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꾼-바람둥이-장수왕, 조선 국왕들의 은밀한 사생활
[이준목 기자]
조선(朝鮮)은 '기록의 왕국'으로도 불린다. 조선 왕조가 자신들의 역사를 편찬한 사서인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은 그 규모가 총 1707권, 분량은 한자로 약 5천만 자에 이르며, 정부 공식업무일지에 해당하는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오늘날의 대통령비서실)는 총 3243권에 약 2억4천만 자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을 자랑한다.
선조들의 노력으로 전해진 이러한 기록들로 인해 우리는 당대 조선 국왕들의 성격과 일거수일투족은 날씨, 사회상까지 세세하게 알 수 있게 됐다. 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과거의 역사를 더 잘 이해하고 연구할 수 있게 되었으며, 한민족의 역사를 대표하는 위대한 세계기록유산으로 남았다.
20일 방송된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에서는 100회 특집으로 '정조의 건배사, 영조의 건강비결? 조선 왕들이 감춰둔 5가지 비책 대공개' 편을 다뤘다.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의 공식 기록을 인공지능(AI)으로 분석하여 조선 국왕들의 진면목과 비하인드 스토리를 조명했다.
'유학의 나라'인 조선에서 역대 국왕들은 의무적으로 평생 학문에 매진해야했다. 그런데 조선 국왕들이 학문만큼 무예도 중시했다는 것은 그리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강무(講武)은 국왕이 공식적으로 사냥을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강무의 한자는 '배울 강'에 '무예 무'자로 무예를 익힌다는 뜻이다. 국왕에게 사냥은 단순히 놀이가 아니라 군사훈련의 의미를 겸한 수렵행사였다. 실록에서는 수렵이나 사냥이라는 키워드와 관련된 내용만 무려 2,832건이나 등장한다.
실록에서 나타난 역대 조선 국왕 중 가장 사냥을 즐겼던 인물은 3위 태종 이방원(3대), 2위 세조(7대)다. 태종은 특히 매(鷹)을 이용한 사냥을 즐겼고, 사냥을 위한 매를 전문적으로 사육하기 위하여 응방(鷹房)이라는 관청까지 두었다.
손자인 세조 역시 매와 사냥을 무척 좋아했고 언제든 사냥을 나갈 수 있도록 항상 활과 화살을 몸에 지니고 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특히 호랑이 사냥을 광적으로 좋아했던 세조는 직접 잡은 호랑이만 13마리에 이르며, 호랑이 사냥으로 이름을 떨친 한 사냥꾼을 신분제마저 무시하며 자신의 겸사복(국왕의 호위병)으로 특채발탁한 사례도 있었다.
그런데 사냥왕 1위는 의외로 조선을 대표하는 성군이자 학구파 이미지가 강한 세종(4대)이었다. 그는 재위기간(32년)도 길었지만 연 평균으로 쳐도 24회로 거의 한달에 두 번꼴로 사냥을 나가며 아들 세조(22회)와 아버지 태종(14회)를 제쳤다.
사실 세종을 본의 아닌 사냥왕으로 이끈 것은 바로 아버지 태종이었다. 아들 세종이 육류를 좋아하고 움직이는 것을 싫어해서 점점 살이 찌는 것을 걱정한 태종은, 자신이 사냥을 나갈 때마다 강제로 세종을 데리고 나가기를 즐겼다고 한다. 태종은 심지어 상왕에 오른 후에도 '주상(세종)이 함께 가지 않으면 자신도 사냥을 나가지않겠다'고 종종 고집을 피워서 세종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사실 세종은 사냥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지만 울며겨자먹기로 아버지를 따라나설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태종에게 사냥만큼 못말리는 또다른 취미는 '바람'이었다. 물론 왕조국가에서 자손을 낳는 것은 국왕의 중요한 업무이기도 했지만, 태종은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 데 큰 힘이 된 정비 원경왕후와의 사이에서 이미 세종 등 여러 자식까지 낳은 상태였음에도 즉위 후에 여러 후궁을 들이는 데 열을 올렸다.
태종은 조선 역대 국왕 중에서도 가장 많은 무려 18명의 후궁을 두었으며 이 중에는 기생 신분의 가희아처럼 신분 제도상 절대 후궁이 될 수 없는 인물도 포함되어있었다. 태종은 공식적인 자식만 29명(12남 17녀)를 얻으며 조선 역대 '다산왕'에도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다만 비공식적으로 가장 많은 후궁을 둔 인물은 '폭군의 대명사'인 연산군(10대)으로 추정되고 있다. 여색을 밝히기로 유명했던 연산군은 공식적으로 기록된 후궁만 10명이었지만, 실제로 왕의 승은을 입거나 실록에 기록되지 않은 여인까지 더하면 최소 20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연산군은 궁녀나 사대부가의 여인들을 무수히 겁탈하는가 하면, 여인들을 강제로 징집하여 기녀를 의미하는 운평(運平), 흥청(興淸)이라는 명칭으로 부르며 환락을 즐긴 일화로 유명하다.
연산군의 아버지 성종(9대)은 아들과는 달리 성군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주요순(晝堯舜) 야걸주(夜桀紂)라는 별명으로도 유명했다. 중국에서 요순은 성군, 걸주는 폭군의 대명사로 각각 불리우는 인물이다. 성종이 낮에는 요순과 같은 성군이지만, 밤에는 걸주와 같은 호색한으로 바뀐다는 의미다.
실제로 성종은 총 12명의 후궁을 두었고 자녀는 태종 다음으로 많은 무려 28명(16남 12녀)에 이르렀다. 아들 연산군이 능력은 아버지에 미치지 못했지만, 호색한의 기질만큼은 어느 정도 물려받았음을 짐작케하는 기록이다.
반면 후궁이 아예 없었던 국왕들도 존재한다. 조선을 이어받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국왕이던 순종(27대)은 실권없이 평생을 일제의 허수아비로 살아야했던 사정상 후궁을 둘만한 상황이 되지못했다.
경종(20대)은 젊을 때부터 병약했고 재위 4년 만에 일찍 사망하면서 후궁을 두지 못했다. 경종의 건강문제와 관련해서는 한 충격적인 야사가 전해진다. 생모 장희빈은 남편 숙종에게 사약을 받고 죽기 직전에 곁에 있던 아들 경종에게 "나를 이렇게 만든 이씨 집안의 대를 끊어놓겠다"고 저주하며 경종의 성기를 잡아뜯었다고 한다. 중상을 입은 경종은 이후 자식을 낳을 수 없는 몸이 되었고, 이복동생인 영조를 후계자로 지목할 수밖에 없었다.
현종(18대)은 엄청난 '애처가' 혹은 '공처가'였다는 소문이 있다. 기록에 따르면 현종이 후궁을 전혀 두지 못한 진짜 이유는 본인의 의지가 아니라 아내인 명성왕후의 눈치를 봤을 가능성이 높다는 게 학계의 의견이다. 명성왕후는 조선의 역대 왕비중에서도 질투심이 많고 고집이 세며 권력욕이 강한 것으로 손에 꼽히던 인물이었다.
명성왕후는 아들 숙종이 궁녀인 장희빈에게 홀딱 반하여 사랑에 빠지자, 장희빈의 기질과 위험성을 일찍이 간파하고 그녀를 한때 궁에서 쫓아내기도 했다. 실제로 명성왕후가 사망한 후 궁으로 다시 돌아온 장희빈은 인현왕후를 몰아내고 숙종과 함께 환국정치의 중심에 서게 된다. 온화한 성격으로 알려진 아버지 현종과는 달리, 숙종이 다혈질에 변덕이 심하고 고집불통의 성격을 지니게 된 것도, 바로 어머니 명성왕후의 기질을 이어받은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과도한 업무와 부담에 시달려야했던 조선 국왕들의 대표적인 스트레스 해소법은 '술'이었다. 조선 국왕들은 자주 공식적인 연회를 열고 술자리를 가졌는데 이는 곧 신하들과 소통의 자리이자 정치활동의 연장선이기도 했다.
세조는 실록에 따르면 14년의 재위기간 동안 공식적으로만 총 467회의 술자리를 가지며 압도적인 격차로 조선 '회식왕' 1위에 등극했다. 세조는 수시로 대소신료들을 모아놓고 주연을 베풀었고 대신들에게 짓궃은 장난을 치며 벌주를 먹이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계유정난과 피의 숙청을 통하여 조카 단종과 정적들을 제거하고 왕위에 오른 세조는, 신하들과 결속을 다지고 한편으로는 그들의 충성을 시험해보기 위하여 일부러 술자리를 자주 이용했던 것이다.
그런데 세조는 이러한 술자리에서 '하극상'으로 종종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원로대신이었던 정인지(1396~1478)가 만취하여 왕실 종친과 대소신료가 모두 참석한 연회에서 임금인 세조를 너(汝)라고 호칭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임금을 능멸한 불경죄로 중형을 받을 수 있는 사건이었다.
사실 정인지는 이외에도 세조에게 여러 차례 불경한 취중실언을 저질러 물의를 빚었었다. 하지만 세조는 그때마다 "술버릇을 문제삼을 수 없다"며 너그럽게 용서했다. 친형제마저도 죽이던 세조의 잔혹한 성정을 감안하면 의외지만, 정인지는 세조의 등극을 지지해준 공신인데다 권력에 위협이 되지 않는 원로에 불과했기에 관대한 처분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정인지보다도 더 심각했던 술주정 에피소드는, 신숙주(1417-1475)가 세조의 팔을 꺾은 사건이었다. 어느날 술에 만취한 세조가 총애하던 공신인 신숙주의 팔을 잡고 비트는 장난을 치면서 "어디 경도 내 팔을 비틀어보라"는 농담섞인 명을 내렸다. 그러자 역시 인사불성이 되어있던 신숙주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곧바로 세조의 팔을 힘껏 잡아 비틀며 충실하게 왕명을 이행했다. 놀란 세조는 비명을 내질렀고 연회에 참석했던 모든 이들의 안색이 일제히 변했다.
속으로 뒤끝이 남았던 세조는, 연회가 끝난 후 신숙주의 집에 은밀하게 사람을 보내어 상황을 염탐하게 했다. 신숙주의 집에 불이 꺼져있다면 만취하여 잠든 것이고, 불이 켜져 있다면 취하지 않은 것을 의미했다. 의심 많은 세조는 신숙주의 행동이 자신에게 일부러 불경을 저지르려는 의도가 아닌지 확인한 것이었다.
그런데 하필 신숙주는 평소에 아무리 술을 마셔도 자기 전에 책을 읽다가 잠드는 습관이 있었다. 이를 걱정한 한명회(1415~1487)는 신숙주에게 오늘 만큼은 무조건 불을 끄고 일찍 잠자리에 들라고 신신당부했다. 신숙주는 한명회의 조언대로 그날만은 일찍 잠자리에 들었고, 보고를 받은 세조는 그제야 신숙주가 만취하여 저지른 단순한 실수로 판단하고 의심을 거뒀다고 한다.
한편 정인지-신숙주와는 정반대의 술자리 매너로 세조의 눈에 든 인물도 있었다. 정3품 이조참의였던 어효첨(1405년-1475년)은 다른 신하들과 달리 술자리에서 아무리 만취해도 꼿꼿한 모습을 유지하며 결코 실수하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이에 세조는 어효첨을 크게 칭찬하며 단숨에 이조판서로 승진까지 시켜줬다. 오늘날로치면 행정안전부 실장급이 차관도 거치지 않고 바로 장관으로 특진한 셈이다.
세조의 아버지 세종(91회)과 할아버지 태종(161회) 역시 회식 마니아로 유명했다. 부자관계가 돈독했던 태종과 세종은 술자리에서 흥이 오르자 함께 춤을 추기도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하지만 순수하게 술자리 자체를 좋아했던 태종-세조와 달리, 세종의 술자리는 정치-외교적인 업무와 관련된 행사에 가까웠고, 주량도 약한 편이었다. 세종은 술을 너무 좋아하는 윤회(1380-1436)라는 신하가 지나친 과음으로 건강을 해칠 것으로 우려하여 '하루에 석 잔만 마시라'는 엄명을 내리기도 했다. 그러자 윤회는 일반적인 술잔 대신 거대한 놋그릇에 석잔을 부어마시는 것으로 교묘히 왕명을 피해가는 꼼수를 쓰기도 했다고 한다.
술을 너무 좋아하고 술버릇도 고약했던 대표적인 임금으로는 정조(22대)가 있다. 그의 취미이자 대표적인 술버릇은 바로 신하들에게 '강제로 술먹이기'였다. 정조는 술을 잘 못하는 정약용(1762-1836)에게 도수가 무려 70도에 이르는 독한 소주를, 바가지 크기와 맞먹는 옥필통에 가득 담아 강제로 다 마시라는 엄명을 내리기도 했다.
또한 정조는 항상 '불취무귀(不醉無歸)'라는 건배사를 즐겨 사용했는데 한마디로 신하들에게 "취하지 않고는 집에 돌아가지 못한다'는 엄명이었다. 다만 건배사의 이면에는 그만큼 백성들이 안심하고 흠뻑 취할 수 있는 풍요롭고 행복한 세상을 만들겠다는 정조의 염원이 담겨있기도 했다.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장수왕'은 역시 영조(21대)다. 과로와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국왕들의 평균 수명이 환갑을 넘기는 경우가 드물었던 조선 시대에 영조는 30대의 다소 늦은 나이에 즉위하고도 무려 52년을 재위하며 83세까지 살았다. 태조(74세). 고종과 광해군(67세)을 제치고 재위기간-수명 모두 역대 조선 국왕 중 으뜸이었다.
영조의 장수비결은 건강한 식습관과 철저한 자기관리였다. 어릴 때부터 왕실 권력투쟁의 살얼음판 위에서 성장해야했던 영조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하여 건강관리에 각별한 신경을 썼다. 영조는 항상 소식(小食)과 채식 위주의 식단, 규칙적인 식사시간을 준수했고, 마통차(馬通茶) 등 건강음료를 즐겨 마셨다.
조선시대의 국왕의 건강검진을 입진(入診) 혹은 진후(診候)라고 하였는데, 실록에서 영조가 어의로부터 진찰을 받았다는 관련 기록만 약 7천 회에 이르며, 다른 왕실구성원들이 포함된 기록을 더하면 약 2만 건에 육박한다.
조선의 국왕들은 건강관리를 위한 보양식으로 소의 젖을 짜서 만든 타락죽, 사슴꼬리인 녹미 등을 즐겨먹었다. 특히 고기 마니아로 유명했던 세종은 조선식 프라이드 치킨이라고 할 수 있는 포계(炮鷄)를 유독 좋아했다고 한다. 하지만 "고기가 없으면 밥을 안 먹는다"고 할정도로 과도한 육류 섭취와 운동부족으로 인해 세종은 말년에 들면 각종 성인병과 합병증으로 고생을 해야만했다.
지난 2022년에 첫 방송을 시작한 <벌거벗은 한국사> 는 쉽고 재미있는 한국사 이야기로 시청자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으며 어느덧 100회를 맞이했다. tvN STORY에서 제작된 프로그램중 100회를 돌파한 프로그램은 <벌한국>이 사상 최초다.
지난 1월에는 '2024 대한민국 퍼스트브랜드 대상'에서 교양 부문을 수상하며 인문학과 한국사를 대표하는 프로그램으로서의 위상을 증명했다. 같은 땅 위에서 살았던 선조들의 삶을 이해하고, 과거를 통하여 더 나은 현실을 살아갈수 있는 교훈을 얻는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꾸준히 사랑하고 관심을 가져야하는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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