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할리우드였던 영화계, 왜 몰락했을까

이준목 2024. 3. 20.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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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리뷰] tvN <벌거벗은 세계사> '리틀 할리우드, 홍콩영화는 어떻게 망했나'

[이준목 기자]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tvN
 
'홍콩 영화'는 한때 '아시아의 리틀 할리우드'라고 불릴 만큼 높은 인기를 끌었다. 동서양의 문화가 공존했던 홍콩이라는 국제도시의 역사적 특수성을 바탕으로 중국적 소재와 서구적 감수성을 덧입혀서 탄생했기 때문이다. 특히 1970년대와 1990년대 사이에 최전성기를 구가하며 국제적으로 큰 인기를 누렸다. 21세기에 한류와 K팝 신드롬이 있었다면, 20세기에는 홍콩영화가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짧고 굵은 전성기를 누리던 '아시아의 용'은 여러 가지 구조적인 문제와 시대환경의 변화 속에 너무나 급격하게 몰락하게 된다. 과연 홍콩 영화가 무너진 진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19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 143회에서는 '리틀 할리우드, 홍콩영화는 어떻게 망했나' 편을 통해 홍콩 영화의 흥망성쇠를 조명했다. 윤영도 성공회대 동아시아 연구소 교수가 이날의 강연자로 나섰다.

홍콩 영화 발전의 시초와 원동력은 그 지리적-역사적 특수성에 기반한다. 홍콩은 청나라 말기만 해도 남방의 작은 어촌에 불과했다. 하지만 중국의 역사를 바꿔놓은 아편전쟁-중일전쟁-국공내전으로 이어진 세 번의 전쟁은 아이러니하게도 홍콩 영화의 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841년 홍콩은 청나라와의 아편전쟁에서 승전한 영국의 식민지가 된다. 영국 정부는 1938년 영국령 홍콩(British Hong Kong)을 '중립 지역'으로 선포한다. 중국 본토가 연이은 전란으로 혼란하던 시기에 많은 인력과 자본이 상대적으로 안전한 홍콩으로 유입되기에 이른다.

여기에는 영화 산업도 포함되어 있었다. 중일전쟁 직후 홍콩의 영화스튜디오는 전쟁 이후 그 10배에 이르는 70개로 늘어날만큼 제작 인프라가 크게 확대됐다. 또한 국공내전 직후에는 공산당의 위협을 피하여 본토의 많은 영화 제작자와 창작자들이 "홍콩만이 우리가 원하는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곳"이라고 선언하며 아시아에서 검열이 가장 자유로운 홍콩행을 선택하게 된다.

쇼브라더스(Shaw Brothers,邵氏兄弟有限公司)는 홍콩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영화사다. 싱가포르에서 극장 사업을 하던 샤오런메이(邵仁枚, 소인매) 등 소씨 가문의 4형제가 홍콩으로 건너와 의기투합하여 창립한 쇼브러더스는, 할리우드의 거대 영화사인 워너브라더스(Warner Bros)를 기획부터 로고까지 그대로 벤치마킹한 것으로 유명하다.

워너브라더스와 할리우드를 롤모델로, 아시아의 대형영화사를 꿈꿨던 쇼브라더스는, 1960년대 중후반부터 1970년대 말까지 홍콩의 고전 무협 영화 부흥기를 이끌며 아시아에서 큰 인기를 누렸다. 쇼브라더스는 한 영화사가 제작, 배급, 상영을 총괄하는 할리우드식 수직통합 시스템을 도입하여 많은 수익을 벌어들였다. 당시 쇼브라더스의 영화제작 스튜디오는 아시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것으로 명성이 높았다.

또한 쇼브라더스는 배우 육성에도 공을 들였다. 1964년 배우 아카데미는 '남국실험극단'을 설립하고 오디션을 통하여 자질있는 어린 배우들을 선발하여 연기 교습과 무술훈련 등을 시켰다. 배우들은 지원을 받은 댓가로 쇼브라더스의 전속배우로 활동하면서 저렴한 출연료에 장기계약을 체결해야 했다.

이 시기에 쇼브라더스의 대표작인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1967)는 당시 100만 홍콩달러라는 막대한 수익과 함께 주인공 왕우(王羽)를 스타덤에 올리며 1960년대 무협영화 제작붐의 기폭제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후로 1960년대 말까지 800편 이상의 무협영화가 제작되어 해외로 배급되었고, 아시아에서 북미까지 전세계에 걸쳐 143개에 이르는 쇼브라더스 극장이 세워지며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1970년에는 골든하베스트(Golden Harvest Entertainment Ltd)가 설립된다. 쇼브라더스의 사장이었던 추문회(鄒文懷)는 스튜디오 촬영만 고집하는 소씨 일가의 회사 경영방침에 불만을 품고 쇼브라더스를 퇴사한 이후, 하관창, 양풍 등의 인물과 의기투합하여 자신만의 회사를 설립했다.

1980년대 이후 골든하베스트는 쇼브라더스가 장악하고 있던 홍콩영화의 판도를 뒤바꾸며 아시아를 대표하는 영화사로 성장했다. <강시> <황비홍> 시리즈를 비롯하여 호러, 무협, 코미디를 넘나드는 여러 장르에서 두루 성공을 거둔 골든하베스트는 지금도 홍콩 영화의 황금기를 이끈 영화사로 평가받고 있다.

추문회의 또다른 업적은 아시아의 슈퍼스타가 되는 이소룡(李小龍, Bruce Lee)을 발굴했다는 것이다. 이소룡을 처음 캐스팅한 것이 골든하베스트였고, 그의 남다른 재능을 일찌감치 알아본 추문회는 신인 이소룡을 과감하게 주연으로 한 범죄액션영화 <당산대형>(1971)을 제작하여 대박을 터뜨린다.

<당산대형>에서는 이소룡이 악당들과 싸우기 전에 과자를 맛깔나게 먹으며 등장하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에는 유명한 뒷이야기가 전해지는데, 당시 신생영화사라 부족했던 제작비가 부족했던 골든하베스트는 마침 주요 촬영지였던 태국의 과자브랜드로부터 협찬을 받게된다. 영화는 그 보답으로 극 중 주연배우 이소룡이 과자를 먹는 장면을 삽입하며 간접광고를 해준 것이다.

진지한 영화 분위기에 안 어울릴 수도 있었던 장면이지만, 이소룡의 능청스러운 연기 덕분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었고, 훗날 영화의 흥행 돌풍과 함께 '시대를 앞서간 PPL'이라는 재조명을 받게 된다.

<당산대형>의 성공 이후, 이소룡은 역시 골든하베스트가 제작한 <정무문> <맹룡과강> 등의 히트작에서 주연을 맡았고, 높은 인기에 힘입어 해외까지 진출하게 된다. 당시 이소룡은 캐나다 ABC TV의 <피에르 베르통쇼>라는 유명 토크쇼에 출연하여 특유의 표정과 말투로 "형식과 형태를 없애고 물처럼 되어야 한다. 물은 컵에 따르면 컵이 찻주전자에 따르면 찻주전자가 된다. 물이 되십시오, 친구여(Be water, my friend)"이라며 영화 대사에 빗대어 자신의 철학과 성공비결을 전하는 어록을 남기기도 했다.

이소룡의 높은 스타성에 주목한 미국의 워너브러더스가 골든하베스트에 합작을 제안go 만든 영화가 바로 이소룡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용쟁호투>(1973)다. 약 85만 달러의 저렴한 제작비로 만들어진 영화는 미국에서만 2500만 달러(현재 한화 약 6천억 원)의 기록적인 흥행 수익을 거둬들이며 '브루스 리' 신드롬을 불러 일으킨다.

하지만 1973년 이소룡은 영화 <사망유희>를 촬영하던 중 갑작스럽게 두통을 호소하며 쓰러졌고 32살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사망원인은 뇌부종으로 알려졌다. 이소룡의 석연치 않은 죽음은 이후로도 오랫동안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로 남았다.

주연배우의 사망으로 난관에 부딪힌 <사망유희> 제작진은 이후 주인공이 사망한 것처럼 위장하고 성형수술로 얼굴을 바꿨다는 설정으로 변경하고 한국계 배우인 김태정이 대역을 맡아 남은 장면을 촬영하는 것으로 간신히 제작을 마쳤다. <사망유희>는 이소룡의 공식적인 유작이 되었지만 실제로 이소룡이 등장하는 장면은 전체 러닝타임 103분 중 약 10여 분에 불과하다.

이소룡 사후 한동안 비슷한 아류작들만 양산되며 주춤하던 홍콩 영화계는 또 한 명의 걸출한 액션스타를 발굴해내며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바로 '침체된 홍콩영화의 구원자'로 불리우며 한국 팬들에게도 친숙한 성룡(成龍,Jackie Chan)의 등장이다.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tvN
 
어린 시절부터 말썽꾸러기로 유명했던 성룡은 어린 시절 홍콩의 경극학교였던 홍콩중국극단학원(우점원.于占元)에 입학하여 10년간 고된 수련과정을 모두 견뎌내며 훗날 무술배우로서의 기본기를 갖추게 된다. 이 시기에 간간이 아역 엑스트라 활동을 통해 영화와도 처음 인연을 맺게 된다.

글쓰기와 읽기 등 일반적인 교육을 받지 못했던 성룡은 영화배우가 된 이후에도 남이 읽어주는 대본을 악착같이 외워서 촬영에 임했다고 한다. 성룡은 당대 최고의 배우였던 이소룡의 영화에 상대 단역이나 스턴트맨으로 활약하면서 액션스타의 꿈을 키웠고, 이소룡도 그런 성룡의 재능을 알아보고 아껴줬다고 한다.

성룡은 1978년 자신의 첫 흥행작인 <취권>의 성공으로 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취권>은 지 국내에서도 개봉하여 당시 국내에서 국도극장에 단관 상영했음에도, 워낙 높은 인기로 6개월간이나 장기상영하면서 무려 90만에 이르는 기록적인 관객을 동원하는 데 성공한다. 그 뒤를 <폴리스스토리> 1편, <용형호제> 등도 대성공을 거두며 성룡은 명실상부 아시아를 대표하는 액션스타로 자리매김했다.

성룡은 지형지물을 적극 활용한 파쿠르 액션과, 인간이 맨몸으로 감당할 수 있는 극한을 넘나드는 스턴트 묘기, 온갖 고생을 하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인간미 넘치는 주인공 캐릭터 등을 트레이드 마크로 하여 비장미 넘치던 이소룡과는 결이 다른 성룡 영화만의 '코믹 액션'이라는 장르의 선구자가 된다.

그 시절 홍콩 영화가 그토록 많은 이들을 열광시킬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전성기의 홍콩 영화는 이른바 '두 개의 머리를 가진 용'이라 불린다. 이는 동서양의 문화가 혼합되어있는 홍콩영화만의 독특한 정서를 의미하는 표현이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아시아 국가들은 검열에서 자유롭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영국의 지배를 받던 홍콩은 상대적으로 이러한 제약에서 자유로웠고, 이는 홍콩영화계가 상대적으로 다양한 소재의 작품들을 자유롭게 선보일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됐다. 여기에 홍콩영화계는 국제도시의 특성상,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대만 화교 자본들을 비롯하여 아시아 각국의 자본들이 유입되어 돈 걱정없이 많은 영화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 환경이었다.

또한 홍콩영화의 전성기와 맞물렸던 '가정용 비디오(VHS) 시장'의 발전은, 아시아 각국의 영화 팬들이 집에서도 편리하게 영화 시청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는 영화 수요가 더욱 늘어나는 호재로 작용했다. 검열과 자본의 부족으로 많은 영화를 제작하는 데 한계가 있던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 달리, 홍콩은 매년 수백 편의 영화를 만들어냈고 아시아와 세계 각지에 전파되면서 더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1980년대 <영웅본색> <첩혈쌍웅> <천장지구> 시리즈 등으로 대표되는 '홍콩 누아르' 장르의 등장은 홍콩 영화의 '뉴웨이브' 시대를 주도했다. 기존의 맨손 무술 중심의 액션활극과는 달리, 총기가 등장하고 뒷골목의 세계와 남자들의 의리를 부각하면서 홍콩의 복잡한 현실을 어둡고 은유적으로 묘사한 작품들이 새로운 장르를 형성하게 된다.

오우삼(吳宇森), 서극(徐克), 왕가위(王家衛)등은 이러한 홍콩 뉴웨이브를 대표하는 거장들이며, 주윤발(周潤發)-장국영(張國榮)-유덕화(劉德華) 같이 특히 비극적 누아르물에 최적화된 연기력과 스타성을 갖춘 배우들도 잇달아 등장하며 홍콩 영화의 전성기를 이끌게 된다.

또한 서극이 제작한 <천녀유혼>과 <동방불패>의 연이은 성공은 '판타지 무협'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약진으로 이어진다. 액션이 강조된 중국 전통의 권선징악형 무협물에, 판타지적 상상력과 할리우드식 특수효과, 비극적인 로맨스를 접목시킨 이른바 몽환적 판타지 무협물의 열풍이 일어난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스타로 <천녀유혼>의 매혹적인 처녀귀신 '섭소천'을 연기한 왕조현(王祖賢), <동방불패>의 남장여자(극중에서는 여장남자)를 연기한 임청하(林靑霞) 등은 지금도 전설로 회자된다.

또한 홍콩영화 붐의 정점에 등장했던 <황비홍> 시리즈의 리메이크는 이소룡-성룡에 이어 이연걸(李連杰)과 견자단(甄子丹)같은 새로운 액션 스타들을 발굴하는 계기가 된다. 아편전쟁 이후 서구열강의 침공으로 고난의 역사를 보냈던 중국인들에게 외세의 악당을 중국무술로 응징하는 황비홍의 활약상은 대리만족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1949년부터 제작되기 시작한 <황비홍> 시리즈는 2001년까지만 무려 103편이 제작되며 단일 인물과 영화 소재로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다.

1971년 <당산대형> 개봉 당시만 해도 1708만 홍콩 달러에 불과했던 홍콩 영화의 수출총액은 약 20여 년 뒤인 1993년에는 1억1720만 달러에 이를 만큼 급성장하게 된다. 한국에서도 홍콩영화의 수요가 높아지며 1992년에만 무려 74편의 홍콩영화가 수입되었고 편당 수입가는 약 1억3천만 원으로 할리우드(편당 9천만 원)보다 더 높은 인기를 구가할 정도였다.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tvN
 
하지만 이처럼 겉으로는 승승장구를 거듭하는 것 같았던 홍콩영화계는 내부적으로는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중화권의 대표적인 범죄조직이었던 삼합회(三合會)는 홍콩 사회와 연예계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삼합회는 돈이 되는 영화산업을 내버려두지 않았고 자본력을 앞세워 영화 제작 전반에 깊숙이 개입하면서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특히 삼합회의 위협에 타깃이 된 것은 인기가 높은 스타 배우들이었다. 유덕화는 삼합회의 협박으로 원치 않았던 수준 미달의 작품들에도 억지로 출연해야했다. 이를 용감하게 거절했던 배우들 중 매염방(梅艷芳)은 삼합회로부터 폭행 및 협박에 시달렸고, 이연걸은 매니저가 살해당하는 충격적인 사건을 겪어야했다.

특히 양조위의 부인인 유가령(劉嘉玲)은 과거 삼합회에 납치되어 강제로 사진까지 찍혔던 사실이 12년이나 지나서 뒤늦게 유출되어 홍콩 사회에 큰 충격을 안기기도 했다. 2003년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톱스타 장국영의 미스터리한 자살 역시 삼합회가 개입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러한 삼합회의 횡포에 염증을 느낀 많은 감독과 배우 영화인들이 썰물처럼 홍콩을 떠나 해외로 진출하거나 이민을 가는 계기가 됐다.

여기에 1997년, 156년 만에 이루어진 '홍콩의 중국 반환'은, 이미 흔들리던 홍콩영화의 몰락을 가속화하는 계기가 됐다. 영국의 지배 하에서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고 개방적인 제작환경에 익숙해져 있던 홍콩 영화계는 공산당이 지배하는 중국의 영향권에 들어가게 되면서 기존의 장점들을 모두 상실하게 됐다.

여기에 같은 해 벌어진 아시아 금융위기로 인하여 홍콩 영화의 주요 수입원이던 해외로의 수출과 자본 투자가 급격히 감소하며 영화계는 침체에 빠져들게 된다. 그 빈 자리를 파고든 것이 미국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와 르네상스 시대를 맞이한 한국 영화 등이었다.

결국 투자와 경쟁력을 상실한 홍콩 영화는 과거의 인기 배우와 흥행 공식을 답습한 아류작들만 양산하며 점점 퇴행의 길을 걷게 된다. 홍콩영화의 부흥을 이끌었던 거대한 자본의 힘이 홍콩영화 발전의 발목을 잡는 덫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은 아이러니 하다.

'실패에서 배우고 성공에 도전하라.' 홍콩영화계가 배출한 최초의 월드스타였던 이소룡이 남긴 격언이다. 너무나 짧은 황금기를 뒤로 하고 몰락의 길을 걷게 된 홍콩 영화계의 현실은 한때 홍콩 영화와 문화에 열광했던 우리에게도 반면교사로 깊은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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