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학교 식판도 빌렸다"…초등생 1100명 '원정수업' 사연

안대훈 2024. 3. 26.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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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1일 경남 통영시 광도면 제석초등학교 운동장. 화재로 교실을 잃은 학생들이 다른 학교로 '원정 수업'을 떠나기 위해 통학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18일 화재가 발생한 제석초는 복구 작업에 1년 가까이 걸릴 전망이다. 사진 경남교육청

지난 21일 오전 8시30분쯤 경남 통영시 광도면 제석초등학교. 학생 170여명이 가방을 멘 채 운동장에 모여 있었다. 반(학급)별로 줄 선 학생들은 교실로 들어가지 않았다. 교사 인솔 하에 버스에 몸을 실기 바빴다. 소풍 가는 게 아니었다. 교실이 없어 다른 학교로 ‘원정 수업’을 떠나는 길이었다. 지난 18일 화마(火魔)로 교실을 잃은 이 학교 등굣길 모습이다. 새 학기부터 1000명이 넘는 초등학생이 다른 학교에서 ‘더부살이’ 하고 있다.


1138명 초등생, 타 학교서 ‘더부살이’


26일 경남교육청에 따르면 제석초는 전교생 1138명, 교직원 74명으로 통영시에서 가장 큰 초등학교다. 하지만 최근 학교에 불이 나자 교육 당국은 재학생을 통영시내 7개 학교로 분산 배치했다. 21일부터 1학년(152명)은 죽림초, 2학년(175명)은 통영초에서 교실을 빌려 쓰고 있다. 3학년(204명)도 25일부터 충무초로 등교했다. 4·5·6학년 607명도 오는 27일부터 다른 4개 초등학교(진남·유영·두룡·용남)로 간다. 6학년은 두룡초와 용남초 두 곳에 나뉘어 수업받는다.
지난 18일 경남 통영시 광도면 제석초등학교에서 불이 나 소방당국이 진화 중이다. 사진 경남소방본부

교육당국은 급히 통학버스도 지원했다. 평소 제석초 학생들은 걸어서 등교했다. 하지만 원정 수업을 받는 학교들이 가깝게는 2.2㎞ 멀게는 6.5㎞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걸어가면 1시간 넘게 걸리는 곳도 있다. 제석초 바로 옆 죽림초로 등교하는 1학년을 제외한 나머지 2~6학년은 학년별로 4~6대씩 통학버스가 배차됐다. 학생들 급식도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각 학교는 갑자기 식재료 등을 마련하느라 애를 먹었다고 한다.

경남교육청 관계자는 “다른 학교에서 식판을 빌려오거나 수저 등 식기류를 사기도 했다”며 “다행히 급식 준비에 지장은 없다”고 말했다. 이어 “담임 선생님은 학생이 있는 곳에서 근무하고, 나머지 교직원은 죽림초 유휴교실에 사무실을 마련했다”고 덧붙였다.


1년 가까이 학교 못 쓸 듯…“KF마스크 써도 냄새나”


제석초 학생들의 타 학교 ‘더부살이’는 1년 정도 계속될 전망이다. 불이 난 학교를 단기간 회복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교육당국은 학교 급식소와 40여개 교실 중 최소 15개가 완전히 불에 타고 나머지 교실도 일부 타거나 연기에 그을려 수업할 여건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화재 현장을 다녀온 교육당국 관계자는 “KF94 마스크를 써도 못 막을 정도로 냄새가 심하다. 산업용 마스크를 써야 할 판”이라며 “청소 한 번 한다고 해서 수업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고 전했다.
지난 18일 경남 통영시 광도면 제석초등학교에서 불이 나 소방당국이 진화 중이다. 사진 경남소방본부

경남교육청은 제석초 복구공사와 개학준비 기간까지 계산하면 내년 2월이나 돼야 수업이 가능할 것으로 봤다. 복구액은 100억원으로 추산했다. 하지만 정밀안전진단을 통해 건물 구조에 문제가 생긴 것으로 확인된다면 복구 금액과 기간은 더 늘어날 수밖에 없다. 박종훈 경남교육감은 지난 20일 제석초 복구지원 대책을 발표하면서 “원상복구가 어려운 정도다”며 “전체 리모델링 수준으로 (복구) 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복구액만 100억원인데…화재 원인 ‘오리무중’


경찰·소방당국에 따르면 화재는 지난 18일 오후 2시쯤 학교 본관 1층 쓰레기 분리수거장 바로 옆 창고에서 시작했다. 불은 삽시간에 지상 5층 규모 본관 건물을 집어삼켰다. 불길은 학교 건물 9800㎡와 자동차 19대와 내부 기자재 등을 휩쓸고, 약 1시50분이 지나서야 꺼졌다.

경찰과 소방당국은 합동 감식을 진행했지만, 뚜렷한 원인을 찾지 못했다. 경찰 관계자는 “감식 과정에서 실수나 고의로 불을 낸 인위적 요인은 발견되지 않았다”며 “흡연이나 자연 발화 등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고 수사 중”이라고 했다.

통영=안대훈 기자 an.daeh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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