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의 샘물'에 수백만명 몰렸다…교황청도 인정한 '기적의 마을'

최승표 2024. 4. 4.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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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피레네 여행


프랑스 피레네 국립공원에서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가바르니' 지역. 대륙판이 충돌하고 빙하가 이동하면서 독특한 바위 지형을 빚었다. 가바르니 마을에서 개울을 따라 걷는 길은 평탄하다.
프랑스와 스페인, 서유럽과 이베리아 반도의 경계를 이루는 산맥 ‘피레네’는 누구나 지리 시간에 들어봤을 이름이다. 피레네는 단지 국경선이 아니다. 거기 사람이 살고, 거기 이야기가 숨 쉰다. 지난달 21~25일 프랑스 피레네 국립공원과 주변 소도시를 탐방했다. 세계적인 종교 성지부터 경이로운 바위산, 기막힌 음식까지. 성(聖)과 속(俗)의 세계를 두루 경험한 시간이었다.

가톨릭 치유의 성지


루르드는 교황청이 인정한 세계 3대 성모 발현 성지다. 1858년, 14세 소녀 베르나데트 수비루가 동굴 안에서 성모 마리아를 만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사진은 동굴 앞에서 미사를 드리는 순례객의 모습.
피레네의 관문 루르드(Lourdes)는 흥미로운 도시다. 인구가 1만4000명에 불과한 작은 마을인데, 프랑스에서 파리 다음으로 호텔이 많다(약 350개). 이유가 있다. 루르드는 교황청이 인정한 세계 3대 성모 발현 성지 중 하나다. 전 세계 순례객의 발길이 이어진다.
성모 발현을 기념해 지은 성당 안에 있는 베르나데트 수비루의 사진. 수비루는 성모를 만난 뒤 수녀회에 들어가 수도 생활을 하다가 35세에 결핵에 걸려 사망했다.
전설 같은 사건은 19세기에 일어났다. 1858년 루르드 강변 동굴에서 14세 소녀 ‘베르나데트 수비루’ 앞에 광채와 함께 한 여인이 나타난다. 소녀는 누군지도 모르고 무릎 꿇고 기도한다. 이후 17차례 더 소녀에게 나타난 여인은 “나는 죄 없이 잉태했다” “죄인을 위해 기도하라” “샘물을 마시고 몸을 씻으라” 같은 말을 남긴다. 소녀는 이 사실을 가족에게 알렸고 소문은 마을로 퍼졌다. 사람들이 동굴로 모여들었다.

물을 마시고 몸에 바른 사람 중 불치병이 낫는 기적이 속출했다. 프랑스 전역이 루르드를 주목했다. 쉬쉬하던 루르드 지역 주교는 1860년 수비루가 성모 마리아를 만났다고 인정했다. 머지않아 교황청도 루르드를 성모 발현 성지로 지정했고, 1933년 수비루를 성녀로 시성했다.

루르드를 찾는 순례객은 성모 마리아가 나타난 이 자리에서 솟아난 물을 성수(聖水)로 여겨 받아간다.

요즘도 한 해 수백만명이 루르드를 찾는다. 동굴과 성당을 순례하고 기적의 샘물을 물병에 담아간다. 순례객은 치유의 기적이 지금도 일어난다고 믿는다. 지난달 루르드에는 휠체어를 타고 온 순례객이 유난히 많았다. 로랑 폰조 루르드관광청 마케팅 이사는 “교황청이 인정한 완치 사례만 70건 이상이고 보고되지 않은 작은 기적은 수천 건에 달한다”고 말했다.

루르드 요새는 피레네 지역의 생활상을 볼 수 있는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성지이긴 하나 도시 전체가 엄숙한 분위기는 아니다. 종교와 상관없이 가볼 만한 곳도 많다. 루르드 요새가 대표적이다. 1921년 산악인 부부인 루이스·마갈리드 르 본디디에르가 중세 요새를 박물관으로 탈바꿈했다. 피레네 지역의 등산, 스키 역사와 산골 사람의 생활 풍습까지 흥미롭게 전시했다. 부부가 가꾼 정원도 아름답다.


산책하며 즐기는 천하절경


맑은 날 루르드 요새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눈 덮인 피레네 산자락이 어른거린다.
루르드 요새는 사방으로 시야가 탁 트였다. 요새 옥상에 올라가면 피레네 산맥의 고산준봉도 또렷이 보인다. 산맥의 일부인 피레네 국립공원이 루르드에서 지척이다. 국립공원의 여러 명소 중 가바르니(Gavarnie) 지역을 가장 먼저 가봤다.

가바르니는 국경 너머 스페인 몽페르뒤(3355m)와 함께 1997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됐다. 유네스코가 가바르니 지역의 가치를 인정한 건 독특한 지질 때문이었다. 서유럽 판과 이베리아 판의 충돌, 빙하 침식으로 독특한 경관을 빚었다. 프랑스어로 서크(Cirque), 한자로 권곡(圈谷)이라 부르는 바위의 형상을 마주하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곡면 TV처럼 휜 거대 암벽은 수직 높이가 1.7㎞, 둘레는 14㎞에 달했다.

피레네 국립공원에서도 독특한 풍광을 자랑하는 가바르니 지역.

가바르니를 여행하는 방법은 어렵지 않다. 마을 입구에서 바위를 감상하며 산책을 즐기면 된다. 왕복 2시간의 개울 길을 걸었는데, 압도적인 풍모의 바위와 달리 마을 풍경은 정겨웠고 숨이 헐떡이지 않을 정도로 길은 완만했다. 늦봄부터는 바위에서 흘러내리는 폭포가 장관을 이룬단다.

피레네 국립공원 안에 있는 '퐁데스파냐'는 과거 스페인과 교역로로 쓰인 다리다.
퐁데스파냐가 있는 국립공원 지역은 누구든 산책하기 편한 산 속 분지다.

루르드에서 정남향으로 내려오면 코트레(Cauterets)라는 마을이 나온다. 온천과 스키로 유명한 국립공원 속 휴양 마을이다. 이곳에도 누구나 걷기 좋은 길이 있다. 해발 1460m 국립공원 주차장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5분만 이동하면 험한 산속이라 믿기 힘들 만큼 너른 평지가 나온다. 진한 침엽수 향에 취해 걷다가 산장 카페에서 카푸치노를 마시며 여유를 누렸다. 하산길에 ‘퐁데스파뉴(Pont d'espagne)’라는 유서 깊은 돌다리를 만났다. 과거 스페인과 무역로로 쓰였던 다리다. 다리 옆 폭포에서 눈 녹은 물이 거칠게 쏟아졌다. 사방으로 물보라가 튀었고, 무지개가 피어올랐다.


거위 간, 흑돼지 햄…미식의 본고장


케이블카를 타고 오를 수 있는 피크 뒤 미디 전망대. 스페인 방향으로 눈 덮인 바위산이 한없이 펼쳐져 있다.
전망대 한편에 설치된 12m 길이의 철제 다리. 피레네 최고의 인증샷 장소로 통한다.
국립공원 안에는 피레네의 테라스라 불리는 ‘피크 뒤 미디(Pic du midi) 전망대’도 있다. 케이블카(어른 49유로)가 약 15분만에 해발 2877m 산 정상에 도착했다. 루르드를 출발할 때만 해도 비가 내려 걱정했는데 기우였다. 하늘은 지중해처럼 파랬고 융단 같은 운해가 산허리를 두르고 있었다. 최고봉 아네토 산(3404m)을 비롯한 무수한 바위산이 가시거리 끝까지 펼쳐졌다. 절벽 밖으로 12m 설치한 다리에 서니 다리가 후들거렸다.
피크 뒤 미디에는 객실도 15개 있다. 시설은 단출하지만 창밖으로 피레네의 절경이 보이고 밤에는 쏟아지는 별을 볼 수 있다. 1박 가격은 약 500유로.
피크 뒤 미디는 유럽 최고봉 천체관측소이기도 하다. 방문객도 천문관 전시를 관람하고 영상 프로그램을 볼 수 있다. 클레르 수카즈 피크 뒤 미디 매니저는 “전망대에는 객실도 15개 있다”며 “이곳에 묵으면 원 없이 별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피크 뒤 미디는 프랑스 유일의 ‘국제밤하늘공원’이다. 그만큼 대기가 맑다는 뜻이다.
루르드 시내에 자리한 햄 전문점 '라 메종 뒤 잠봉'. 햄 장인 피에르 사주가 최상급 재료로 만든 햄을 판다. 흑돼지 뒷다리를 염장한 햄이 대표적이다.
자연 감상이 피레네 여행의 전부는 아니다. 이곳이 프랑스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프랑스 남서부 ‘옥시타니’ 지방의 향토 음식을 즐기는 재미도 크다. 세계 3대 진미로 통하는 푸아그라(거위 간), 흰 강낭콩과 돼지·오리고기를 넣고 뭉근하게 끓인 카술레가 특히 유명하다. 흑돼지 뒷다리를 염장한 햄도 빼놓을 수 없다. 루르드 시내에 햄 장인 ‘피에르 사주’의 이름을 내건 가게를 가봤다. 2년 이상 숙성한 햄을 시식했는데 짜지 않고 고소해서 계속 손이 갔다.
루르드 인근에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와이너리도 있다. 중세 고성과 그 주변 땅을 활용해 세계 최고 품질 와인을 만드는 '몽투스·부스카세' 와이너리가 대표적이다.
와이너리에서 맛본 닭구이. 두툼한 닭 껍질의 식감이 쫄깃쫄깃했다.
루르드 인근에는 꼭 들러봐야 할 와이너리도 있다. 옥시타니 지방 포도 품종인 ‘따나’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몽투스(Montus)·부스카세(Bouscasse)’ 와이너리다. 와인 혁명가로 통하는 ‘알랭 브루몽’이 1980년 고성을 매입해 와인을 만들기 시작한 뒤 여러 매체가 프랑스 최고 와인으로 꼽았다. 일본 만화 『신의 물방울』에 등장했고, 현재 대한항공이 몽투스 레드와인을 비즈니스석 기내식으로 제공하고 있다. 와이너리에서 파는 음식 맛도 출중하다. 살짝 익힌 푸아그라, 껍질 맛이 고소한 닭 안심구이를 씹다가 2018년산 카베르네 소비뇽을 한 모금 머금으니 붕 뜨는 기분이 들었다. 아찔한 맛이었다.

■ 여행정보

박경민 기자

프랑스 피레네를 가려면 옥시타니 주 최대 도시인 툴루즈까지 항공으로 이동하는 게 좋다. 에어프랑스가 인천~파리 노선에 매일 취항한다. 파리~툴루즈 국내선은 수시로 뜬다. 툴루즈에서 루르드까지는 기차로 약 2시간 소요. 루르드는 연중 날씨가 온화한 편이지만 산악 고지대는 춥다. 피크 뒤 미디는 한여름에도 기온이 영하에 근접한다. 자세한 여행 정보는 프랑스관광청 홈페이지 참조.

루르드(프랑스)=글·사진 최승표 기자 spcho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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