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압작전 후 미소 띤 사령관, "광주에 포 못 쏜다" 버틴 준장
[정성일 기자]
1980년 5월 광주에서는 5·18 항쟁이 있었고 대한민국 국군에 의해 수많은 광주 시민들이 학살됐습니다. 12.12 군사 반란을 일으킨 전두환 신군부에 의한 학살을 막고자 했던 군인들이 있었습니다.
전투병과교육사령부(전교사) 사령관 윤흥정 중장, 31사단 사단장 정웅 소장, 육군기갑학교장 이구호 준장 등은 신군부의 유혈진압에 반기를 들고 유혈진압을 막기 위해 애썼습니다. 이들 가운데 윤흥정 중장과 이구호 준장이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돼 있습니다.
윤흥정, 발포와 유혈진압을 거부하다
육군사관학교 8기로 임관한 윤흥정 중장은 형제 장군이었습니다. 동생은 윤흥기 준장은 12.12 당시 제9공수특전여단장으로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나선 유일한 특전여단장이었습니다. (관련기사 : 1000만 관객 돌파 '서울의 봄', 정우성 이 대사는 사실입니다 https://omn.kr/26u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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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년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발표한 <12·12, 5·17, 5·18사건 조사결과보고서>를 토대로 구성한 5·18 당시 전라남북도 계엄 지휘 체계 |
| ⓒ 정성일 |
그가 진압지시를 내리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군인들의 시민 폭력 사실을 알고 군복을 입기조차 부끄러워했으며, 공수여단의 발포 허용 요청을 거부하고 강경진압을 중지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이에 신군부는 시위 진압에 소극적인 윤흥정 중장을 해임하고, 22일 새로운 전교사 사령관으로 소준열 소장을 임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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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 15호에 안장된 윤흥정 중장 |
| ⓒ 임재근 |
윤흥정 중장은 1993년에는 정승화, 장태완, 김진기, 윤흥기 장군 등과 함께 12.12 내란범들을 고소했으며, 신군부 세력을 처벌하기 위해 애썼습니다. 2002년 9월 15일 별세한 윤흥정 장군은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 15호에 안장되었습니다.
소준열, 학살 후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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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흥정 중장의 묘 근처 21호에 안장되어 있는 후임 전교사 사령관 소준열 |
| ⓒ 임재근 |
하지만 2018년 5월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이 38년만에 공개한 영상에서 그의 모습이 포착됐습니다. 광주시민들을 진압한 후 도청 현장에 등장하며 환하게 웃고 있었습니다. 그가 공수부대의 과잉 진압을 막고자 했던 인물이었다면, 그런 섬뜩한 미소를 보일 수는 없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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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년 5월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이 38년만에 공개한 영상에서 포착된 미소 짓는 소준열 |
| ⓒ 5·18민주화운동기록관 |
이구호 "국민에게 포를 쏘고 들어갈 수야 있겠습니까?"
이구호 준장은 1980년 당시 광주 육군기갑학교 교장이었습니다. 5월 21일 황영시 육군참모차장은 이구호 교장에게 전화를 걸어 전차를 동원해 광주를 진압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하지만 이 교장은 "우리가 국민에게 포를 쏘고 들어갈 수야 있습니까? 지시는 지휘계통(전교사 사령관)을 통해 주십시오"라고 답변하고 광주시민들을 전차로 진압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당시는 전교사 사령관이 소준열로 교체되기 전이었기에 황영시 차장이 지휘계통을 거치지 않고 이 교장에게 직접 지시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구호 교장이 명령을 따라 기갑학교의 전차를 동원했더라면 광주에서는 더 큰 참상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하지만 부당한 명령을 따르지 않고 국민을 생각했던 이구호 준장 덕분에 더 큰 참상을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황영시 차장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던 이구호 준장은 1981년 강제 예편됐습니다. 이후 그는 홍성직업훈련원, 대전직업훈련원 원장을 잠시 맡았다가 주유소를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주유소의 이름을 '무궁화 주유소'라고 지을 정도로 애국심이 강했습니다.
이구호 준장은 12·12 및 5·18 수사 때 황영시 참모차장의 부당하고 불법적인 지시를 폭로하였지만, 황영시 차장은 "기억나지 않는다. 이 같은 내용을 녹음해 두었다든지 비망록에라도 기재해 두었다면 인정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기억할 수 있겠느냐"며 책임을 회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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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 95호에 안장되어 있는 이구호 준장 |
| ⓒ 임재근 |
정웅 "대한민국의 주인인 국민에게 총을 겨눌 수 없다."
대전현충원 안장자는 아니지만, 당시 윤흥정 중장과 함께 계엄군 지휘관이었던 31사단장 정웅 소장 역시 대한민국의 주인인 국민에게 총을 겨눌 수 없다며, 광주 시민을 향한 발포를 거부했습니다.
신군부의 명령에 따르지 않았던 정웅 장군은 광주가 진압된 직후인 6월 사단장직에서 해임된 후 강제 예편됐습니다. 그는 예편 후 광주학살의 진실을 밝히고 광주시민의 명예를 회복시키고자 무소속으로 국회의원에 출마했지만, 선거를 앞두고 신군부로부터 납치되어 고문받으면서 강제 사퇴했습니다.
이후 민주화추진협의회 부의장, 평화민주당 국회의원 등을 역임하며, 5·18광주민주화운동진상규명위원회 청문회를 통해 신군부의 광주 학살 만행을 폭로했습니다. 이에 신군부는 책임을 회피하고, 되려 광주 학살의 책임을 당시 31사단장이었던 정웅 소장에게 전가했습니다.
하지만 정웅 소장의 무혈진압명령이 정확히 기록된 31사단 전투상보가 발견되면서 진실을 밝힐 수 있었습니다. 2021년 12월 23일 사망한 정웅 장군은 대전현충원에 안장될 예정이었으나 유족들은 정웅 장군의 고향인 순천에 기념관을 건립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여 순천에 있는 선산에 안장돼 있습니다.
1979년 12월 12일 군사반란을 일으켰던 신군부는 1980년 5월 17일 내란을 일으키고 광주학살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사망했지만, 그래도 군인으로서 국민의 생명을 지킨다는 정신이 있었던 윤흥정 전교사 사령관, 정웅 31사단장, 이구호 육군기갑학교장 덕분에 더 큰 참상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전현충원에는 학살을 자행했던 소준열 전교사 사령관, 박준병 20사단장 등이 함께 안장되어 있습니다. 국민을 지킨다는 옳은 군인정신을 바로 잡는 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후손들의 과제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덧붙이는 글 | *참고자료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12·12, 5·17, 5·18사건 조사결과보고서>, 2007. 1995.12.09. 전남일보 1면. 전남대학교 5·18연구소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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