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란 전 대법관 "청탁금지법, 우리 문화 일정 부분 바꿔"
지난해 3월 정부는 '청탁금지법(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김영란법)'에 규정된 음식값 상한액을 3만원에서 5만원으로 상향하는 방안을 검토하다 포기했다. 반대 여론이 높았기 때문이다. 정부는 내수 진작을 명분으로 상향 조정을 검토했지만 국민은 부정의 빌미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걱정했다. 지난 몇 년 사이 권력층의 비리가 잇달아 드러나고 공정과 상식이 사회의 중요 화두로 등장하면서 국민들의 비리 척결에 대한 의지는 높아진 상황에서 정부의 판단이 안이했다. 청탁금지법으로 달라진 국민의 눈높이를 정부가 따라가지 못한 셈이다.
청탁금지법을 입안한 김영란 전 대법관은 지난 18일 창비 서교 사옥에서 아시아경제와 만나 "청탁금지법은 우리 사회의 문화를 바꾸기 위한 법"이라며 "그런 점에서는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본다"고 말했다. 김 전 대법관은 지난 11일 새 책 '판결 너머 자유(창비)'를 출간했다.
김 전 대법관은 "청탁금지법의 목적은 엘리트들끼리 골프 치고 밥 먹으면서 친목을 쌓고 카르텔을 맺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다만 "조문의 해석이 모호한 부분이 있어 아쉽다"고 지적했다.
"청탁금지법에서 원활한 직무 수행이나 사교·의례, 부조의 목적으로는 5만원 이내 선물이 허용된다는 형태로 금액을 정해놓았다. 애초 이런 것을 다 하지 말라는 취지였다. 사교나 의례의 목적을 어느 정도 선까지 허용할지 모호하다. 소관부처인 국민권익위원회는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경우에는 괜찮다고 했는데 이런 해석이 너무 어렵다."
김 전 대법관은 최근 청탁금지법에 대한 언급을 자제하고 있다. 지금은 자신이 나설 때가 아니라고 했다. 과거 인권위원장으로 법안을 입안했지만 공직에서 물러난 지금은 국가기관의 일이라고 했다.
다만 청탁금지법으로 바뀔 우리 사회의 변화를 어디까지 수용할 것인지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때라고 했다.
"청탁금지법이 사회의 급격한 변화를 불러오지는 못했지만 내면화는 어느 정도 됐다고 생각한다. 사문화됐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럴 때 속으로는 저어하는 마음도 들지 않나. 사회를 어느 정도 바꾸고 있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해석이 모호한 부분이나, 직업별로 좀 더 섬세하게 법을 다듬을 필요가 있다. 경제에 미치는 영향도 살펴봐야 한다. 처음에 거칠게 시작했지만 이제는 사회적 합의를 통해 개선해 나가야 한다."
김 전 대법관은 새 책 '판결 너무 자유'에서도 합의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는 현재 한국 사회가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 지나치게 분열 양상을 보이는데 우려를 나타내며 이러한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합의의 방법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김 전 대법관은 책에서 '중첩적 합의'라는 개념을 소개한다. '정의론(1973)', '정치적 자유주의(1993)' 등의 저술을 남긴 미국 정치철학자 존 롤스(1921~2002)가 제시한 개념이다. 롤스는 미국 공화당이 민주당의 진보 정책을 취하면서 보수와 진보의 구분이 모호해진 1970년대 다원화된 사회의 안정을 위해 '중첩적 합의'에 의한 정치적 자유주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리처드 닉슨 대통령(공화당)이 1969년 취임하면서 데탕트(긴장 완화) 시대를 열었다. 닉슨은 중국을 개방시키고 베트남 전쟁도 종식시켰다. 그러면서 전임 린든 존슨 대통령(민주당)이 도입했던 흑인 민권 등 여러 진보 이념을 제도화했다. 민주당의 이념을 공화당에서 흡수한 것이다. 그래서 롤스는 더 이상 진보와 보수의 경쟁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제도적으로 다양성을 확보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춰졌다고 판단했고 이를 합당한 다원주의라고 생각했다. 합당한 다원주의는 어느 하나의 신념이 지배하는 사회가 아니라 여러 신념이 함께 공존할 수 있는 사회를 뜻한다. 롤스는 합당한 다원주의 사회에서 여러 신념 체계가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지 고민했고 그 방법으로 '중첩적 합의'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이러한 과정 전체를 정치적 자유주의라고 칭했다."
진보와 보수라는 경쟁적 이념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치를 모색한 롤스의 행보는 오늘날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로 나뉘어 극한 대립 양상을 보이는 한국 사회에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해줄 수도 있다.
김 전 대법관은 "첨예하게 대립하는 현재 우리 사회의 모습은 롤스가 1970년대에 극복하고자 했던 사회"라며 "롤스가 왜 정치적 자유주의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했는지 소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김 전 대법관은 '판결 너머 자유'에서 롤스의 이론을 토대로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판결 내용을 살펴본다.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중첩적 합의를 끌어낼 수 있는 '공적 이성'의 형태이고, 또 실제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 중에서는 중첩적 합의라고 볼 수 있는 내용도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은 우리 사회의 변화와 발전상을 보여주는 거울이기도 하다.
사실 김 전 대법관은 우리 사회의 변화와 발전을 보여주는 상징적 인물이다. 그에게 따라붙는 훈장 같은 수식어 '한국 최초의 여성 대법관'은 한국 사회의 단단한 유리천장 하나가 깨진 역사를 의미한다.
그는 2004년 8월 대법관에 임명됐다. 대법관 재임 시절에는 소수자를 대변하는 진보적 성향의 판사로 대중에게 인식됐다.
"특별히 진보다 아니다 표방한 것은 없다. 다만 최초의 여성 대법관으로서 소수자와 여성을 많이 생각해야 하는 위치였기 때문에 그렇게 평가를 받은 것 같다. 원하지는 않았지만 여성 판사를 상징하는 지위였기 때문에 다른 여성들의 앞길을 막아서는 안 되겠다는 자의식이 있었고 열심히 일만 했다. 법관으로 일하면서 선고를 연기해달라고 요청한 적이 한 번도 없다. 판결문 쓰느라 밤을 새우고 다음날 법정에서 졸음을 쫓느라 고생했던 기억이 많다."
법을 공부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고 했다. "여성으로서 진로를 선택할 때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았던 사회였던 것 같다. 이과라면 의사, 문과라면 교사였는데 교수 되기는 또 굉장히 어려웠다. 그때 부모님께서 법대에 가서 사시를 준비해보라고 하셨다. 든든한 자격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욕심이 났다."
그렇게 김 전 대법관은 대학 재학 중 사시에 합격해 29년간 판사 생활을 했다. 대법관을 마친 뒤에는 제3대 국민권익위원회 위원장(2011년 1월~2012년 11월), 7~8대 양형위원회 위원장(2019년 4월~2023년 4월)을 역임했다.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을 배운 것은 소설을 통해서였다. 김영란 전 대법관은 평생의 도락이 전공과 무관한 책 읽기였고 스스로 활자 중독이라고 말한다. 인상적으로 읽은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책읽기의 쓸모(2016년 7월)'와 '시절의 독서(2021년 10월)'를 출간하기도 했다.
시절의 독서에서 처음으로 언급하는 소설은 루이자 메이 올컷의 작은 아씨들이다. 소설 속 주인공처럼 1남 4녀 중 셋째 딸인 김 전 대법관은 소설 속 네 자매 중 조에 감정이입을 해 소설을 흥미롭게 읽었다고 밝혔다.
조는 미국 남북전쟁 시기 보수적인 집안에서 소설가로 성공을 꿈꾸는 네 자매 중 가장 진취적인 인물이다. 사법시험에 합격해 든든한 자격을 얻고자 했던 김 전 대법관과 어딘가 닮았다.
김 전 대법관은 최근에는 독일 태생의 미국 철학자 한나 아렌트(1906~1975)의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과 미국 소설가 테주 콜의 '오픈 시티'를 책꽂이 꽂아두고 읽는다고 했다.
다음에 출간할 책이 법에 관한 책이 될지, 소설에 관한 책이 될지 모르겠다고 했다.
"한국 소설 중에서는 박경리 선생님의 토지를 가장 좋아한다. 마르셀 프로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도 최근 두 번 통독했다. 또 좋아하는 도스토옙스키나 토마스 만의 소설도 좋아해서 이런 작품에 대한 글을 써보고 싶기는 한데 이런 굵직굵직한 고전들에 관해 쓰려면 10년은 걸리지 않을까 싶다."
박병희 기자 nu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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