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사순절의 정치

2024. 3. 21.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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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교회가 부활주일로부터 주일을 제외한 40일을 역산하여 사순절을 지킨다. 부활절 날짜가 매해 바뀌기에 사순절의 시작과 끝도 함께 달라진다. 사순절 기간이 언제이건 그 40일은 그리스도의 고통과 죽음을 기억하고 그분이 보여준 사랑을 실천하는 참회와 경건과 금욕의 시간이다. 하지만 교회가 사순절을 지키는 방식은 정치·경제·문화적 상황에 영향을 받기도 한다.

대한민국에서는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총선이 4년마다 4월 초에 열린다. 그 결과 4년 주기로 사순절 일부가 선거 기간과 겹친다. 총선이 나라 전체의 관심을 정치에 집중시킬 정도로 영향력이 크기에 매 4년 사순절은 들뜨고 혼란한 분위기 가운데서 지켜진다. 올해는 부활주일이 3월 마지막 주라 그리스도의 고난이 시작된 성목요일부터 공식적으로 선거운동이 개시된다.

사순절과 선거운동이 겹치는 날짜 수는 매번 달라도 그 풍경은 크게 다르지 않다. 교회를 향한 정치인의 구애는 뜨거워지고 일부 설교자는 정치적 편향성으로 구설에 오른다. 식사의 친교는 누군가 불쑥 내뱉는 정치 이야기로 싸늘하게 식기 일쑤고 특정 정당 지지 여부를 가지고 교인 사이가 꽤 서먹해진다. 나라의 일꾼을 뽑는 만큼 꼭 투표해야 한다는 점잖은 이야기도 넘쳐난다.

하지만 이러한 독려가 다소 공허하게 느껴지는 건 이 말은 누구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투표를 많이 하는 목적이 결국은 자신이 좋아하는 후보를 국회로 보내고 지지하는 당을 거대 정치세력으로 만드는 것에서 못 벗어난다면 교회의 차별성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물론 국회의원을 뽑는 것은 민주 사회에서 중요한 정치 행위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정치적 책임을 후보 한 명만 승자로 만들고 나머지는 패자가 되게 하는 선거 중심으로만 본다면 교회가 가진 힘은 오히려 사회 갈등을 부추길 위험이 크다.

사순절과 총선 기간이 겹쳤던 적이 여러 번 있었지만 2024년, 이 문제가 유독 무겁게 느껴진다. 한국 사회가 지난 몇 년간 심하게 분열됐지만 이번 선거를 앞두고는 그 정도가 심각해 보이기 때문이다. 올해는 공식적인 선거운동 이전부터 표심에 영향을 끼칠 법한 일이 적잖게 눈에 띄었다. 일례로 대한민국 건국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가 2월에 개봉되자 국가 정체성과 역사 해석을 놓고 치열한 논쟁이 촉발됐다. 거기다 여러 교회가 이 영화 단체 관람을 하며 교인들 사이 이념적 갈등도 크게 일어났다.

민주 사회에서 정치적 입장이 서로 다를 수 있고 논쟁 이면에 대한민국을 더 좋게 만들려는 의도가 있더라도 다른 그리스도인을 형제자매가 아닌 좌파와 극우라 부르는 것은 우려할 일이다. 이는 교회가 하나님 아닌 우상, 즉 정치 이데올로기를 사실상 예배하는 방증일 수 있다. 누구를 예배하느냐가 공동체의 정체성과 그 안의 관계를 재설정하기에 교회에서 서로를 어떻게 인식하고 부르는지는 중요한 신앙의 문제이다.

총선 준비 기간과 사순절이 겹칠 때 정치적 관심사가 우리 마음을 점령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가 돼야 할 것이다. 아니, 총선을 앞두고 사순절을 지킨다는 것은 대한민국 국민 중 그리스도인만이 가질 수 있는 정치적 차별성임을 잊지 말자. 사순절은 모두가 자기 신념을 관철하려는 정치적인 세상 가운데서 우리의 죄를 돌아보고 그리스도의 사역을 오랫동안, 또렷이 마음에 각인하는 시간이다. 더 나은 예루살렘을 꿈꿨던 이들의 정치적 열망이 메시아를 죽일 정도로 악해질 수 있음도 기억해야 할 때다.

사순절을 지내며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정치적 책임은 권력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처럼 이 땅에서 화해의 사도가 되고 소외된 이들의 자리에 서는 데 있음을 재확인해야 한다.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나라’(요 18:36)의 주님에 대한 믿음으로 현실의 당파적 논리로부터 자유로워져야 대한민국의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빛과 소금과 같은 시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김진혁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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