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스트가 살핀 신자유주의 속 ‘남성 문제’
수전 팔루디 지음, 손희정 옮김
아르테, 1144쪽, 7만원
미국 저널리스트 출신 페미니스트 작가 수전 팔루디는 2017년 국내 번역된 ‘백래시(Backlash)’라는 책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백래시’는 팔루디가 30대 초반이던 1991년 펴낸 첫 책으로 미국에서 1970년대 페미니즘 제2물결 이후 1980년대 불어닥친 페미니즘과 여성에 대한 전방위적 공격을 조명했다.
‘스티프트(Stiffed)’는 1999년 발표된 그의 두 번째 책이다. ‘배신 당한 남자들’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 경제적·문화적 압박에 직면한 미국 백인 남자들의 분노를 분석한다. 그 ‘성난 백인 남자들’이 백래시 현상을 만들었고, 2000년대 들어 트럼프 시대를 열었다.
“나 같은 페미니스트들을 괴롭힌 질문은 여성들의 변화에 남성들이 저항하는 이유의 본질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여성이 독립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불안해하는 남자들이 왜 그토록 많은 걸까? 그 가능성을 꺼리고, 이에 분개하고 두려워하며, 지독한 열정으로 맞서 싸우는 남자들이 왜 그토록 많을까?”
팔루디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6년간 미국 전역을 돌며 신자유주의 아래 살아가는 남자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저자는 조선소, 항공사 등 거대 공장에서 생산직 노동자로 일하며 중산층의 삶을 살다가 일자리를 잃고 때론 가정도 잃은 남자들의 목소리를 전한다.
“지난 20여년간의 탈산업화와 구조조정은 미국의 광활한 산업을 휩쓸었다. 중서부 전역에 걸쳐 철강 및 자동차 공장을 폐쇄하고, 방위산업을 죽여 버렸으며, 거대 기업에서 수많은 노동자를 해고했다.”
군수업체 맥도넬더글러스에서 해고된 노동자 돈 모타는 거세당한 느낌이라고 말했다. “남자답다고 느낄 수가 없어요. 그럴 수 없다고요. 가족을 부양할 수 없는 게 사실이거든요… 아주 솔직히 말하자면요. 나는. 내가. 거세. 당한 것 같다고 느껴요.”
“여자들이 강자예요” “‘타이틀 나인’(학교에서 성차별을 금지한 1972년 연방법) 때문에 모든 게 변했어”라고 말하는 젊은 남성들의 이야기도 듣는다. 또 열정적인 미식축구 팬들, 기독교 남성운동 참여자들, 베트남 참전 용사들, 영화 ‘람보’의 주인공인 실베스터 스탤론 등도 만난다.
저자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남자들의 좌절과 분노를 이해하게 된다. 남자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풍요의 시대에 만들어진 남성 모델을 물려받았지만, 1990년대의 현실에서 이를 실현할 방법이 없다. 세상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전후 국가는 점점 더 화이트칼라 중심으로 돌아갔고 생산직 노동의 가치는 등한시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정부가 지원하는 화이트칼라 계급으로 ‘상승’하는 남자들에게만 유익해 보였다.”
탈산업화 과정에서 탈락한 노동계급 남자들, 화이트칼라 직업에 편입하지 못한 젊은 남자들의 곤경은 주로 경제적 측면에서 조명돼 왔다. 이 책은 거기서 한 발 더 들어가 남성성의 위기를 발견한다. 남자답지 못하다는 느낌, 남자 구실을 못 한다는 느낌, 그래서 수치스럽고 화가 난다는 느낌이다. 남성성의 위기는 이 남자들이 왜 여성들을 공격하는지 설명해준다.
저자가 신자유주의 시대 추락한 노동계급 남성들의 처지를 페미니즘 이전의 여성들에 비교한 것은 무척 흥미롭다. “공적 생활에서 필요한 역할, 품위 있고 안정적인 생활을 영위할 생계, 가정에서 받는 존중, 문화적으로 받는 존경 등 남성들이 잃어버린 것을 생각할수록, 20세기 후반의 남성들은 20세기 중반의 여성들과 비슷한 지위로 떨어진 것처럼 보였다.”
저자는 남성 노동자들의 좌절은 국가와 경제의 새로운 배치 속에서 그들이 외면당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들이 남성은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남성성의 신화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고 짚는다. 그러면서 여성들은 페미니즘을 통해 사회가 여성에게 강요한 틀을 깨고 나왔는데 ‘남성들은 왜 남성성의 신화와 싸우지 않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는 “남성성의 위기는 남자들이 자기 자신의(혹은 사회의) 해방을 위해 싸움을 조직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등장했다”면서 “우리 시대의 문화가 말도 안 되게 모욕적인 방식으로 남자들에게 자신을 증명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데도 왜 남자들은 반항하지 않는 걸까?”라고 묻는다.
남자들은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남자다움에 응해 주지 않기로 결심할 수 있다. 그리고 새로운 남성 모델을 찾아 나갈 수 있다. 예컨대, 과거 조선소 노동자들 사이에는 ‘돌보는 남자들’이란 모델이 있었다. “조선소의 남자들은 전혀 다른 성격의 남성 윤리를 품으려고 했다.” 그들에겐 돌보고 나누고 도움이 되는 것이야말로 남자다움이었다.
이 책은 여성 문제를 해결해온 페미니즘의 시각으로 남성 문제를 분석한다는 점에서 전에 없는 시도를 보여준다. 팔루디는 남자들에게 여성과 싸우지 말고 자신들을 옥죄는 남자다움, 남성성의 신화와 싸우라고 말한다. 남녀가 함께 손잡고 성평등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 페미니즘이 남성을 해방하는 무기가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다는 점에서도 획기적이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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