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의 독선이 말할 자유 막고 있지 않나
르네 피스터 지음, 배명자 옮김
문예출판사, 232쪽, 1만7000원
영어권 최고 문예 교양 잡지인 ‘뉴욕리뷰오브북스’의 편집장 이안 부루마는 2018년 한 기사 때문에 쫓겨났다. 성추행 혐의로 20명 넘는 여성으로부터 고발당했으나 무죄 판결을 받은 지안 고메시의 사연을 보도한 게 편집팀 내부의 반발을 샀다. 온라인에서도 비판이 쏟아지자 회사는 보도 취소, 사과와 함께 브루마를 해고했다.
버클리 캘리포니아대학 생명과학 학부는 2018/2019년 교수 5명을 모집했다. 894명이 지원했는데, 53.7%가 백인이었다. 선발 첫 단계의 기준은 오로지 (인종적) 다양성이었다. 두 번째 단계에서 비로소 자격을 심사했다. 2단계를 통과한 지원자 중 백인은 13.6%에 불과했다.
2018년 독일 베를린의 앨리스살로몬대학은 대학 건물 정면에 적힌 오이겐 곰링어의 시를 없애기로 했다. “가로수/가로수와 꽃/꽃과 여자/가로수/가로수와 여자/가로수와 꽃과 여자 그리고/숭배자.” 여기서 ‘숭배자’를 성추행범으로 해석한 여학생들의 비판이 있었다. 시의 고전으로 여겨지던 1950년대 작품이 21세기 페미니즘의 잣대를 들이대자 갑자기 문제가 됐다.
독일의 진보적 시사주간지 ‘슈피겔’의 워싱턴지국장인 르네 피스터(50)는 ‘잘못된 단어’에서 인종차별 반대, 소수자 보호, 페미니즘, 정치적 올바름 등 이른바 정의의 이름으로 벌어지는 폭력을 고발한다.
“우파 포퓰리즘만이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게 아니다. 인종차별 반대, 소수자 보호라는 이름으로 표현의 자유, 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이념, 누구도 피부색이나 성별로 차별받아선 안 된다는 헌법 등 민주주의 기본 원칙을 무시하려는 독단적 좌파도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한다.”
저자는 차별에 맞서고 소수자를 옹호하는 진보 이데올로기의 긍정적 기능을 부정하진 않는다. 하지만 자신들만 옳고 이견과 반대를 압살하려는 독선적 태도가 문제라고 본다. 인종차별주의와 싸워야 하지만 모든 백인 미국인을 인종차별 시스템의 공범자로 보는 게 옳은가? 미국 대학의 적극적 우대 조치(소수자 특별 지원)는 1960∼1970년대라면 완전히 정당했을 테지만 오늘날에도 필요한가? 몇몇 미투 운동이 무죄추정의 원칙이라는 법치주의의 초석까지 흔드는 걸 용인해야 하는가? 생물학적 성이 둘이라는 생각을 국가가 나서서 지워야 할까? 저자는 이런 질문들을 통해 지금 유행하는 진보 이데올로기에서 논쟁할 지점들이 적지 않다고 말한다.
하지만 현실에선 진보 이데올로기가 절대적 선이 되어 대학, 언론, 정치 등의 영역에서 검열과 위협으로 작동하고 있다. 저자는 이런 극단적 흐름이 사람들의 입을 막고 있다며 민주주의의 위협으로 묘사한다.
“누구의 주장이 가장 강력한지 겨루고 다투고 타협하는 능력이 민주주의 핵심이다. 그런데 정체성 정치는 자신의 견해를 절대화한다. 그런 식으로 진보적 관심사를 관료화하여 민주적 토론을 거치지 않는다면 그 결과는 정치발전이 아니라 사회분열이다.”
저자는 인종, 여성, 소수자 등을 주된 의제로 삼는 진보진영의 ‘정체성 정치’는 진보를 소수화한다는 점도 지적한다. 민주당은 생활과 경제 문제 대신 차별이나 정의 문제에 치중하면서 그들의 오랜 지지층이었던 노동자들의 보편적 인식과 감정, 생활로부터 분리되고 있다. 이제 민주당은 젊고 부유한 고학력 엘리트들이 지지하는 정당이 되었다.
정체성 정치는 또 거대한 반대파를 형성시키며 정치를 진창에 빠뜨려 놓았다. 정치적 올바름을 조롱하고 정의를 위선이라고 욕하는 극우·막말의 대안적 담론장이 창출되었고, 그 속에서 트럼프 같은 극우 정치세력이 탄생했다.
이것이 미국에서만 일어나는 일일까. 근래 한국에서도 자주 벌어지는 일이다. 저자가 강조한 대로 민주주의는 말할 자유가 핵심이다. 입을 막는 것은 민주주의도, 정의도 아니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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