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휴일] 나는 내일부터

2024. 3. 21.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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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지하철부터 탔군요
미워하기 적합한 곳이네요
매일 지옥을 찾는 사람들처럼
창밖에 시신을 둬야겠군요
지옥은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는 없고
지옥은 너무나 간편하군요
창밖을 보면 창 안의 내가 보이고
창밖은 모르는 얼굴뿐
지하로 내려가는 일이 익숙해서
큰일이군요 기껏 태어났는데
일생의 절반이 지하라서
내일부터는 좀 걸어야겠네요
건강하기 위해선 걷기가 필요하고
걷기 위해선 걷는 몸이 필요하군요
지옥에선 불필요하지만
내일은 모르겠어요
어제의 내가 나간 출구가
생기고 없어지길 반복하는데
없어진 출구가 벽이 되고
거기 등 기대는 몸도 있군요
미워하기 위해
미워할 몸부터 찾는 사람처럼
모르는 얼굴들과 함께
욱여넣어지는 것이 익숙하군요
때로 아는 사람을 만나면
반가울 수가 없네요
그러나 다행히 나는 내일부터
내가 아니기로 했군요
낮도 없고 밤도 없는 지하
내가 빠져나갈 출구로 어깨를
비집고 들어오는 몸이 있고
오늘은 지하에서 튀어나와
아는 사람 없는 거리를 걷는데요
모르는 사람이 말을 걸 때도 있군요
그거 아세요?
지금 당신 등에 어떤
할아버지가 업혀 계세요
아 네 그럼요
저희 할아버지인걸요
할아버지가 저보다 저를
참 아끼셨답니다

--한재범 시집 '웃긴 게 뭔지 아세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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