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중앙] 파워인물 | “내 머릿속 우주의 원천, 레인보우”
사업가, 컬렉터 그리고 아티스트 ‘씨킴(CI KIM)’을 만나다
김창일(CI KIM) 아라리오 회장, 열일곱 번째 개인전서 미공개작 선봬
아트넷 선정 ‘세계 100대 컬렉터’… “내 컬렉션 기준은 본능적인 끌림”
천안과 서울, 제주, 상하이의 아라리오갤러리·뮤지엄을 비롯해 교통(천안종합터미널), 유통(신세계백화점 천안아산점), 외식(푸드스트리트)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약하는 천안의 향토기업 아라리오의 김창일(73) 회장. 그는 1986년 아라리오산업을 창립한 후 천안을 예술의 도시로, 제주 탑동 일대를 아트로드로 변화시킨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에겐 사업가인 ‘본캐’ 외에도 문화계 인사로서의 다양한 ‘부캐’가 존재한다. 미술품 4000여 점을 수집한 미술계 큰손 컬렉터, 신진작가를 발굴하고 육성하는 갤러리스트, 그리고 20여 년 경력의 아티스트 씨킴(CI KIM)이다. 요즘 그는 사업가로 보내는 시간이 예전에 비해 훨씬 줄었다. 장남인 김지완 아라리오 제주 대표에게 일부 사업적인 짐을 덜어놨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그가 가장 좋아하는 부캐 씨킴으로 지낼 수 있는 시간이 늘어 행복한 날을 보내는 중이다.
10분, 본능적 끌림에 따르는 결정적 순간
“Just One 10 Minutes 내 것이 되는 시간” 가수 이효리를 지금의 톱스타로 만들어준 메가히트곡 ‘10 Minutes’의 한 구절이다. 김창일 회장과 대화하던 중 이 가사를 떠올린 이유는 아마 ‘결정적 순간’에 대한 이야기 때문일 것이다. 김창일 회장이 성공한 사업가로, 또 미술품 수집가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데 필요한 시간은 대략 10분. 회장실에서든 경매장에서든 길게 고민해봤자 머리만 아플 뿐 결과는 늘 처음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만큼 본능적이고, 직관적이다.
아티스트로서의 김창일, 씨킴(CI KIM)은 어떨까? 2003년 첫 개인전을 시작한 이후, 2년마다 한 번씩 자신만의 비엔날레를 치르고 있는 그가 3월 14일부터 내년 2월 9일까지 열일곱 번째 전시회를 연다. 20여 년 긴 시간 동안 창작의 고통 속에서 건져 올린 회화, 조각, 설치, 드로잉, 사진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 170여 점을 선보이는 자리다. 전시작 중엔 8년 전, 10년 전 이미 완성해둔 미공개작도 다수 포함돼 있다. 전시 제목은 무지개를 뜻하는 ‘레인보우(Rainbow)’다.
아뜰리에의 파격적인 실험가이자 모험가
“비가 그치고 난 뒤 햇빛을 받으며 펼쳐진 무지개가 정말 신기했어요. 추운 날도 더운 날도 무지개는 어떻게 항상 같은 색을 낼까, 왜 색의 순서도 매번 같을까, 이런 생각으로 온갖 꿈을 꾸고 상상을 했고요. 나중에 학교에서 과학수업 때 무지개에 대해 배우게 됐지만, 어린 저에겐 그저 무지개가 신비롭고 경이로웠습니다. 어째선지 그땐 무지개를 만든 건 하나님이라고 생각해서 교회에도 갔어요. 무지개는 나에게 꿈, 희망이면서 내 삶의 원동력이라 할 수 있어요.”
씨킴은 어릴 때 봤던 경이로운 무지개를 수십 년이 지나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이후 무지개는 미술 관련 정규교육을 전혀 받지 않고 독학으로 미술을 체득한 그의 작업 전반에 큰 영향을 준다. 다만 과거엔 무지개가 꿈, 희망, 아름다움, 예술 등 추상적인 개념의 형태로만 머물렀다면, 최근 작업에서는 무지개의 다채로운 색 자체에 집중한다. 색에 대한 본능적 끌림과 충동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작업이 주를 이룬다. 그래서인지 신작 회화 ‘무제(무지개)’ 시리즈는 과거의 회화 작품들에 비해 채도와 명도가 높고, 발랄하고, 환하다.
씨킴은 파격적일 만큼 미술 재료의 물성을 실험하고 모험하는 작가다. 그의 작품 중 [TIME]지 표지를 직접 캔버스에 옮겨 그린 후 블루베리를 덧칠한 작품도 있다. 블루베리가 얼었다가 녹으면서 흐르는 과즙의 색이 그림 위에 덧발라진다. 거기에 시간이 지나면서 단단하게 굳어 쪼그라든 블루베리 과육까지 그대로 바니시로 덮어 마무리한다. 커피, 토마토. 들기름 등을 칠한 작품들도 있다.
신작 무지개 시리즈도 예외는 아니다. 캔버스에는 다채로운 무지개 색감의 물감에 목공용 본드라는 의외의 재료를 결합해낸 결과물이 담겼다. 200호가 넘는 대형 화폭은 아크릴 물감과 본드를 번갈아 덧칠해 울퉁불퉁한 질감이 고스란히 만져진다. 측면에서 보면 높낮이가 확연하게 차이가 날 정도다. 그가 사용한 본드는 바를 땐 우윳빛이지만 완전히 마르고 나면 투명하고 매끄러운 막을 형성하며 실리콘처럼 변한다.
자연의 무지갯빛은 씨킴의 화폭에서 색으로, 색은 본드와 만나 새로운 ‘물질’로 변환되는 과정을 거친다. 얄궂게도 이 ‘물질’은 씨킴을 고통스럽게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의지가 없는 물질은 화가의 생각대로 호락호락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본드가 잘 메워지지 않은 곳엔 이렇게 움푹 파이면서 빈 공간이 생기는데, 처음엔 이런 실수를 못 참겠더라고. 지금은 이런 의외성까지 그림의 일부분이라 생각해요. 이렇게 큰 캔버스에 매일 붓질하려면 노동이라고 할 정도의 힘이 들어요. 이 큰 붓을 들고 몇 시간씩 작업하다 보면 땀이 날 때도 많고. 체력 소모가 커서 날마다 스트레칭하고 근력운동을 해서 힘을 키웁니다.”
그가 직접 작업 과정의 일부를 보여주겠다고 했다. 모자와 겉옷을 벗고 간편한 차림이 된 씨킴은 분홍색 물감을 국자로 가득 퍼내 커다란 캔버스에 주르륵 탁, 떨어뜨린다. 그리고 빗자루처럼 개조한 큰 붓으로 물감을 쓱쓱 밀어 캔버스 전체에 칠한다. 이런 식으로 다양한 색감의 물감을 덧칠한 위로 본드를 덧칠한다. 의지가 없는 본드와 물감은 그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지 않을 때가 더 많다. 그럴 땐 그도 예민해진다. 작업실에 울리던 음악을 끄고, 작업을 보조하던 조수를 내보낸다. 울분을 토하듯 소리도 지르고, 쾅쾅 발을 구르기도 하면서 고통을 표출해 낸다고 고백했다.
“실험이라는 건 나한테 일상이에요. 대학이나 어디서 제대로 된 학습을 안 받았기 때문에 스스로 실험을 하지 않으면 그 결과를 예측할 수가 없거든요. 그래서 항상 실험을 통해서 직접 느끼고, 보고, 그러면서 내가 생각하는 방향성을 알게 되는 거죠. 오히려 지금에 와서는 내가 미술 교육을 받지 않은 게 다행이다 생각하기도 해요.”
무한한 소재의 드로잉은 “신나는 장난질”
“드로잉은 내 머릿속에 있는 우주의 일부분을 펼쳐 보인 거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드로잉은 저에게 일종의 신나는 장난질이에요. 장난이다 보니, 주제가 없어요. 수많은 소재만 있을 뿐. 김밥 먹고 버리려던 패키지, 생선을 쌌던 포장재, 달걀 케이스, 제주도에서 주운 고무신… 이런 수많은 잡동사니 재료들이 저한테 작업을 시키고, 상상을 하게 만들어요. 제가 가장 힘든 점은 남들보다 소재가 너무 많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소재를 걸러내는 것이 힘들어요. 너무나 많은 생각들이 튀어나오니까.”
씨킴은 스스로 ‘정신병’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어릴 적부터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머릿속을 떠다니는 수많은 생각들과 상상들로 혼란스러웠는데, 그게 ‘정신병’이 아니고 뭐겠냐는 의미다. 혼란스러운 머릿속 우주에서 헤매지 않으려면 명상을 많이 하면서 정리를 해줘야 한다고 했다. 그가 요즘 예전만큼 외국을 잘 안 나가고 있는 이유도 그래서다. 새로운 공간이나 전시처럼 외부에서 새로운 자극을 받는 걸 줄여보려는 의도다. 지금은 갖고 있는 것들을 좀 정리하는 시기라는 것이다. 다행히 그에겐 일을 덜어줄 아들이 있다. 예전엔 은행 업무까지 직접 처리하며 일했다면, 이젠 아들 덕분에 시간의 자유로움 속에서 지낸다.
“이번 전시에서 제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결과에 대한 이야기보다 과정을 봐줬으면 해요. 지금은 부족할지라도 제가 더 열심히 해서 다음 시즌엔 더 좋아질 수 있으니까. 지금 전시가 제 작업의 끝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지금의 제 작업에 대해 결론을 짓기보다 과정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면 좋겠어요. 비록 아직까지 제가 찾지 못했어도 다음 시즌 준비하는 과정에서 더 좋은 세계를 볼 수도 있으니까요. 그 가능성을 봐주셨으면 해요.”
“100년 후 내 예술적 안목과 재능 평가 궁금”
“제 목표는 하나입니다. 50년, 100년 후를 생각하는 겁니다. 제 농사는 단기간에 결과가 나오는 게 아니에요. 10년, 20년 후부터 서서히 드러나는 건데, 사실은 그게 어떨 땐 두려울 때도 있어요. 비교적 기간이 짧은 1년짜리 농사가 잘못되면 다시 1년 걸려서 수정하면 되겠죠. 근데, 10년, 20년 후 그때서야 잘못된 걸 알게 되면 그로부터 또 10년, 20년 걸려서 수정해야 하는데, 가능하겠어요? 그런 생각을 하면 선택에 대한 고통이 반드시 뒤따르게 돼 있어요. 깊게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서 숙제를 풀고 문제점을 해결하려고 해요.”
김창일 회장이 생각하는 예술은 ‘이끄는 것’이다. 여러 가지 문제들로부터 사람들이 더 좋은 세계를 볼 수 있도록 이끄는 것이 예술가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그는 아라리오갤러리와 뮤지엄을 찾는 관람객이 단 10명뿐이어도 지속적으로 운영할 생각이다. 사업적으로는 적자일지라도 진짜 미술을, 예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람들이 미술관에 와서 감동을 받고 더 좋은 세계로 간다면 그걸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김창일 회장이 지향하는 갤러리와 뮤지엄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남관과 운보 작품 월간중앙 지면 통해 첫 공개
“시간이 흘러 50년 후, 100년 후쯤 역사가 나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할지 정말 궁금하긴 해요. 훗날 내 예술적 안목과 능력을 평가 받는 거니까요. 지금은 아직 그 과정인 거고. 만약 100년 후 내 선택이 좋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면 결국 내가 안목과 재능이 없었다는 거잖아요. 그러면 참 슬플 거 같기도 해요. 그래서 지금의 결정이 어떨 땐 두렵기도 합니다.”
김창일 회장이 지난 2월 21일 K옥션에서 픽업해 그의 컬렉션 리스트에 새롭게 추가된 작품들이 있다. 남관의 ‘축일(祝日, A Festive Day)(1)’(1964년, oil on canvas 65.1×80.3cm)과 운보 김기창의 ‘청산춘일(靑山春日, Landscape)’(1985년, 비단에 수묵채색 65×122cm)이다. 그의 컬렉션 중 구두가 아닌, 지면으로는 월간중앙에 처음 공개하는 작품들이다. 그에게 컬렉션의 기준을 물었더니 “instinct(본능)”라는 단호한 답변이 돌아왔다.
“저 같은 경우에는 많은 일을 하잖아요. 기회라는 기차가 지나가는데, 평소에 준비됐으면 그걸 탈 수 있지만 준비가 안 됐다면 놓치는 거겠죠. 그러니까 모든 건 운명과 인연이에요. 제가 경매장을 쫓아다니는 게 아니고, 경매장에서 그 순간 제가 원하는 걸 찾아요. 가장 고통스러울 때는 제 안목이 부족해서 작품을 놓쳤다는 걸 깨달을 때죠. 가령, 지금 우리 미술관에 이 작품이 있어야 되는데, 10년 전 옥션이 열렸을 때 당시의 나에겐 그런 안목이 없었어요. 안목이 없었기 때문에 그 그림을 놓쳤고, 안목이 생긴 지금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너무 힘든 거예요. 속이 찢어지는 것 같아요. 그러면서 배워가요. 한 단계 한 단계 지혜를 얻게 되는 거고요. 그런 과정들조차 저에겐 굉장히 중요해요. 더 많이 공부하고 내 능력을 키워야 하는 이유죠.”
안타깝게도 씨킴의 작품은 현재 사고 팔 수 없다. 작가가 미술시장에 내놓지를 않으니, 아무리 사고 싶어도 살 기회가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 그의 작품이 소장된 곳은 대림미술관(한국)과 라이프치히 Mdbk(독일)뿐이다. 그 작품들도 씨킴이 작품활동을 시작할 즈음의 초기작들이다. 그래서 현재 씨킴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방법은 아라리오갤러리나 아라리오뮤지엄을 찾아가거나 전시회가 열리는 시기에 맞춰 직접 마주하는 것뿐이다. 대신 전시회 기간엔 씨킴이 자리를 지키는 날이 종종 있다. 직접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확률도 높아진다. 그것이 작가 씨킴이 대중과 소통하는 방식이다. 직관적으로, 운명적인 이끌림에 따라!
- 글 박세나 월간중앙 기자 park.sena@joongang.co.kr〉 / 사진 최영재 기자 choi.yeongja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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