에게도 존엄을 되살릴 힘이 있다는 위로이기도 하다. 

역대급 정책 없는 총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나의 올드 오크> 스틸 이미지.
ⓒ 영화사 진진
 
그렇다면 이때 정치가 해야 할 역할은 분명하다. 사람들이 쉬운 선택에 빠지지 않게끔 분노의 방향을 돌리고 질서를 만들어야 한다. 을과 을의 싸움을 방치하면서 사회적 비용을 갈등으로 대체하는 행태가 비극의 시작이다. 지금이야 가장 저렴한 동네에, 가장 값싼 방식으로 난민 수용과 거주 문제를 해결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회적 갈등은 얼마 안 가 국가의 위기로 다시 돌아오기 때문이다. 

이번 총선에 출마한 정치인들이 이 영화를 보고 한 가지 질문을 던져봤으면 한다. 몇 배의 이자를 붙여 돌아올 사회적 갈등에 대한 정책적 고민이 있는지 말이다. 총선을 코앞에 둔 지금, 역대급 '정책 없는 총선'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정권 심판 담론'이 심화되면서 한 정당이 공약을 제시하면 다른 정당이 다른 공약을 내놓은 정책 경쟁마저 실종됐다고 얘기한다. 특히 노인, 장애인, 이주민 등의 사회 정책 분야는 철저히 소외됐다. 

총선 이후의 정치가 벌써부터 걱정되는 나 같은 유권자에게도 이 영화는 좋은 처방전이다. 정치가 제 역할을 못 한다고 해서 절망만 하기에는 시민 사회에도 제도 정치 못지않은 힘이 있다. 쉽지 않은 길이겠지만 영화가 알려준 방식대로, 함께 먹어서 더 강해지는 경험이 나름의 돌파구가 되어줄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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