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차이나'는 인도 쪽인가, 차이나 쪽인가? [김기협의 남양사(南洋史) <6>]
16세기 초에 인도양에 들어온 유럽인이 찾은 곳은 ‘인도(India)’였다. 인도의 존재는 고대 그리스인부터 막연히 알고 있었고, 대항해시대의 유럽인은 황금과 향료가 넘쳐나는 곳으로 상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인도양에서 마주친 모든 곳을 “인디즈(Indies. 인도 지역)”라 불렀다. 동인도제도는 그 이름이 오래도록 남은 곳이다. 카리브해의 섬들까지 같은 이름으로 부르다가 실수를 알아챈 후에 “동”과 “서”를 붙였을 뿐.
중국에 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었다. 2백 년 전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은 팬터지 작품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러나 인도양에 일단 들어오자 중국의 존재감을 피할 수 없었다. ‘동방(Orient)’에 관한 유럽인의 의식에서 인도와 중국이 중심이 되었다.
19세기 들어 동남아를 “인도차이나(Indochina)”라 부르는 관행이 일어났다. 후에 프랑스가 베트남-라오스-캄보디아 일대에 지배권을 세우며 (미얀마와 태국을 제외한) 그 지역만을 “앵도신느(Indochine)”라 부르기도 했지만 원래는 인도와 중국 사이를 모두 가리키는 말이었다. (동남아 해양부는 계속 “인디즈”로 불렸고, “인도차이나”는 대개 대륙부만을 가리켰다.)
동남아는 문명의 공백지대?
무굴제국, 명나라, 오스만제국 같은 거대국가도 없고 힌두-불교, 한자-유교, 이슬람 같은 거대문명도 보이지 않는 동남아 일대를 초기의 유럽인은 하나의 공백지대로 보았다. 주변 문명권의 영향을 살펴봄으로써 동남아 문화의 성격을 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인도와 중국이 가장 큰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짐작했다.
초기의 유럽인 연구자들에게는 인도 쪽이 커 보였다. 유럽인의 동방에 대한 관심이 인도에서 출발한 까닭도 있고, 동남아 일대에 산스크리트 문자를 채용한 사회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구가 쌓이면서 초점이 중국 쪽으로 옮겨졌다.
언어학의 발전으로 동쪽의 영향이 부각되었다. 동남아 지역의 언어 대부분이 오스트로네시아(Austronesian), 오스트로아시아(Austroasiatic), 흐몽-미엔(Hmong-Mien), 시노-티베트(Sino-Tibetan), 크라-다이(Kra-Dai), 다섯 어족에 속한다. 이 중 타이완에서 출발한 오스트로네시아어족과 중국어가 포함되는 시노-티베트어족 외에 흐몽-미엔어족과 크라-다이어족도 남중국 지역 발원으로 확인된다. 베트남-캄보디아를 중심으로 한 오스트로아시아어족 역시 서쪽에서 온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중국 남해안의 푸젠-광둥-광시 지역은 동남아 해양부와 비슷한 자연조건을 갖고 있고 서남부의 스촨-윈난-구이저우 지역의 자연조건은 동남아 대륙부 내륙지방과 연결된다. 선사시대에서 역사시대 초기에 걸쳐 중국의 상당 부분은 동남아와 비슷한 자연조건 위에서 비슷한 문화현상을 전개했고, 그 결과가 지금의 언어 분포에도 남아있는 것이다.
마크 엘빈은 〈코끼리의 후퇴 The Retreat of the Elephants: an environmental history of China〉(2004)에서 코끼리가 북중국 지역까지 서식하던 청동기시대 이후 중국의 환경 변화를 코끼리 서식 지역의 축소 과정을 통해 설명했다. 문화조건이 자연조건을 바꾼 ‘한화(漢化)’, 즉 문명화의 과정이다. 남중국 일대는 이 변화가 늦어서 아직도 진행되고 있다.
새로 드러난 파촉(巴蜀)문명의 모습
동남아의 언어 형성기에 서쪽보다 동쪽의 영향이 컸던 이유를 만족스럽게 설명해주는 연구를 보지 못했다. 인도의 고대문명이 서쪽의 인더스강 유역에서 먼저 발전하다가 마우리아왕조(기원전 322-185)에 이르러 갠지스강 유역까지 확장된 사실이 알려져 있거니와, 중국문명도 전국시대(기원전 475-221)에 이르러 장강 유역까지 확장된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근년의 고고학 연구를 통해 밝혀지고 있는 전국시대 이전 장강 유역 고대문명의 양상에 유의할 점이 있다. 문헌에 입각한 전통적 역사학에서는 황하문명을 중국 고대문명의 연원으로 여겨왔는데, 청동기시대 유적의 발굴을 통해 장강 중-하류와 상류 지역에도 황하문명 못지않은 수준과 규모의 문명이 확인되고 있다.
삼성퇴(三星堆) 유적의 발굴이 가장 경이로운 성과였다. 청두(成都)시 북쪽 약 40km 거리의 이 유적은 1930년대부터 알려져 몇 차례 발굴이 있었다. 그러나 하나의 지방문화일 것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중시되지 않고 있다가 1980년 시작된 본격적 발굴로 진면목을 드러냈다. 사방 2km 둘레의 도성과 화려하고 풍성한 유물은 같은 시기(기원전 1200-1000년) 은(殷)나라에 뒤지지 않는 물질문화로 평가받게 되었다.
삼성퇴 발굴과 뒤이은 금사(金沙, 청두시 서쪽 교외) 유적 발굴을 통해 고대 파촉(巴蜀)문명이 당시의 중원문명과 대등한 수준으로 확인되었다. 3세기 삼국시대에 촉한(蜀漢)의 거점이 된 장강 상류 지역은 청동기시대에 이미 마련되어 있던 근거지였던 셈이다.
기원전 1000년대 청동기시대 파촉문명의 화려하고 웅장한 모습은 오랜 기간을 통해 빚어진 것이 아닐 수 없다. 신석기시대부터 스촨 지역의 문명 발전이 빨랐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동남아 북쪽 고원지대와 연결되는 이 지역에 농업문명이 일찍 자리 잡았다면 이 방면으로부터 동남아를 향한 인구 이동과 문화 전파가 활발했던 조건으로 이해할 수 있다.
베트남과 중국 남해안에 걸친 남월 제국
‘인도차이나’를 인도 쪽으로 보느냐 차이나 쪽으로 보느냐 판별하는 데 필자 자신은 엄정한 중립에 설 수 없음을 자인한다. 수십 년 중국사 중심으로 공부해 왔기 때문에 아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그쪽으로 치우쳐 있기 때문이다.
‘남양’이란 말을 연재 제목에 쓰는 것도 그 때문이다. 중국 쪽 관점을 반영하는 말이다.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은 그 측면을 설명하는 것이고, 다른 측면의 설명은 다른 이들에게 맡길 일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 들여다보니 지금까지의 통념에 비해 중국과의 관계가 남양 역사에서 차지한 비중이 컸다는 판단을 내렸다.
동남아에서 중국의 영향이 가장 큰 곳은 단연 베트남이다. 그 이름부터 ‘월남(越南)’이란 한자에서 나온 것이다. ‘월(越)’이란 중국에서 춘추시대부터 남방 오랑캐를 가리킨 말이었고 춘추 말기에는 장강 하류 지역에서 강국으로 일어서기도 했다. 지칭하는 범위가 넓어서 ‘백월(百越)’이란 이름이 널리 쓰이기도 했다.
진 시황이 중원 통일 후 백월을 정벌하고 군현을 설치했는데, 진나라 멸망 후 그곳 지방관이 남월(南越) 왕조로 독립했다. 한 무제가 흉노 격파에 이어 남월과 조선을 정벌함으로써(각각 기원전 111년과 109년) 천하 통일을 한층 더 확실히 했다.
한 무제의 남월-조선 정벌은 중국에서 파급된 농업문명권을 하나의 제국으로 묶어 경쟁세력의 출현 가능성을 제거한 조치였다. 종래 한나라에 대한 최대의 위협은 흉노의 유목세력이었는데, 유목세력이 다른 농업세력과 결탁하는 것을 장래의 위협으로 본 것이다.
중국 남해안 일대, 이른바 영남(嶺南) 지방이 백월과 남월의 무대였는데, 그중 농업 발달이 가장 앞선 곳이 지금의 광저우(廣州) 일대와 하노이 일대였다. 하노이 일대가 지금은 중국 밖에 있지만 진 시황과 한 무제 당시에는 천하 통일을 위한 하나의 핵심 요소였다.
월남(越南), “월의 남쪽”인가, “남쪽의 월”인가?
한 무제는 남월 땅에 9군(郡)을, 조선 땅에 4군을 설치했는데, 남월 9군은 모두 (하노이 지역 외에) 중화제국 영토가 된 반면 조선 4군은 독립의 길을 걸었다. 나는 그 차이가 생긴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 일이 있다. (〈오랑캐의 역사〉(2022) 76-77쪽)
“결정적인 차이는 한나라 멸망 후 중국 북부가 5호16국이라는 ‘오랑캐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중화제국이 남쪽으로 퇴로를 찾은 데 있었다. ... 황하 유역에서 장강 유역으로 중심지를 옮긴 중화제국은 국력 회복의 길을 남방 개척에서 찾지 않을 수 없었고 그에 따라 남월 지역의 한화가 빨라졌다. 반면 북중국의 바깥에 있던 조선 지역은 중화제국의 압력에서 벗어나 독자적 발전의 길을 걸었다.”
그때는 중화제국의 남하(南下)를 다분히 우연한 일로 생각했다. 이제 남양 사정을 살피면서 다시 생각하니 그리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중화제국의 출범에는 북방의 밭농사 세력이 주도권을 가졌지만, 발전의 방향은 생산성이 더 높은 벼농사를 향한 것이었다. 장기간에 걸친 중화제국의 확장 방향은 남쪽이 될 수밖에 없었다.
벼농사가 확산된 조선과 베트남은 모두 ‘소중화(小中華)’를 자임했다. 그런데 남양에서는 벼농사가 베트남 외에도 여러 곳에 크게 자리 잡았는데도 중화문명의 총체적 도입이 베트남에서 그쳤다.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남양에는 인도 방면의 문화적 영향이 중국의 영향과 엇갈려 있었기 때문에 어떤 평형을 이룬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중국과 남양 사이의 문화적 단층을 베트남의 이름에서도 알아볼 수 있다. 1802년 출범한 응우옌 왕조가 이듬해 청나라에 책봉을 청할 때 ‘남월(南越)’이란 국호를 원했다. 그러나 청나라에서는 한나라 때 남중국 지역을 지배한 왕조와 같은 이름을 쓰는 것이 마땅치 않다고 하여 ‘월남(越南)’으로 바꾸게 했다.
청나라 입장에서는 ‘월’이 남중국 지역이고 “월남”은 “월의 남쪽”이란 뜻이다. 그런데 베트남어가 속한 오스트로아시아어족 문법에서는 중국어와 달리 수식어가 피수식어의 뒤에 온다. 응우옌 왕조 입장에서는 “월남”이 “남쪽의 월”을 뜻하는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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