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 시든 잎도 지켜보는 마음

2024. 3. 27. 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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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사태로 집에서 격리하는 것이 일상이었던 시절, 집 베란다에서 화초를 키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래쪽 잎이 말라서 시드는 것은 가을에 낙엽이 지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노화 현상이다.

오랜 기다림 끝에 시든 잎이 스스로 떨어지면 드디어 반짝반짝한 새잎이 돋아나는 것을 말이다.

화분의 시든 잎도 지켜보는 마음으로 내 눈물이 일상에 치여 마르지 않게 되는 것, 이것이 내게 주어진 자리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나의 소명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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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지현 대전고법 상임조정위원장


코로나19 사태로 집에서 격리하는 것이 일상이었던 시절, 집 베란다에서 화초를 키우기 시작했다. 하나둘, 들이기 시작한 화분이 어느새 베란다를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거실과 방 안까지 식물 천지가 되었다. 이렇게 나처럼 취미로 식물을 키우는 사람을 ‘식집사’라고 부르는 것 같다.

식집사들에게 일상과 같은 루틴은 누렇게 시든 잎을 정리해 주는 일이다. 물이 부족해 건조할 때뿐 아니라 물을 지나치게 많이 줬을 때도 잎이 시든다. 그러나 아래쪽 잎이 말라서 시드는 것은 가을에 낙엽이 지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노화 현상이다. 놔두면 알아서 떨어지지만 보기에 좋지 않다고 억지로 손으로 떼거나 가위로 잘라준다. 이렇게 하다 보면 자칫 줄기에 상처를 낼 때도 있고 멀쩡한 잎이나 소중한 꽃잎까지 함께 떼어 버리기도 한다. 잎이 자연스럽게 수명을 다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는 성급한 마음 때문이다.

법원에서 조정 업무를 전담한 지도 올해로 6년 차가 되었다. 그동안 수천 건의 소송 당사자들을 만나 보았다. 사람들은 조정실에 와서 법적인 쟁점과 관계없는 이야기를 늘어놓는 경우가 많다. 때로는 상대방을 욕하고 자신이 살아온 세월을 한탄하기도 한다. 법조인들에게는 이런 말들이 쓸데없고 시간 낭비처럼 느껴져 중간에 말을 끊고 싶어지기 쉽다. 그렇지만 이런 과정도 인간사의 피치 못할 갈등과 다툼이라는 시든 잎을 떨구어 내고 화해라는 새잎이 돋아나게 하는 꼭 필요한 시간이라면 어떨까?

나의 일에서도 시든 잎을 떼어 버리는 마음으로 너무 서두르지는 않았는지 오늘도 나를 돌아보게 된다. 식집사들은 알고 있다. 오랜 기다림 끝에 시든 잎이 스스로 떨어지면 드디어 반짝반짝한 새잎이 돋아나는 것을 말이다. 그때까지 참을성 있게 볕을 쬐어주고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게 물을 주며 기다려야 할 일이다.

학창 시절, 엄상익 변호사님이 쓰신 ‘은빛 남자의 금빛 이야기’라는 책을 감명 깊게 읽은 적이 있다. 서민들의 아픔과 애환을 함께하는 인간적인 변호사님의 이야기가 어린 마음에도 와 닿았던 것 같다.

은사님이신 김일수 교수님께서 달동네에 가방 하나 들고 법률적인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는 인권 변호사를 꿈꾸었다는 말씀을 듣고 강의실에서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했었다.

비록 인권 변호사나 은빛 변호사는 되지 못했지만 내가 있는 자리인 조정실에서만이라도 참을성 있게 우리 이웃들의 이야기를 듣는 변호사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며칠 전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응급처치 중 아기가 사망한 사건의 기록을 읽었다. 아기 옆에서 멀쩡히 두 눈 뜨고 지켜보면서도 아무 일도 하지 못해 애를 끓여야만 했던 아기 아빠는, 그 응급처치를 하는 10여 분간의 시간을 분초로 나누어 쓴 서류를 법원에 제출했다.

이걸 적으려고 똑같은 CCTV 영상 장면을 몇 번을 돌려 보았을까, 돌려보면서 얼마나 자신을 자책했을까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 절절한 부정이 느껴져 기록을 읽다 코가 시큰해지며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비록 재판 결과가 자신이 의도한 바와 다르더라도 그 결과에 승복할 수 있으려면 재판 과정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말에 귀 기울이는 단 한 사람을 만날 수 있다면, 그 시간과 노력이 헛된 것만은 아니라고 느낄 것이다. 화분의 시든 잎도 지켜보는 마음으로 내 눈물이 일상에 치여 마르지 않게 되는 것, 이것이 내게 주어진 자리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나의 소명이리라.

안지현 대전고법 상임조정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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