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영의 문화난장] 예술가는 어디까지 도덕적이어야 하나

이지영 2024. 3. 21.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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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영 논설위원

살아있는 발레계 전설로 꼽히는 러시아 무용수 스베틀라나 자하로바의 4월 내한공연이 취소됐다. 올 하반기 공개될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 시즌2는 배우 오달수의 출연 사실이 공개되면서 ‘리스크 캐스팅’ 논란이 일었다. 올해 초 공연 예정이었던 연극 ‘두 메데아’는 개막 열흘 전 전격 취소 결정을 내렸다. 지난해 가을 뮤지컬배우 한지상은 자신이 주연을 맡아 준비 중이던 ‘더데빌: 파우스트’에서 하차했다.

위의 네 사례 모두 출연자들의 ‘도덕성 논란’이 불거지면서 벌어진 일이다. 이들이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2018년 2월 서울 대학로에서 열린 문화계 미투 운동 지지 집회. 당시 성폭행 사실이 드러난 연출가 이윤택은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현재 복역 중이다. [중앙포토]

「 '미투' 연루 김소희·한지상 등
법적 유죄 아닌데도 하차 요구
도의적 책임 범위 어디까지 논란
여론재판·마녀사냥 경계해야

자하로바는 ‘친푸틴’ 행보가 문제가 됐다.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에 찬성한 이력 등이 주목받으며 공연 반대 움직임이 일었다. 이달 초 주한우크라이나대사관이 “침략 국가의 공연자를 보여주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논란에 불을 붙였고, 결국 공연 계획은 백지화됐다.

영화계 ‘천만 요정’으로 불렸던 오달수는 2018년 ‘미투’ 가해자로 지목당하며 한동안 활동을 쉬었다. 오달수는 성폭력 의혹을 부인했고, 그에 대한 경찰의 내사는 공소시효 만료에 따른 ‘혐의없음’으로 2019년 종결됐다. 사건의 실체적 진실은 밝혀지지 않은 셈이다.

연극 ‘두 메데아’에서 주인공으로 캐스팅됐던 김소희 전 연희단거리패 대표는 2018년 공연계 미투 바람의 한가운데 있었던 인물이다. 연희단거리패의 예술감독이었던 연출가 이윤택의 성폭력 범죄 사실이 드러나면서 당시 대표였던 그에겐 ‘방조자’ 프레임이 씌워졌다. 경찰 조사 결과에서 그의 범죄 혐의는 없었다. 당시 경찰이 “김 전 대표에게는 억울한 부분이 있었다”고 밝혔지만, 이번 공연을 앞두고 연극계 일각에서 벌어진 ‘보이콧’ 운동의 대상이 됐다.

한지상은 2020년의 여성 팬 성추행 논란이 발목을 잡았다. 당시 한지상은 “호감을 가진 상대와 있었던 사생활”이라고 밝히며 그 여성을 공갈미수 및 강요 혐의로 고소했지만,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이후 그의 출연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반발 여론이 일었고, ‘더데빌: 파우스트’ 공연을 앞두고는 공연장 부근에 ‘관객은 비윤리적 배우를 원하지 않습니다’가 적힌 하차 요구 현수막까지 걸렸다.

2017년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범죄 파문으로 촉발된 할리우드발 ‘미투’ 바람은 예술가의 일탈을 눈감아주던 시대의 종말을 알렸다. 비윤리적인 예술가의 작품은 미학적 가치를 인정받을 수 없다는 데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됐다.

하지만 예술인에게 요구하는 도덕성의 수위가 어느 정도여야 하는가에 대해선 저마다 생각이 다르다. 특히 앞선 네 사례처럼 법적 책임을 넘어 사회적 책임을 묻는 상황에선 더욱 첨예하게 의견이 갈린다. 이른바 도의적 책임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이에 대한 사회적 논의는 시작조차 안 된 상태다.

우리 사회만 이를 고민하는 것은 아니다. 최근 프랑스에선 성폭행 혐의로 기소된 국민배우 제라드 드파르디외를 둘러싸고 예술계가 양분됐다. 지난 연말 프랑스 문화계 인사 50여명은 일간지 르 피가로에 “무죄 추정 원칙을 지켜야 한다”며 “드파르디외의 훈장을 취소하지 말라”는 공개서한을 게재했다. 이후 이에 반대하는 문화계 인사들의 성명이 잇따랐고,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과 배우 소피 마르소 등 유명 인사들까지 가세해 설전을 펼치고 있다.

지난 16일 늦은 오후 서울 대학로 예술가의집에서 연극인들의 모임 ‘대학로X포럼’이 주최하는 토론회가 열렸다. 연극 ‘두 메데아’ 보이콧 운동을 계기로 열린 이 날 토론회의 주제는 ‘연극계 백래시, 어떻게 맞서나갈 것인가’였다. 보이콧 운동을 주도했던 사람들과 ‘두 메데아’ 연출자·배우 등이 참석해 3시간 동안 토론을 이어갔지만, ‘물의’ 예술인의 복귀 움직임을 두고 이들의 생각은 끝까지 평행선을 달렸다. 토론회에 앞서 ‘대학로X포럼’ SNS에 질문으로 올라온 ‘도덕적 스펙트럼의 어디부터 어디까지를 예술가로 인정해야 할까’ ‘범죄자의 예술적 지위에 대한 심판의 주체는 사법부와 예술계, 대중 여론 중 어느 집단이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나’ 등에 대한 논의는 시작도 못 했다.

예술가의 도덕성과 예술적 성취를 구분해서 볼 수 없다는 것은 이제 시대 정신이다. 가해자에 대한 엄중한 처벌, 피해자 보호와 지원, 예방 교육 등이 반드시 이뤄져야 하는 이유다. 그와 동시에 가해자로 지목된 당사자의 책임 범위와 자숙 기간 등에 대한 사회적 합의도 필요하다. 누구라도 무분별한 여론 재판과 마녀사냥, 사적 복수의 대상이 된다면 또 다른 억울한 피해자가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지영 논설위원 jy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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