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선택하는 죽음을 허하라”[‘할말 안할말’…장지호의 ‘도발’]

2024. 3. 29.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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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호부터 장지호 사이버한국외국어대 총장의 칼럼을 연재합니다. 정치학 박사인 장 총장은 외국어대 행정학과 교수, 기획조정처장 등을 역임한 뒤 2022년 사이버한국외국어대 총장으로 부임했습니다. 칼럼 제목 ‘도발’이 암시하듯, 장 총장은 연구자로서의 오랜 경험을 토대로 한국 사회가 고민해야 할 예민한 이슈에 대해 새로운 시선을 제시할 예정입니다.


칼럼 첫 회에 죽음을 말하려고 한다. 이미 봇물 터지듯 죽음에 대한 논의가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 배우 나문희·김영옥·박근형이 열연한 독립영화 ‘소풍’, 토크 콘서트까지 열리고 있는 연극 ‘비Bea’, 75세 이상 국민의 죽음을 정부가 지원한다는 가상의 미래를 보여주는 일본 영화 ‘플랜 75’ 등이 동시다발적으로 인기를 얻고 있다. 지난 2월 전 네덜란드 총리 부부가 동반 안락사를 했다는 외신도 화제였다.

대한민국 헌법 제10조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하고, 헌법재판소는 ‘개인의 인격권·행복추구권의 본질적 내용은 개인이 자신의 신변이나 생활에 관한 사항을 스스로 선택·결정하는 데 있다’고 판시하고 있다. 죽음도 여기에 포함될 수 있을까? 이미 2016년에 스스로 삶을 종결하는 행위 역시 자기결정권에 의해 보장돼야 한다는 취지의 일명 ‘존엄사법’이 제정됐다. 죽음을 목전에 둔 환자가 자신이 원하지 않는 연명의료를 스스로 중단할 수 있게 됐다.

존엄한 죽음을 위해 연명의료 중단 제도가 도입됐지만 환자 본인의 의사가 반영되는 비율이 적다는 목소리가 계속 나온다. 2023년 7월 말 자료에 따르면 연명의료가 중단된 29만7313건 중에서 환자의 명시적인 의사에 따라 중단된 것은 전체의 39.2%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가족의 진술이나 합의로 연명의료가 중단됐다. 더욱이 전체의 80%는 연명의료 중단을 위한 서식 작성과 중단 이행이 같은 날 이뤄져, 연명의료 중단이 미리 결정되는 게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선택으로 이뤄진 것이다. 제도의 취지는 내가 원하는 죽음을 맞이하는 것인데, 실상은 당사자의 선택보다 가족의 의사로 이뤄지고 있다.

‘조력존엄사’ 논의해야 할 때…

죽기보다 싫은 생명 연장 없어야

규제 중심의 연명의료 결정이 협의의 웰 다잉이라면, 폭넓은 자기결정권을 확보하기 위한 광의의 웰 다잉인 ‘조력존엄사’ 논의가 커지고 있다. 조력존엄사는 극심한 고통을 겪는 환자가 담당 의사의 조력을 받아 스스로 삶을 종결할 수 있도록 하는 게 핵심이다. 조력존엄사는 의사 처방에 따라서 약물을 투입하기는 하지만, 약물 투입의 최종 장치는 본인이 스스로 조작하게 돼 있기 때문에, 의료진에 의해 약물이 투입되는 안락사와는 다르다. 미국의 몇몇 주,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호주, 캐나다 등 해외에서도 인정하고 있으며 점차 그 범위가 넓어지고 있다.

물론 가톨릭계를 비롯한 종교계와 인권 단체는 반대한다. 용어도 아예 의사조력자살로 바꿔 부르면서 의사조력자살이 허용되면 애초 취지와 달리 환자의 최후 수단이 아닌 조기 개입 수단으로 변질돼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이 삶을 포기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생명을 경시하는 태도가 포함돼 있는 만큼 인간 존엄성에 위배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과연 이들이 지키고자 하는 인간의 존엄성이 출구가 없는 죽음 앞에서 유지되고 있는가는 별개의 문제다. 오죽하면 ‘죽기보다 더한 고통’이라는 절규가 터져 나오겠나?

밤마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상황 속에서 그저 기계적으로 진행되는 생명 연장 기법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지에 대한 답이 없다. 인간다운 죽음을 맞이하도록 대안을 마련해 선택의 문을 열어둬야 하는 것이 논의의 출발점이다. 요양시설에 수용돼 물건처럼 취급되느니 내 정신이 살아 있을 때 존엄과 독립을 유지하다 죽음을 맞이하겠다는 주장을 더 이상 외면할 수는 없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존엄이 무엇인지에 대한 선택을 넓히는 것이 그렇게도 자연의 섭리에 위배되는 것인가. 이제는 제도적인 뒷받침을 활발하게 논의할 시점이다.

장지호 사이버한국외국어대 총장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52호 (2024.03.27~2024.04.02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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