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으며 서울을 생각하다]다중언어 도시 서울에 필요한 것은…
영어·일본어·중국어 사용 늘어
최근 무역·문화 강대국 부상
동남아·중앙아 등 이주민 유입
문헌자료도 다중언어 비중 높아
공통어 한국어 학습시스템 필요
다중언어 도시는 한 도시 안에서 여러 언어를 사용하는 도시를 뜻한다. 대부분 뉴욕이나 런던 같은 글로벌 도시를 먼저 떠올릴 것이다. 꼭 그렇지 않다. 오래전부터 전통적인 다민족 국가에서는 한 도시에서 여러 언어를 사용했고, 제국주의 영향으로 지배자의 언어가 억지로 보급되면서 언어가 다양해진 곳도 있다. 20세기 후반 이후 이민자 급증으로 사용 언어가 다양해진 도시들도 부쩍 늘었다.
서울은 어떨까. 얼핏 생각하기에는 다중언어 도시와 거리가 멀어 보인다. 세계 여러 도시에 비해 이민자와 외국인 비중이 작고, 인구의 95%가 한국어를 모어로 쓰고 있으니 그렇게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무역 강대국으로 부상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의 국제 교류도 활발해지면서 서울에서 영어를 만나는 일이 자연스러워진 지 오래되었다. 주요 안내문은 한국어와 영어가 나란히 있고, 영어 정보를 접하는 일도 비교적 쉬워졌다. 1990년대 후반 영어 교육에서의 실용성이 강조되면서 일반인들의 말하기 실력도 향상되어 외국인들과의 소통도 영어로 원활하게 이루어지는 편이다.
다른 언어들은 어떨까. 19세기 말부터 일본과 중국을 비롯한 서양 강대국들은 여러 방면에서 한반도에 영향을 미쳤고, 사업가나 선교사 등 외국인들이 늘어나면서 그들의 언어를 배우는 한국인들도 늘어났다. 19세기 말 중국인들이 뿌리를 내리면서 차이나타운이 생기기도 했고,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제국이 교육 제도를 통해 한국인들에게 일본어를 강제로 가르쳤으며 고등학교와 대학에서는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등도 가르쳤다. 해방 이후 일본어는 거의 사라졌지만 미군정의 영향으로 영어가 한반도에 깊이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한국전쟁 이후 1960년대 수출 중심으로 경제성장이 빠르게 전개되면서 영어를 사용하는 한국인들이 부쩍 늘었다. 1965년 일본과의 외교 수립 이후 무역과 인적 교류가 확대되면서 또다시 일본어 사용자들이 늘어나기도 했다.
20세기 말까지 서울에서 들리는 외국어는 대부분 영어, 중국어, 일본어였다.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외국인 노동자, 유학생, 결혼 이주 여성 등 여러 이유로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이 늘어나면서 사용하는 언어 역시 급속도로 다양해지기 시작했다.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 남아시아 지역의 여러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의 공동체가 형성되어 거리의 상가 간판에도 다양한 언어들이 등장했다.
또 다른 양상도 있다. 오랫동안 해외에서 살던 한국인들이 한국으로 돌아와 살면서 그 나라에서 사용했던 언어를 사용하는 사례도 늘었다. 조금만 주위를 돌아보면 미국, 중국, 일본만이 아니라 이미 중앙아시아, 러시아, 독일, 남미 등 20세기에 많은 한국인이 이주했던 여러 나라의 언어가 사용되고 있고, 그들을 매개로 한국으로 새롭게 이주해온 외국인들과 더불어 언어권별로 교류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들 가운데 몇몇은 한정된 ‘외국인 마을’에서 활동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서울 곳곳을 가리지 않고 거주하고, 사회적 활동을 하고 있다.
21세기에 접어들면서 한국인들의 외국어 실력도 다양해졌다. 영어 교육의 방향이 실용적으로 전환되면서 말하기와 듣기 실력이 전반적으로 향상됐고, 영어권 국가에서 학위를 받고 돌아온 다양한 분야 인력들의 영어 구사력이 매우 높아지면서 한국의 대학, 회사, 연구 기관 등에서 전 세계 최신 정보를 더 쉽고 빠르게 습득하는 건 물론 자신들의 성과를 해외로 발신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영어권 국가에 비해서 적긴 하지만 유럽을 비롯해 일본과의 전문 분야 교류도 다양해지면서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일본어 등을 원활하게 사용할 수 있는 이들이 분야마다 포진이 된 지 오래이며, 1992년 중국과의 수교 이후 2000년대 중국 유학 붐이 일 만큼 중국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면서 중국어 역시 분야마다 문제없이 소통할 수 있는 인력들도 늘었다. 서울은 이미 외국어로 이루어지는 지적 활동이 매우 활발한 도시다. 실제로 지난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당시 한국의 보건 및 의료 체제는 세계 현황을 신속하게 파악하여 원활하게 대응함으로써 세계적으로 주목받기도 했다.
만약 어디에선가 도시별 ‘다중언어 지적 활동 지수’를 발표한다면 서울은 세계의 주요 도시 중 매우 높은 순위에 오를 것임은 틀림없다. 서울의 다중언어 사용은 제국주의와 외세의 지배로 시작했지만 국가가 성장하고 사회적으로 발전하면서 아픈 역사는 어느덧 장점으로 전환되었다.
주목할 점은 또 있다. 서울은 책을 비롯한 다양한 문헌과 인터넷 자료 등에서도 다중언어 비중이 높은 편이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한국은 도서관에 책을 비롯한 문헌뿐만이 아니라 전자 자료 비중을 적극적으로 늘렸고, 그 가운데 영어 중심이긴 하지만 외국어로 된 자료 비중도 높였다. 일반 시민들이 공공도서관에서 다양한 외국어 자료를 접하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 아니다. 2012년 개관한 서울도서관만 해도 ‘세계자료실’에 다양한 언어로 된 5만여권의 책을 보유하고 있고, 남산도서관은 2014년 ‘다문화자료실’을 설치했다. 이처럼 크고 작은 도서관마다 외국어 자료가 매우 많다는 점은 매우 긍정적이다.
갈수록 서울을 찾는 이주민과 외국인들은 더 늘어날 것이다. 전 세계에서 찾아오는 이들이 많아질 테니 서울의 다중언어화 역시 다양한 언어권으로 점점 확대되어갈 것이다. 그런 이들을 위해 서울은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그들이 한국 사회 구성원으로서 정착하기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공통어인 한국어의 습득이다. 그들이 한국 사회의 떳떳한 시민으로서 공동체에 기여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도 한국어를 쉽고 편리하게 배울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 실제로 이미 다중언어 도시가 된 곳들마다 오래전부터 도시의 공통어를 학습시키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다. 서울은 물론 앞으로 전 세계적으로 다중언어 도시가 늘어나는 추세임은 분명하다. 이럴 때 서울이 앞장서서 효과적인 시스템을 만들어낸다면 전 세계적으로 매우 큰 파급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런 시스템을 장착할 수 있을 때, 진정한 다중언어 도시로서 다음 단계를 향해 도약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로버트 파우저 전 서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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