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은수의 책으로 읽는 세계]'사이다'엔 정치가 없고 '폭언'엔 민주주의가 없다
대부분 허언·폭언으로 나타나
국내 정치 폭언에 사로잡혀
대화 통한 협상 막고 사회 분열
세상엔 이른바 ‘사이다 발언’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 속이 뻥 뚫리는 말, 가슴이 탁 트이는 행동은 우리 마음에 기이한 열광을 불러일으킨다. 지도자의 한마디에 켜켜이 쌓였던 사회적 모순이 해소되고, 사악하기 짝이 없는 적폐들이 사라지며, 답답하고 괴로웠던 억울함이 한순간 증발하는 기적은 확실히 우리를 매혹한다. 그러나 ‘사이다’가 정치를 지배하는 건 민주주의가 위기에 빠져 있다는 뚜렷한 증거다.
정치에서 ‘사이다 발언’은 대부분 허언이나 폭언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루어지지 못할 일을 약속해서 사람들을 흥분시킨 후 나중에 그럴듯한 변명을 늘어놓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거짓으로 부풀린 기대가 실망으로 가라앉는 일이 반복되면, 냉소와 환멸이 시민들 마음을 사로잡는다. 공적 약속인 공약(公約)을 헛된 약속인 공약(空約)으로 변질시키는 자들이 의회를 지배할 때, 정치는 허언증 환자들의 놀음이 된다.
한국정치학회에 따르면, 지난 국회의원 선거에서 지역구 의원들이 내세운 공약은 모두 1만4119개, 달성률은 18.5%에 불과했다. 절반 이상은 아예 달성치 못할 약속이거나, 착수조차 되지 않았다.
폭언의 정치는 더욱 심각하다. 유튜브나 페이스북 같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는 ‘우리 편 편향’에 사로잡혀서 나는 무조건 옳고, 너는 무조건 틀렸다는 식의 발언들로 넘쳐난다. 이들은 명확한 사실을 외면하고 거짓을 퍼뜨려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정치적 반대자에 대한 보복과 탄압을 소리 높여 외친다. ‘사이다 발언’은 대체로 폭언과 망언의 연속체에 가깝다.
요즘 우리는 거대 양당 후보가 선정되는 과정에서 폭언을 정치의 통화로 삼았던 이들이 ‘떡상’해서 공천장까지 받는 걸 볼 수 있었다. 이들 중 몇몇은 시민 사회의 강력한 반발 탓에 공천 취소가 되었다. 그러나 한둘이라도 당선돼 의회에 진입하면, 우리는 극단적 소수가 침묵하는 다수를 압박하는 사태를 볼 것이고, 폭언과 막말로 점철된 저열한 발언이 의회를 더럽히는 꼴을 볼 것이다. 현역 의원의 국회 발언은 모두 속기록에 나와 있고, 다른 출마자도 인터넷이나 SNS에 흔적이 남아 있다. 폭언의 민주주의를 몰아내고 싶다면, 투표 전에 한 번쯤 찾아서 읽어보면 좋을 것이다.
‘사이다 정치’는 근원적으로 현대 민주주의의 기본 전제를 무너뜨린다. 영국 정치사상가 토머스 홉스가 ‘리바이어던’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정치는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을 억제하려는 노력에서 시작됐다. 홉스가 살았던 시대는 유럽 전역이 종교와 이념에 따라 찢어져서 서로를 죽이고 죽는 전쟁이 거듭되던 시기였다. 전쟁의 참혹한 폐허를 숱하게 목격한 홉스는 내전을 억제하고 평화를 실현하는 데 정치의 본질이 있다고 보았다. 그러려면 시민 사회 전체가 자기 보존 욕망을 억제하고, 권리를 양보해서 함께 서로를 통치하는 공동권력을 수립하는 게 필요했다.
‘리바이어던’ 표지엔 거대하고 강력한 지배자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이 지배자는 모든 걸 홀로 판단해서 결정하고 강요하는 신과 같은 존재가 아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지배자의 몸을 이루는 건 수많은 시민이다. 홉스에게 정치란 평등한 시민들이 사회 계약을 통해서 한몸을 이루는 방법이다. 이는 현대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준다.
이단 심판과 십자군 전쟁이 잘 보여주듯, 중세적 정치는 선을 실현하고 악을 박멸하는 신적 정의의 실현 과정이었다. 이런 세계관에 빠진 이들은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수 없다. 이들에게 다름은 비진리, 거짓, 사악함이고, 모든 고통과 불행의 원인이다. 따라서 중세 정치는 생각 다른 이들을 제거하거나 추방하지 않고는 사회의 안녕과 평화가 실현되지 않는다고 여겼고, 기꺼이 그들을 이단으로 몰아서 불에 태우거나 물에 빠뜨려 죽이곤 했다.
중세인은 정치를 선악의 문제로 바라본다. 악과 타협하는 건 신을 배신하는 일과 같으므로, 이들은 생각 다른 사람들과 최후의 그날까지 무한 전쟁을 피할 수 없다.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우리는 선과 악의 갈등 한가운데 서 있다"고 말했을 때, 그는 세계 정치와 외교를 퇴행시켰다. ‘악의 축’과는 절대 타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슬람을 악으로 규정하는 속 시원한 발언 탓에 지난 20년 동안 세계는 안정과 평화를 잃고 테러와 전쟁의 길로 접어들었다. ‘사이다 발언’을 쏟아내는 폭언의 정치가들도 우리를 같은 함정으로 몰아간다.
‘사이다 정치’는 막말을 쏟아내 과도한 감정을 일으키고, 쓸데없는 분란을 조장한다. 이들의 입을 거치면 복잡한 문제는 단순해지고, 현장의 미묘한 뉘앙스는 무시되며, 현실은 선악의 프레임으로 갈라진다. 이런 막말에 중독되어 ‘빠’로 전락한 사람들은 대화와 타협을 통한 계약, 즉 합리적 증거에 바탕을 둔 정중한 토론, 상대를 인정하고 배려하면서 이루어지는 협상이라는 현대 정치의 기본 원리를 망각하고 정치를 중세적 이단 심판으로 여긴다. 이는 나와 생각 다른 상대를 악마화해 사회를 분열시키고 정치를 양극화하는 내전 상태를 일상화한다. 이들은 그 악마가 함께 삶을 나누는 옆집 사람, 직장 동료라는 것을 잊게 만든다.
현재 우리는 불행히도 폭언의 정치에 사로잡혀 있다. 그들의 불 같은 말들은 민주적 규범에 대한 존중이 없고, 대화를 통한 협상을 거부하며, 구체적인 실행 계획이 빠져 있다. 삶에 지친 시민들의 불안을 악용해 선동적 폭언을 쏟아내고, 복잡한 문제에 대한 빠른 해결책을 약속하는 이들은 우리를 포퓰리즘의 지옥에 빠뜨린다. 민주주의란 속이 뻥 뚫리는 속 시원한 해결책에 있는 게 아니라 합의와 조정을 통해 다수가 동의할 수 있되 모두가 약간씩 불만족스러운 통치를 이룩하는 과정이다. 사이다엔 정치가 없다. 다가오는 선거에선 권력이 독점이 아니라 분점임을 망각한 폭언의 정치가들이 사라졌으면 좋겠다.
장은수 출판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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