휠체어로 우아하게 걷고, 예술도 합니다만 [변방에서 안방으로 : 일하는 사람책]

최문희 2024. 3. 20.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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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 허무는 직업인들이 쓴 <장애인과 함께 사는 법> , <농담, 응시, 어수선한 연결>

일하는 사람의 기록을 담은 책을 소개한다. 송곳이 되어 준 작가의 경험과 필자의 지금을 들여다보아 변방에서 안방으로 자리를 넓혀 먹고사는 오늘의 온도를 1℃ 올리고자 한다. <기자말>

[최문희 기자]

출퇴근할 때마다 자전거를 탄다. 내가 사는 서울 북가좌동에서 서교동까지 삼십 분쯤 달리다 보면 머리가 알싸해지고 짭조름한 땀이 차오른다.

망원동에서 회사로 향하는 골목으로 진입할 때는 좌우를 잘 살펴야 한다. 합정역 부근은 차가 많고, 여덟 시 오십 분쯤엔 뛰어다니는 사람이 흔하다. 좋게 말하면 활력 있는 아침, 나쁘게 말하면 모두가 날선 아침에 자전거는 든든한 친구가 되어 준다. 제법 낡았지만 한세월을 지탱해 준 다리. 두 개의 멋진 동그라미.

눈이 쌓이면 자전거도 어김없이 타기 어려워진다. 내키진 않지만 몇 달을 지하철을 타고 다녔다. 그날도 어김없이 승강장 문이 열렸고 휴대폰에 코를 박고 안쪽으로 몸을 쑤셔 넣었다. 등 뒤로 여러 등이 포개졌고 지하철 문이 닫혔다. 몽롱한 기분으로 까만 차장 바깥을 보고 있는데 소리가 들렸다.

"이제 내려요!" 그냥 내리면 될 걸, 웬 목소리가 저렇게 크담. 정신이 반쯤 잠겨 뒤돌아보지 않은 채 납작 몸을 오므렸다. 다음 역에 다다르자 목소리는 절박한 톤으로 변해갔다. "저 이제 내릴게요!" 그제야 나의 시선이 소리의 근원에 닿았다.

사방이 막혀 나갈 도리가 없던 그는 휠체어를 타고 있었다. 나와 주변 사람들은 뒤늦게 거리를 확보하고 그이가 내릴 수 있도록 틈을 내었다. 그날 아침, 회사에 도착해 컴퓨터를 켜고 업무 리스트를 정리하는 동안 머리가 멍했다.

요 며칠간 장애운동에 관한 책을 읽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나의 생활이 개미 똥구멍만큼도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자각에 백 번쯤 '이불킥'을 내지르고 싶었다. 내가 폰을 들여다보지 않고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그를 바라보았다면? 내 옆에 선 사람도 재빠르게 같이 고개 돌릴 수 있지 않았을까. 시민의식을 백날 머리로만 익힌 걸까. 그로부터 며칠간 생각했다. 다만 휠체어에 관해서. 어떤 다리에 관해서.

장애보다 사람 자체를 보려고 노력한 적 있나요

읽는 삶과 행동하는 삶 사이, 그 빈틈이 부끄러웠다. 급하게 봉합하지 않기로 했다. 그게 나의 '꼴'이자 부족한 내 시민의식의 '눈금'이라 여기기로 했다. 그렇게 내 곁에 찾아온 두 책을 소개한다.

한 권은 휠체어로 생활하는 사람에 관한 기록인 <장애인과 함께 사는 법>(백정연). 또 한 권은 휠체어를 타고 보이는 몸짓과 속도도 예술이 될 수 있음을 일러 주는 <농담, 응시, 어수선한 연결>(김슬기·김지수). 두 권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직업이 다르다.

<장애인과 함께 사는 법>의 저자 백정연은 결혼 직후 신세계를 마주한다. 15년 차 사회복지사였던 그는 반려자와 생활하면서 사랑하는 사람의 '고유한 세계'를 만나는 기쁨을 누린다. 동시에 '고유하게 여기지 말아야 할 온갖 불합리'도 겪는다.

이 책은 장애인의 가족 구성원이 쓴 이야기. 휠체어로 진입할 수 없는 각종 시설의 문제점, 장애인과 마주했을 때 성급하게 도우려고 마음먹는 사람들의 행태와 우리 안 편견을 바로 보게 한다.
 
 책 <장애인과 함께 사는 법>
ⓒ 유유
예를 들어 보자. 서울 시내 저상버스 보급률이 65%이지만 버스를 이용하는 장애인은 곤욕스럽다. 빠른 배차에 시달리는 운전기사와 급한 용무에 시달리는 시민들의 틈바구니에서 장애인들은 이중 압박에 시달린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시급한 '새로운 것을 배우고 익히는 기회'를 장애인들은 충분히 누리고 있을까? '유니버셜 디자인(성별, 나이, 장애 등으로 인해 제약을 받지 않도록 설계하는 디자인)'을 적용한 키오스크로 음식을 먹고 영화를 본 경험이 얼마나 있을까?

우리는 무언가 스스로 해내는 과정에서 성취감을 느끼고 다음 실천의 스텝을 밟는다. 하지만 유독 장애인에게는 '생활의 스텝'을 밟기까지의 여정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 식당을 예약하고 밥을 먹는 일까지 모조리 대신 선택하고 도와야 한다는 생각을 버릇처럼 앞세운다. 키오스크도 그런 맥락에서 비장애인의 관점으로만 설계됐을 가능성이 크다. 저자 역시 "비장애인의 무지가 장애인의 일상 유지를 얼마나 방해할 수 있는지" 돌아볼 것을 촉구한다.

그는 특히 '한 장애인이 가진 기질'보다는 '한 사람이 가진 기질'로 누군가를 이해하는 일이 우리 사회에 요원하다고 지적한다. 아직도 흔히 쓰이는 '장애 극복'이라는 단어, 반려자를 표현하는 무수한 말 가운데 "하반신이 마비되었다"라는 표현에 일갈을 날린다. 반려자와 상의해 축의금의 1퍼센트를 아름다운재단에 기부했던 결혼 당시, 취재차 온 기자와 PD는 "사랑으로 장애 극복한 부부"라는 비윤리적인 문장을 여과 없이 방출했다. 저자는 이를 바로잡는다.
 
"나는 남편이 걷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다리 대신 휠체어로 걷는 것이라 생각한다." - <장애인과 함께 사는 법>(백정연) 중에서
 
사람마다 걷는 방법은 다르다는 것. 단순한 진리를 저자는 또박또박 고한다. <장애인과 함께 사는 방법>은 우리가 생활에서 공동체적 감수성을 기르는 법을 알려 주는 명쾌한 가이드북이다. 쓰레기 쌓인 장애인 주차장 구역을 맞닥뜨린 일 등 불공정한 일상을 바로잡고자 단련했던 부부의 '살아내기 위한 연습'이 챕터마다 빼곡하다. 이 책은 각자 다른 우리의 걸음을 하나의 길 위에 새겨 준다.
 
 휠체어(자료사진).
ⓒ 픽사베이
  
저자 백정연은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이기도 하다. 발달 장애인, 정보 약자 등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정보를 만드는 사회적 기업 '소소한 소통(이하 소소)'을 꾸리고 있다. 선거에서 투표권을 행사하는 방법을 담은 <선거를 부탁해>, 누구나 쉽게 복지 서비스를 누리게 안내하는 <누워서 편하게 보는 복지 용어> 등 소소에서 펴낸 도서만 열 종이 넘는다.

휠체어가 다닐 수 있는 카페 로드맵 등 당사자 의견을 반영해 구성한 정보를 소소 홈페이지(바로가기)에서 만날 수 있다. 안전하고, 신선하고, 재밌으니 구독을 '강추'한다.

TV에서 장애 배우를 본 적이 있나요

장애를 시혜적으로 보는 시선을 거두기 시작했다면? 다음 스텝을 밟을 차례다. <농담, 응시, 어수선한 연결>은 공연예술 연구자인 김슬기와 연출가이자 극작가, 배우인 김지수의 합작품. 공연예술을 주제로 글쓰기를 해온 김슬기가 휠체어를 탄 예술인 김지수를 여러 해에 걸쳐 인터뷰하고 연극판에서 동고동락하며 기록한 장애 연극에 관한 단상이다.
 
 책 <농담, 응시, 어수선한 연결>
ⓒ 가망서사
 
유독 장애가 있는 사람을 처음 만날 때 실수하지 않으려고 지나치게 조심하는 경우가 있다. 함부로 도와줘서도, 외면해서도, 마주한 사람을 장애를 가진 사람으로만 명명하지 않도록 골몰하다 보면 아뿔싸, 같이 웃고 슬퍼하는 감각에 자물쇠를 채워 긴장만이 사위를 감쌀지도 모른다. 연극인 김지수는 애초에 그 사실을 알아챈 사람. 편견의 경계를 지우고자 연출 감각뿐 아니라 유머까지 고루 장착하기에 이른다.
 
"어느 날 지수 씨의 농담이 생각났다. 단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지수 씨는 요즘 나이가 들어 작은 글씨들을 읽을 수가 없다며 '나 이제 눈이 잘 안 보여. 중복 장애야.' 하고 호탕하게 웃어댔다."
- <농담, 응시, 어수선한 연결>(김슬기·김지수)
 
소아마비로 얻은 척추 장애. 청년 김지수는 몇 년에 걸쳐 수술을 받는 대신, 수술비로 1인 가구의 인생을 출발했다. 그는 2003년부터 극단 생활을 했다. 다양한 자립생활센터가 생겨나던 시절, 장애인 주도로 만들어진 센터에서 장애인들이 오히려 주변부로 밀려나는 현상에 문제의식을 느꼈다. 그 고민은 배우가 행복한 극단을 만들고 싶은 소망으로 이어졌고, 김지수는 2007년 장애인 극단 '애인'을 창립했다.

연극이란 감정을 쌓아 올려 배우가 자신과 조우하고 관객과 감응하는 것. 그 인고의 세월을 같이 버틸 동료를 찾고자 김지수는 국토종단 여행길에 올라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연극하는 삶'을 제안했다. 그렇게 배우 백우람 등 의기투합한 동료들이 모인 극단 애인은 이제 18년 차에 접어드는 베테랑 연극인의 집합소다. <고도를 기다리며>, <장애, 제3의 언어로 말하다> 등으로 극찬을 받았다.

연극인 김지수는 말한다. 장애가 있든 없든 우리가 같이 살아가려면 "유연해야 되고 어수선할 수밖에 없으니, 그 안에서 잘 보이지 않는 엉성한 질서가 있기 마련"임을 알아야 한다고. 실제로 장애 배우들로 이뤄진 연극 무대를 처음 본 관객들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들은 비장애 배우의 움직임에 익숙해진 탓에 눈앞에 선 배우의 몸짓에 일순간 혼란을 느낀다.

관객은 이내 관습적으로 봐온 비장애인의 연기와 몸짓, 이미지를 머릿속에서 덜어내고 극에 집중한다. 눈앞에 선 배우의 몸짓에 정신을 쏟는다. 이때 관객과 배우의 독특한 응시가 이뤄지고, 어수선한 연결이 시작된다. 연극인 김지수가 말했던 '질서'란 익숙히 봐왔던 연극의 자리에 새로운 색채를 얹히고, 움직임을 뭉개고 합하여 새로 생겨난 리듬을 나누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희생자, 천재 등 천편일률적인 장애 캐릭터 너머의 배우를 바라보는 연습 말이다.

종종 팬심은 그렇게 예상하지 못한 찰나 생겨난다. 고백하자면, 이 책을 통해 몰랐던 연극의 지평을 탐색하다가 황철호 배우의 영상을 보고 그에게 '입덕'했다(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유튜브 영상 "연극이뭐라GO: 황철호 배우 편"이 발단이었다. 매우 우아한 악센트가 압권인데, 그의 배우 인생을 계속 찾아보는 중이다!).
 


뇌병변장애를 가진 배우가 무대 위에 등장하는 장면에 관해 "배우가 비틀비틀 걸어온다"라고 여전히 화면에 잘못 해설되는 경우가 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동시에 자기 장애를 종종 무대 위에서 '애용'하는 배우들도 있음도 알려준다. 얼굴에 난 점, 비뚤어진 허리와 곡선으로 꺾인 목, 옴폭 패인 미간 등 배우의 신체는 연극을 위한 배경이자 이미지가 되어 준다. 하여 배우의 장애는 어떤 장면에선 시너지를 일으키는 도구가 되고, 보편적인 신체 기관 중 하나로 극 위에서 구현되고 흐르는 조각이 되는 건 아닐까 감히 예감해 본다.

한국 최초의 장애인 극단이 탄생한 2002년. 그로부터 시간이 한참 지났다. 넷플릭스를 비롯해 TV 연속극에서는 여전히 비장애인 배우가 장애인 역할을 맡는 추세다. 영국에선 이미 다양한 소수자들로 이뤄진 드라마를 제작하는 '360° 다양성 헌장'이라는 규칙 아래, 장르와 영역을 불문하고 극이 방영된다. 서로 다른 장애 유형을 연기하는 해외 연극도 생겨나고 있다. 여전히 비장애인 배우들이 판치는 국내 드라마와 연극판에서, 다양한 장애 당사자들이 자기만의 호흡으로 존재를 보이는 장면이 빈번해져야 할 때다.

한세월을 지탱해 준 다리. 휠체어를 타고도 생활이 되고 예술을 논할 수 있을 때 두 개의 멋진 동그라미는 언덕을 오를 것이다. 그때는 나의 자전거도 덩달아 호쾌하게 달릴 수 있겠다. 봄의 언덕을 나란히 누릴 수 있겠다. 최소한의 생활 윤리를 지킬 때 일인 분의 삶이 예술에 가까워질 수 있음을 출근길에 되새겨야겠다. 아차, 휴대폰에 코 박는 건 그만. 몇 초만이라도 주변을 살피는 연습,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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