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척 단신 전봉준에 집중되는 희망과 기대
2024년이 동학혁명 130주년이다. 처음엔 '반역'에서 동학란으로, 또 그사이 동학농민전쟁이었다가 백 주년에서야 비로소 ‘동학농민혁명’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름 하나 바꾸는데 백 년이란 시간이 필요했다. 동학혁명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가? 혁명에 참여했던 오지영 선생이 지은 <동학사> 한 권을 들고 전적지를 찾아다니며, 그 답의 실마리나마 찾아보려 한다. 우리를 되돌아보는 기행이 되었으면 한다. <기자말>
[이영천 기자]
1980년 5월 광주처럼, 1894년 1월의 고부도 해방구였다. 해방구는 축제다. 숨쉬기조차 힘든 악정이 걷히니 고을이 자유분방함으로 술렁인다. 뒤이어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른다. 하얀 연기가 '고부는 해방구'라 외친다.
모두 같이 나누는 음식에 봉기가 축제로 승화한다. 버짐 핀 얼굴에 굶주린 어린아이의 뜀박질이 신호탄이다. 앙상한 갈비뼈가 드러난 강아지도 덩달아 신이 난다. 굶주린 사람들이 모여들고, 늘어선 무쇠솥에 빼앗긴 쌀로 지은 흰 쌀밥이 그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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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부 읍내 1894년 1월 농민군의 봉기로 해방구를 맞았을 고부 읍내. |
ⓒ 이영천 |
억울하게 징발당한 세금을 다시 되돌려 받는다. 나라 창고를 열어 가난한 백성에게 곡식을 골고루 나눠준다. 항시 빼앗기기만 하던 농민들이 어리둥절하다. 진정 새 세상이 왔는지 아직은 실감하지 못한다. 그러함에도 빼앗긴 것을 되찾은 기쁨에 감격해한다.
어리숙할망정 횃불 든 봉기군도 군대다. 이에 고부 백성이 자발적으로 동조한다. 봉기군에게 필요한 소소한 일용품이 답지한다. 부자들은 눈치껏 돈과 곡식을 내놓는다. 군막 주변으로 급하게 세워진 여러 장막이 장터를 방불한다.
끼니마다 몰려드는 가난한 백성에게 쌀밥을 지어 배불리 먹이고, 여기저기 풍물패와 창의기를 앞세운 행렬의 신명으로 해방구를 실감한다. 서로를 위하며 나누고 치하하는 모습이 모두 한 식구 같은 흐뭇한 모습을 연출해내고 있다. 같이 살고, 같이 이루며, 같이 나누는 대동 세상이 바로 이런 모습 아닐까?
만석보를 헐자
날이 밝자 백성들은 밤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곧장 알아차린다. 봉기군이 붙인 방문 내용으로 이를 확인한다. 봉기군 지휘부는 가장 먼저 만석보를 헐자는 결의를 하고, 배들 농민이 이를 주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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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석보 자리 고부 봉기의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만석보가 있던 자리. |
ⓒ 이영천 |
얼음장 같은 땅이 곡괭이에 파헤쳐지고, 굵은 소나무로 만든 둑이 해체되어 나간다. 낡아 악랄해진 구체제가 밑에서부터 하나씩 해체되는 모습의 재현이다. 흙을 다루는 일이라 고되지만, 힘들여 만들 때와는 정반대의 기분으로 스스로 하는 일이어서 많은 시간이 걸리진 않는다. 고부 봉기의 상징인 만석보가 헐리면서, 봉기군은 도탄에 빠진 나라를 구하고 폭압적인 정부를 전복시키겠다는 선전포고를 하게 된 셈이다.
이런 축제 같은 분위기 이면에 언젠가 관군과 전투를 치러야만 한다는 무거운 비장감이 소리 없이 흐른다. 봉기군 지휘부는 대비책에 골몰한다. 백성은 물론 오합지졸에 불과한 봉기군마저 고부성 함락이 가져온 소소한 승리에 만족하는 분위기다. 그렇지만 전투는 엄연한 현실이다. 어떤 방식이건 관군의 공격은 이뤄질 것이기 때문이다.
전봉준의 가장 큰 고민은 봉기를 혁명으로 바꿔낼 역량을 갖췄냐는 점이다. 또한 그럴 계기가 생길지도 불분명하다. 전주와 한양을 점령하자는 건 이미 사발통문에서 약속한 내용이다. 그러자면 봉기를 오래 끌고 가야 한다. 이는 곧 백성 자치를 뜻한다. 그러려면 백성의 군대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선 물적 토대는 물론이고 의식에도 혁명적 변화가 뒤따라야 한다. 모든 게 절실하기만 하다.
다시 말목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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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목장터 사거리 X자 모양으로 난 사거리를 잘 표현하고 있는 이정표. 봉기군은 고부성을 점령한 이틀 후 말목장터로 진(陣)을 옮긴다. |
ⓒ 이영천 |
이에 개활지이며 곳곳으로 군대 이동이 가능한 말목장터가 전투에 능하지 못한 봉기군에게 적합하다 판단했다. 군인도 젊은 사람 위주로 정비하고 군율을 세워 전투를 위한 기초 군사훈련을 병행한다. 장사치를 비롯한 잡다한 움막을 군막과 분리하여 경계를 분명히 한다. 지휘체계를 정비하고 군량미도 규율 있게 관리한다. 그러고 나니 겨우 군대의 꼴을 갖추기 시작한다.
이때 전주 감영군의 작은 공격이 이뤄진다. 조병갑과 동류인 전라감사 김문현은 봉기 사실을 조정에 보고할 처지가 아니다. 그가 보낸 감영군 군위가 군졸 몇을 데리고 사자(使者) 자격으로 말목으로 와, 장계를 올리면 정부군과 싸움이 된다며 겁박한다. 봉기군은 조병갑을 옹호한 감사가 조정에 장계를 올리지 못한다는 점을 간파한다. 그러면서 조병갑은 물론 균전사 김창석과 전운사 조필영의 처벌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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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목장터 이평면 면사무소 앞의 말목장터. 평야에 불거진 낮은 구릉 위에 장터가 있었다. |
ⓒ 이영천 |
군대로서 봉기군은 오합지졸이다. 가장 큰 약점은 무기다. 정부군은 신식 양총을 지니고 있다. 다음이 훈련이다. 전투는 물론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무엇보다 군대로서 사기와 정신 무장이 관건이다. 봉기군으로 나선 농민이 '관의 탈을 쓴 강도의 수괴가 임금'이라는 점과 '봉기 최종목적이 왕을 죽이는 것'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얼마나 절절하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는 불분명하다. 문화행사가 이를 각인하는 유일한 통로일 뿐이다.
또한 관군과의 첫 전투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첫 전투의 패배는 말 그대로 궤멸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에 기초 훈련과 전투를 대비한 전술 훈련이 집중적으로 이뤄진다. 아울러 우군이 필요했다. 전봉준은 간절한 마음으로 전라도 각지 동학당에 봉기를 독려하는 격문을 보낸다.
백산(白山)의 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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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산 동진강에서 바라 본 백산. 사진의 바로 앞이 화호나루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다. |
ⓒ 이영천 |
산이 앉은 곳은 흥덕에서 흘러온 고부천이 동진강에 합류하는 삼각점이다. 부안과 곰소만의 물산이 전주로 향하는 교통과 물산이 모이는 화호나루가 지척이다. 따라서 나루를 장악하면 전주로 향하는 교통은 물론 정보와 물류를 통제할 수 있다.
봉기 보름째, 다시 백산으로 진을 옮긴다. 인근에 밀집된 마을이 적다는 점이 우선시 되어서였다. 백산으로 진을 옮긴 가장 큰 이유 역시 군사상 목적이다. 사방으로 트여 있어, 관군의 공격에 효과적으로 대비할 수 있는 입지이기 때문이다. 봉기군은 백산 정상에 지휘소를 세운다. 군대 직급도 새롭게 조정하여 지휘체계를 정비함은 물론 만약의 전투에 철저히 대비한다. 군대 규율을 엄히 하고 민간인 장막과 군막을 철저히 분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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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산정상에서 본 동진강 백산 정상에서 바라 본 동진강과 배들의 모습. 사진 우측 보를 막은 곳 인근이 화호나루가 있던 곳으로 추정한다. |
ⓒ 이영천 |
백산 봉우리에 단을 쌓았다는 말이 전한다. 단 위에 봉화대를 만들어 밤낮을 가리지 않고 화톳불을 피웠다는 내용이다. 불을 피운 건 꺼지지 않는 투쟁 의지를 수십 리 밖에까지 알리려는 의도다. 불이 타오르는 한 봉기군이 건재하다는 표식이다. 백성의 열망과 봉기군이 지향하는 목적을 상기시키는, 밤낮으로 타오르던 불빛이다.
전라감사 김문현은 별다른 대비책 없이 봉기군이 제풀에 꺾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상황은 반대로 흘렀다. 군대로서 면모를 다져가는 봉기군을 보니 불안하기만 하다. 정탐꾼들이 물어오는 정보도 불리한 것들뿐으로, 봉기가 길어질수록 자신의 자리마저 위태롭다 느낀다. 그도 한계에 다다른다.
조정에 장계가 올라가고, 봉기 35일째인 2월 15일 정부는 조병갑을 파직하고 김문현은 감봉 3개월에 처한다. 그리고 용안 현감 박원명을 고부군수로, 장흥 부사 이용태를 안핵사로 임명한다. 악마의 재등장이다. 이로써 두 달 남짓 해방구를 맞았던 고부 하늘에, 시커먼 먹장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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