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자가 CCTV 파괴"…北무기 받는 러, '유엔 감시망' 무력화
대북 제재가 이행되고 있는지 감시해온 유엔의 전문가 패널이 15년만에 사라진다. 28일(현지시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대북제재위원회 산하 전문가 패널의 임기 연장을 위한 표결에서 러시아가 거부권을 행사하면서다.
러시아가 거부권을 행사해 대북 제재 모니터링 기구를 무력화한 배경은 북한산 전쟁 무기를 거래하는 등 제재를 대놓고 위반하는 상황을 은폐하기 위해서란 관측이 나온다. 실제 전문가 패널의 최근 연례 보고서엔 북·러의 무기 거래 정황을 사진과 함께 구체적으로 실리기도 했다. 황준국 주유엔 대사는 이날 연장안이 부결된 직후 “범죄가 적발되지 않기 위해 CCTV를 파괴한 것”이라며 러시아를 맹비난했다.
제재는 유지…北제재 감시 ‘공식채널’ 마비
2009년 북한의 2차 핵실험을 계기로 출범한 전문가 패널은 안보리 대북제재위를 보조해 북한의 제재 위반 사례를 조사해 매년 두 차례 심층 보고서를 내왔다. 매년 3월께 결의안 채택 방식으로 임기를 1년씩 연장해왔는데, 결의안은 매번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그런데 러시아는 올해 표결을 앞두고 “대북제재에 일몰 조항을 신설하자”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 제재가 해제되는 장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성격이 다른 일몰 조항과 임기을 결부시킨 억지 주장으로, 거부권 행사를 위한 명분 쌓기일 가능성이 크다.
다만 러시아의 반대로 이날 표결이 부결됐지만, 안보리의 제재 자체가 무력화되지는 않는다. 문제는 전문가 패널이 다음달 30일 사라지면 대북 제재가 이행되고 있는지 감시할 시스템이 없어진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로버트 우드 주유엔 미국 부대사는 부결 직후 “러시아의 거부권 행사는 전문가 패널이 지난해부터 러시아의 안보리 결의안에 대한 노골적 위반을 보고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라며 “패널의 독립적이고 객관적인 조사를 침묵시키려는 목적”이라고 말했다. 바바라 우드워드 영국대사도 “러시아의 비토는 우크라이나를 불법 침공하는 데 사용할 탄도미사일 이전 등 북·러의 무기거래 때문”이라며 “러시아는 (북한으로부터)전쟁 무기를 확보하기 위해 제재를 회피하고 위반할 자유를 얻게 됐다”고 지적했다.
‘러시아’ 특정…“동맹 공조 외 대안 없다”
정부 소식통은 이날 통화에서 “전문가 패널이 사라지면 제재 위반을 지적할 공식 채널이 사라진다”며 “한·미·일 공조를 통해 제재 위반을 확인하더라도 북·중·러가 ‘일방적 주장’이라고 부인해도 할 말이 없어진다”고 말했다. 그는 “전문가 패널이 없어도 대북 정보·감시망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확인된 제재 위반을 문제 삼기 어려워진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심각성 때문에 정부도 임수석 외교부 대변인 명의로 “‘러시아의 거부권’ 행사로 부결된 데 깊은 유감을 표명한다”며 이례적으로 러시아의 국가명을 특정한 성명을 냈다. 정부는 그동안 외교 관계를 고려해 비판적 성명에선 국가명을 표기하지 않아왔다. 이에 대해 정부 관계자는 “중·러의 반대로 유엔 기능이 마비된 상태에서 사실상 전문가 패널을 대체할 대안은 없다”며 “앞으로 대북 제재 위반에 대한 감시는 유엔이 아닌 한·미·일과 나머지 안보리 이사국과의 공조로 진행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전했다.
“러, 국제질서 균열 타이밍 노렸다”
패트릭 크로닌 허드슨연구소 아시아태평양 안보석좌는 이날 중앙일보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표면적으로는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전쟁 물자를 공급해주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충성심’에 보답하기 위한 차원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고 말했다.
크로닌 석좌는 이어 지난 11일 미국 국가정보국(DNI)이 공개한 연례보고서에서 북한이 러시아에 무기를 지원하는 배경을 “핵보유국 인정을 받는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라고 분석한 것과 관련 “러시아는 미국 주도의 국제 질서에 공세를 취하기 위한 적절한 시점이 지금이라고 판단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러시아는 대선을 앞둔 미국이 우크라니아 전쟁에 성과를 못 내고, 가자 휴전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는 등 동맹국을 전폭 지지하지 못하는 상황을 노린 것으로 보인다”며 “특히 러시아가 미국에 도전하는 중국을 지지하는 움직임을 예의주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미국 주도의 글로벌 질서에서 힘의 공백이 생긴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덧붙였다.
미 국무부 북한담당관을 지낸 조엘 위트 스팀슨 센터 수석연구원도 본지에 “전문가 패널이 러시아에 의해 사실상 폐기됐다는 것은 30년간 이어져온 북한에 대한 비핵화 시도가 실패할 수 있다는 신호”라며 “특히 유엔 등의 국제 사회와의 공조를 통해 비핵화를 시도해온 바이든 행정부의 대북 정책이 성공적이지 못하다는 시그널로도 볼 여지가 있다”고 설명했다.
美의회 조사국 “北, 중·러 지원으로 운신의 폭 확대”
한편 미국 의회의 공식 싱크탱크인 의회조사국(CRS)는 이날 ‘북·미 관계’ 보고서에서 “국무부는 북한이 러시아에 1만 컨테이너 분량의 탄약과 탄도미사일을 제공했다고 보고했다”며 “중·러의 지원으로 김정은의 운신의 공간이 넓어졌다”고 지적했다. 보고서는 이어 “북한 인구의 40% 이상이 영양실조 상태로 추정되지만, 경제적 어려움으로 체제가 위협받거나 한·미와의 대화를 압박하는 외부적 움직임은 거의 포착되지 않는다”며 중·러의 지원을 바탕으로 북한 체제가 유지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보고서는 특히 “중·러는 2006년과 2017년 북한의 핵·미사일 실험에 따른 제재에는 찬성했지만, 2022년 북한의 석유 수입에 대한 제재 강화에는 반대했다”며 중·러가 스스로 동의했던 대북 제재에 대한 원칙을 바꾼 점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
워싱턴=강태화 특파원 th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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