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이든 한동훈이든, 누가 이겨도 변하지 않는 것 [김용균재단이 바라본 세상]
[김건수]
살면서 잊히지 않는 강렬한 기억을 하나 꼽으라면, 나는 8년 전 장지역에 있는 쿠팡물류센터에서 일했던 그날을 줄곧 말한다. 야간조였고, 'OB'라 불리는 출고 공정이었다. 단 하루였지만 소위 '사람 취급 받지 못했던' 모욕감과 단 한 번도 쉬지 못하고 밤새 관리자들의 독촉을 받으며 물류센터를 걸어다녔던 그날의 기억은 아직도 강렬하게 남아 있다.
▲ 제보자가 직접 밝히는 쿠팡블랙리스트 실체 공공운수노조 전국물류센터지부 쿠팡물류센터지회, 참여연대, 쿠팡블랙리스트 민변 법률대응팀, 쿠팡노동자의건강한노동과인권을위한대책위 주최로 지난 3월 13일 오전 서울 서초구 민변에서 '쿠팡 블랙리스트 제보자가 직접 밝히는 블랙리스트의 실체와 쿠팡 측 주장의 문제점을 밝히는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쿠팡대책위원회 권영국 대표가 쿠팡 측의 주장 반박과 소송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 맨 왼쪽 제일 위 주소창에 'blacklist.html'라는 영문이 보인다. 왼쪽은 공익제보자 당사자 중 한 명인 공공운수노조 전국물류센터지부 쿠팡물류센터지회 김준호 정책국장. |
ⓒ 이정민 |
이에 대한 쿠팡의 대응은 뻔뻔하기 그지없다. 블랙리스트가 폭력적 성향을 가졌거나 부적절한 행동을 반복한 이들로부터 노동자를 분리하기 위한 나름의 보호조치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시작부터 끝까지 거짓말이다. 실제로 쿠팡물류센터에서 일하지도 않았던 특정 언론사 PD나 기기자가 블랙리스트에 기재된 사실만 보아도 블랙리스트는 쿠팡의 추악한 노동현장을 감추기 위한 것이다. 즉,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게 아니라 쿠팡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더 나아가 쿠팡의 블랙리스트는 암암리에 도는 소문이 아니라, 관리자들이 직접 현장의 노동자들을 통제하기 위한 협박 용도로 활용됐다고 감히 증언할 수 있다. 쿠팡 물류센터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휴대전화를 개인 사물함에 넣어야 하는데, 이를 어기면 즉시 퇴거조치 될 뿐만 아니라 다시는 일할 수 없다고 엄포를 놨던 기억이 뚜렷하다. 더 심각한 것은 공정 속도가 느릴 때도 마찬가지로 퇴거조치와 재취업의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다던 관리자들의 말이 '공지'되곤 했다.
블랙리스트 실체가 드러나 더 이상의 해명이 불가능해지자 쿠팡은 말을 바꾸기 시작했다. 블랙리스트 폭로자가 회사 기밀을 유출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블랙리스트는 회사 기밀이 아니었다. 현장에서는 공공연한 협박의 도구였고, 노동자들에게 전해지는 관리자들의 공지사항이었다. 쿠팡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라면, 블랙리스트가 존재한다는 보도에 아무도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실은 나 역시 쿠팡 블랙리스트에 기재돼 있다. 2021년 9월 9일, 공공운수노조에서개최한 쿠팡노동실태보고 현장에서 발표자로 참여한 뒤로 쿠팡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이를 알게 된 후 나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이미 블랙리스트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공공연히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영업비밀-성공신화'의 이면
쿠팡은 왜 블랙리스트를 만들었을까.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쿠팡의 영업비밀, 성공신화에 감춰진 이면을 들춰내야 한다. 쿠팡은 저임금·고강도 노동을 유지하기 위해 90%의 물류센터 노동자를 일용직으로 고용할 만큼 노동자들을 잘게 쪼개놨다.
계약직이 되는 것도 어렵다. 3개월 계약 후 9개월, 그 뒤 12개월에서 그 다음 무기계약으로 이어지는 단계적 계약제도를 도입하고 있다. 이 제도는 노동조합을 결성해 쿠팡을 바꾸고자 하는 노동자들을 해고하는 데에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노동조합에 가입하면 계약을 해지하거나, 블랙리스트에 올려 취업 기회 자체를 차단해버리는 것이다.
사실 블랙리스트는 기업들만 만드는 건 아니다.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블랙기업'이라는 음어가 있다. 소위 노동현장이 열악하고, 기업문화가 폭력적인 곳들을 블랙기업이라 칭하는데, 쿠팡은 블랙기업 중에 블랙기업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8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로 쿠팡은 블랙기업인데, 바뀐 것이 단 하나 있다. 바로 쿠팡이 지난 몇 년 간 급속도로 성장해 한국 최대 대기업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는 것이다.
▲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19일 오후 경기도 이천시 중앙로 문화의 광장에서 발언하고 있다. 2024.3.19 |
ⓒ 연합뉴스 |
▲ 국민의힘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이 14일 부산 북구 구포시장을 방문해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
ⓒ 김보성 |
이른바 '정치의 시간'이다. 그럴 때 요즘 나는 정치가 날 압도하고 있다는 감각을 선명히 느끼는 중이다. 더 구체적으로는 1시간에도 몇 번이나 같은 번호로 걸려오는 여론조사 기관의 전화가 주는 피로감, 지하철 전광판에서 격전지도 아닌 지역구 후보 공천소식까지 전해들어야 할 때 드는 당혹감 같은 거랄까. 그래서 그 누구보다 세상 소식을 빠르게 접할 언론조차 양당 중 누가 이길지를 더 재밌고 자세하게 중계하는 게 전부인 것처럼 기사를 쏟아낼 때의 허탈함도 있겠다.
분명한 것은 민주당이 윤석열을 심판한 뒤의 사회, 한동훈이 운동권을 청산한 뒤의 사회에서도 쿠팡물류센터의 컨베이어 벨트는 똑같은 방식으로 돌고 또 돌 것이다. 노동자를 쪼개면서, 권리를 단계화 하면서, 권리를 형해화 하면서 착취의 순환고리가 반복될 것이다. 이미 나라다운 나라를 말했던 문재인도, 공정과 상식을 바로잡겠다는 윤석열도 저마다 각자의 방식으로 민생을 말했지만 저임금 일용직 노동자들의 삶에는 관심 없긴 똑같았다.
정치가 지겹다거나, 정치에 실증이 났다는 것이 아니다. 블랙기업이 대기업이 될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방조한 정치의 책임을 묻는 것이 제대로 된 심판이고 청산이지 않을까? 노동자들을 노동권의 사각지대로 몰아넣고 착취한 블랙기업 쿠팡을 심판하는 정치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으로 가진 욕심을 내보자면, 이 마음이 쿠팡물류센터 노동자들의 마음과 같길 바란다. 흩어진 노동이지만, 컨베이어 벨트로 연결되어 쿠팡 자본의 이익으로 빨려 들어가는 구조로 엮인 이들이 각자도생을 넘어 연대와 저항의 정치를 만들어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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