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하는 조선조 이야기가 오늘의 한국에 던지는 메시지

김성호 2024. 3. 20.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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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의 씨네만세 667]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김성호 기자]

아무리 성과주의 사회라지만 결과가 모든 걸 말하지는 않는다. 결과만큼 과정이 중할 때가 있고, 과정만큼이나 의도가 유의미할 때도 있다.

그러나 결과보다 과정, 과정보다 의도를 바라보는 건 어려운 일이다. 결과는 튀어 드러나지만 과정은 가라앉아 한눈에 살피기 어렵다. 의도는 더욱 그러하다. 한 길 사람 속 알 수 없다는 말처럼 애써 찾더라도 쉬이 짚어지지 않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리하여 결과보다 과정을, 과정보다 의도를 살피는 작업엔 수고와 공력이 들어가게 마련이다.

작품 또한 그와 같다. 어느 작품은 졸렬하지만 그저 형편없게만 볼 수는 없는 일이다. 졸렬한 결과 아래 깔린 과정이며 의도가 실제 드러난 것보다는 대단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가만히 살펴야 드러나는 그러한 것들로부터 누구는 오늘의 졸렬한 작품 너머 걸출한 미래가 있을 수 있음을 기대하게 되기도 한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포스터
ⓒ SK 텔레콤
 
감춰진 것에 주목하면 보이는 것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이 꼭 그와 같은 영화다. 이 영화는 오래도록 형편없는 요소들로 비난을 사왔다. 이동진과 같이 한국 대형영화사에 우호적인 평론가조차 '인상적인 대사들을 그저 실어나르는 서사'라 혹평했을 정도. 꼭 그가 아니라도 이 영화에 대하여 호평을 하는 이를 만나보기 어려우니, 혹자는 이 영화가 한국 영화사에서 곱씹어져야 할 이유가 없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완전히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누군가 이 영화를 기억한다면 대체로 다음과 같은 요소들 때문일 테다. 갑자기 사극을 판타지로 보내버리는 차승원의 드라큘라 이빨, <맹인검객 자토이치>를 연상케 하는 황정민의 칼잡이 연기, 단 며칠의 훈련으로 절대검객으로 성장하는 주인공의 재능, 목숨이 오가는 중요한 순간에 홀로 사랑연기에 매진하는 기생의 저 홀로 아련함, 다른 사극에선 보기 어려운 국왕과 조정 대신들의 경박한 태도 따위 말이다. 하나같이 영화가 그리 인상적이지 못했다는 증거일 수 있겠다. 그렇게 영화는 이준익 감독의 필모그래피 가운데 가장 적게 소환되는 실패작으로 남겨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것이 마땅한 일인 것은 아니다. 성공하지 못하고 묻힌 이 영화에서도 꺼내어 곱씹을 요소가 적잖이 있기 때문이다. 그 대부분은 표면이 아닌 심연, 즉 의도에 있다. 이준익이 이 이야기를 영화화하기로 선택한 이유, 그리하여 그가 부각하길 원했던 설정 같은 부분에서 유독 꺼내어 이야기할 요소가 많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스틸컷
ⓒ SK 텔레콤
 
조선을 뒤흔든 정여립 모반의 영화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조선 중기 정여립 모반 사건을 다룬다.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는 제법 강렬하다. 한 무리 선비들이 모여 있는 칼잡이들에게 다가와 그 수장에게 조직을 해체하라 권고한다. 조직이란 다름 아닌 대동계, 남도의 사내들이 모여 조직한 자경단과 같은 집단이다. 일제의 노략질이 갈수록 심해지는 가운데 이들에 대항하여 삶의 터전을 지키겠다는 이들의 모임으로, 그 수장이 바로 유명한 정여립이다.

정여립은 대동계 해체를 권하는 이들의 권고를 무시하고, 이내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다. 왕은 그 시신까지 끌어다 사지를 찢어발기는 분풀이를 하고서 역신이 어떤 취급을 받는지 그 본보기로 삼는다.

이후 영화는 정여립의 제자인 이몽학(차승원 분)이 조직을 이어받아 반란을 도모하는 이야기로 흘러간다. 이몽학은 대동계를 이끌고 조직을 해하려한 이들을 처단한다. 우선 해체를 권고하고 돌아갔던 서인들이 그 대상이 된다. 여러 양반들을 습격해 살해하는 과정에서 서인 유력인사인 한신균(송영창 분)의 집에 쳐들어가 일가 사내들을 도륙하는 일까지 벌인다. 이때 겨우 목숨을 구한 한씨 집안 사내가 있으니 한신균의 서자 견자(백성현 분)다.

견자는 이몽학에게 복수하려 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다. 그는 정여립의 친구였고 대동계 설립에 역할을 했던 맹인검객 황정학(황정민 분)을 우연히 만나 그와 동행을 시작한다. 황정학은 이몽학이 정여립을 살해했다 믿고 있고, 견자 또한 제 아버지의 복수를 하여야 한다는 점에서 둘은 목적이 같다. 영화는 이몽학이 나라를 뒤엎으려 하는 이야기 반대편에 견자와 황정학이 이몽학을 죽이려는 여정을 담아낸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스틸컷
ⓒ SK 텔레콤
 
동서로 갈린 정국, 혼탁한 국왕

때는 바야흐로 16세기 말이다.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의 적통으로 이어져온 이씨 왕조가 명종에서 끊기고, 서출인 선조로 왕위가 이어진 지 어언 22년째다. 왕권 중심 국가인 조선에서 혈통은 주요한 요소였고 이와 연계해 서인과 동인으로 나뉜 파벌의 폐해 또한 심각해지며 조선은 정쟁과 숙청이 거듭되는 혼란기로 접어든다. 정쟁이 어느 정도로 심각하냐면, 오로지 제가 속한 파벌의 이해관계에 따라 관료들의 정책적 입장이 달라질 정도다. 일본이 호시탐탐 침략의 야욕을 드러내던 시기, 조선에서 파견한 사절단조차 당파에 따라 국왕에게 보고를 달리할 만큼 조선 내 갈등은 심각했다.

영화가 그대로 담고 있는 바, 일본에 다녀온 김성일은 전쟁 가능성을 제기한 황윤길과 달리 전쟁의 가능성이 없다고 말한 바 있다. 후에 류성룡이 고의로 황윤길과 다른 입장을 말한 것을 지적하며 전쟁이 일어나면 어쩌려느냐 묻자 김성일은 "다만 온 나라가 불안에 휩싸일까봐 그런 것"이라고 변명한다. 영화는 그의 이 같은 대사를 그대로 담아내며 조선의 정치가 국가와 왕, 백성을 돌보지 않고 정쟁에 치중해 있음을 드러낸다.

조선의 무능함은 영화 내내 적나라하게 그려진다. 김창완은 특유의 연기로 비열하기까지 한 국왕의 모습을 펼쳐낸다. 제게 반하는 모습을 참아내지 못하고 한 번 수틀리면 그 끝이 길게 남는 지도자, 그리하여 신하들이 오로지 저의 눈치를 살피는데 급급한 정국을 만들어내는 상황을 만들어내는 권력자의 모습을 시대의 단면으로 읽어낸 것이다.

영화는 오로지 제 권위를 유지하는데 급급하여 갈라선 신하들의 갈등을 이용해 키우기까지 하는 무능력함을 우스꽝스러울 만큼 풍자하여 묘사한다. 이를테면 '육지는 권율, 바다는 이순신'을 요구하는 동인들과 '육지는 신립, 바다는 원균'을 주장한 서인 사이에서 '육지는 신립, 바다는 이순신'을 채택하는 식이다. 장수의 실력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스틸컷
ⓒ SK 텔레콤
 
몰락하는 조선조와 오늘의 한국 

뿐만 아니다. 영화는 정여립 모반사건에 상상력을 가미하여 무능력한 조정을 갈아엎으려는 이들의 작당모의에 주목하고, 조선이 이를 수습할 역량이 없었다는 사실을 부각한다. 그리하여 상륙한 고니시 유키나가의 왜군이 수도인 한양에 입성한 뒤 실제 역사와 달리 대동계 구성원들과 경복궁에서 일전을 펼치는 모습을 집중하여 잡아낸다. 이몽학과 견자가 궁 안에서 얽힌 관계를 청산하는 대결을 펼치는 것과 한편으로 왜군과 대동계의 싸움을 배치한 건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라 해도 좋겠다.

조선은 중국 중심의 세계에서 독자적으로 천문을 읽어낸 몇 안 되는 나라였다. 그로부터 저만의 달력을 만들어 보급했고, 조선의 독자적인 시간을 가질 만큼 주체성 있는 국가였다. 또한 독자적인 언어인 한글을 창제해 일부나마 사용해 그 저변을 넓혀갔다. 그밖에 화약무기를 개발해 사용했으며 유학을 발전시켜 사회에 뜻 있는 선비들을 양성해 적극 정치에 참여시키기도 했다. 이순신과 같은 구국의 영웅 또한 조선이란 국가가 길러낸 측면이 크다.

그러나 그 이면엔 파벌싸움으로 얼룩진 혼란한 정국과 적자와 서자를 구분해 따지는 고루한 문화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수많은 선비를 고작 당파싸움으로 죽여가며 갈등을 키웠고 혼탁한 국왕과 무능한 정치가 나라를 혼란케 했다. 그리하여 선조 이후 조선은 쇠락을 거듭하게 된다.

이준익 감독이 만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을 채택해 영화화한 것도 이러한 것이었던 듯 보인다. 장편만화를 두 시간짜리 영화로 제작하는 과정에서 그 서사를 크게 덜어낸 것이 패착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덜어내려 하지 않았던 조선의 민낯은 그가 진정으로 보이고 싶었던 풍경이었던 것이 아닐까. 당파로 갈라져 국민을 바라보지 않는 정치, 정책은 내팽개치고 권력만 바라보는 정치가며 관료들 같은 모습 말이다. 바로 이러한 모습에 주목한다면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을 되짚어 볼 구석 없는 졸작으로만 이해하진 않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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